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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ㅣ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평점 :
'다산 정약용은 높은 산과 같고, 박지원은 깊은 물과 같다.' 어느 학자의 말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살아간 두 인물!! 그러나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서로 정치적 입지가 달랐지만, 우리에게 영정조 시대의 커다란 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찬란한 두 빛중에서 나는 다산에게 끌린다. 해학이 넘치는 박지원의 글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며 언젠가 정조와 같은 현군이 나타나면 개혁의 자료로 쓸 수 있는 책을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다산의 모습이 나의 가슴이 더 다가온다. 다산을 알면 알 수록 다산을 다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 다산을 알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덕일의 책과 정민 교수의 책도에서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지만, 다산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다산학의 대가로 불리는 박석무님의 책을 빼들었다.
1.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
농경사회에서 아들은 커다란 재산이다. 커다란 노동력을 얻었으며,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노후대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배가는 길목에서 다산은 부모에게 시를 짓는다. 그 시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라는 글귀가 있다. 10달을 배속에서 키워 장성 시켰는데, 그 아들들이 줄줄이 유배를 가고, 혹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 낳은 기쁨보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고 기뻐하지 않고 이제는 슬퍼할 것이라는 말이다. 노론 벽파의 정치적 보복과 공서파의 공격으로 수많은 남인 신서파가 죽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다산은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공서파는 다산을 죽이려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산을 다시 한번 불러들여 국문한다. 특히 정승 서용보는 다죽여도 다산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며 다산을 죽이려한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비행을 왕에게 보고한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처절히 보복한다. 피의 정치보복 앞에서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 된다.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죽어서도 편히 누워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천주교를 믿은 것이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다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버이와 같은 정조가 살아 있을 때, 반성문을 쓴다. 이른바 '자명소'이다. 자신이 한때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호기심에서 천주교를 믿었으나, 제사를 배척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알고 나서는 이를 멀리했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담은 상소문이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 조차도 글이 아름답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가 공개 반성문을 써야할 정도로 다산은 삶의 끈을 놓치 않으려 처절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도 아마 신유박해의 '기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라는 어버이 군주가 사라진다면, 죽음의 먹구름이 맹렬히 그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2. 나는 저술로 평가받으련다.
유배지에서 그는 몰락한 가문을 걱정하고, 흑산도로 유배된 형을 그리워했다. 불행은 혼자오지 않았다. 6남 3녀를 낳았지만, 2남 1여만 살아남았다. 유배지에서 두 아이를 잃은 다산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배지에서 자식을 잃은 다산은 자신의 상실감보다 아내의 건강을 더 걱정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효도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어수선한 꿈을 꾼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듣고 나서는 너무도 괴로워한다. 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산의 심정도 이순신 장군과 같지 않았을까?
연이은 불행 속에서도 다산은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다. 유배지 장기에서 '촌병혹치', '이야슬', '기해방례변'을 저술하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인다. 강진에서는 해남윤씨 처가의 도움으로 책을 빌려 볼 수 있었으나, 장기에서는 참고서적조차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러한 책들을 저술한 그의 집중력에 감탄을 한다. 그후, 유배지에서 500여권이라는 놀라운 저술 활동을 한다. 다산은 왜? 이리도 저술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을까?
그 해답은 다산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이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할 것 아니냐' 라는 글귀에서, 다산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토록 저술활동에 매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이 신을 두려워 한다면, 동양인들은 역사를 무서워한다. 다산은 역사에 자신이 죄인으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벽파와 공서파의 기록만 보고, 자신을 못난 죄인으로 후세인들이 평가하는 것을 그는 두려워했다. 그는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참고, '사기'를 저술했듯이, 500여권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당당히 시대의 참다운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홉마리 소의 한가닥 털이기 보다는, 당당한 한마리의 소로, 닭들 속의 학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다산은 폐족이기에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과거 공부만 하지 않고 참다운 학문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을 한다. 나의 환경이 이렇기에,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신은 이럴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서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초고에 해당되는 글들을 썼다. 그리고 이책의 저자 박석무는 감옥에서 다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은 친구 노무현의 죽음과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패하고 나서 더욱성숙했다. 시련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강한 인간의 신념이 냉혹한 현실을 자신을 벼리는 숫돌로 만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루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참다운 진리의 세계가 된다!!
3. 조선시다운 조선시를 짓겠다.
이 책은 다른 다산 관련 서적과는 달리, 다산의 시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탁월한 시인이로서의 다산의 모습을 이책을 통해서 마음껏 보았다. 또한 다산이 그린 그림도 수록되어있어, 다산을 조선의 다빈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산의 시는 다른 한시와는 달리, 아가, 납하 등의 우리의 토속어를 시어로 참음해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즐겨 사용해야 지식인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에 비해서 그는, 우리 조선의 산천과 사람들, 그리고 말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들의 말을 차음해서 시를 지었다. 문학면에서도 엄청난 시도였다.
한편, 아쉬움도 남는다. 첫째는 장기현 마현리에 다산과 관련된 일화가 제대로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산은 마현리 사람들의 말과 생활을 시로 읊조리며 그들을 잊지 않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일화는 전승하면서도 다산의 일화는 전승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다산의 유배집터 조차도 모르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둘째는 다산이 한글시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산의 외가 6대조인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다수 남겼다. 그러나 나산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가 민중의 삶과 애환을 한글시조로 노래했다면, 다산이라는 산은 더욱 높이 솟았을 것이다. 못내 아쉬움이 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남겼는데, 다산은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천에 은거해 사는 사람과, 사회 개혁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언젠가는 정조와 같은 군주를 만나 민초들을 구제하겠다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계에 다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양반의 글자인 한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의 상상일 뿐이다.
4. 아쉬운 점, 그리고 잡다한 생각
논개는 기생일까? 다산은 논개를 '의기' 즉, 의로운 기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결과 논개는 기녀가 아니다. 평민 여성일뿐이다. 다산을 비롯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논개를 기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의기'로 묘사했다.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고 다산의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를 저자가 지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책을 읽는 내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과 비교가 되었다.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에서 전염병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중국황제의 죽음을 예측한 다산의 '기미' 관찰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 5줄로 서술을 마무리지었다. 서술 목적에 따라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같은 주제의 책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다산에 대한 연구는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먼저 활발히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가? 다산의 매력을 북이 먼저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산이 저술한 500여권의 책은 이 시대에도 많은 지혜를 주고 있다. 다산에 대한 연구가 남북한 모두에게서 활발히 진행되고, 더 나아가서 남북한이 함께 다산연구를 하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위인전을 제외하면, 다산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이번에 3번째이다. 매번 책을 읽을 때, 다산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하고,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다산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많은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산에 대한 더 좋은 연구서가 나온다면 다시한번 다산에 오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