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미자 씨 낮은산 작은숲 12
유은실 지음, 장경혜 그림 / 낮은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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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유은실 작가의 새 책 <나도 편식할거야>를 읽게 되었다. 일곱살 막내랑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군더더기 없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글도 좋았고 먹성좋은 1학년 정이의 깜찍한 이야기도 정감있었다.  그렇게 "역시 유은실이야!"하며 읽고 나니 문득 아, 내가 아직 <우리동네 미자씨>를 안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우리 동네 미자 씨>뿐 아니라 <마지막 이벤트>도..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 한 번은 대출중이라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 성공했다 - 빌렸다.  

돈도 잃고 사랑도 잃어 몸도 마음도 가난하고 외로운 미자 씨의 이야기는 어둡게 흘러가게 놔둔다면 끝도 없이 춥고 음울한 곳으로 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의 억척스럽고 궁상맞은 모습을 그리다가 난데없는 희망으로 끝을 맺는 잔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대책없이 밝고 슬프다.  

미자 씨는 '찢어진 모기장도 바꾸지 못하고 햬진 구두를 그냥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 그리고 잔치음식은 갖다주기 전에 찾아가 잔뜩 먹고 하다못해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도 뺏어 먹을 정도로 식탐이 강하다. 가난해서 배고픈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이라고 여기면 간단하겠지만 작가는 이 씩씩하고 밝은 미자 씨 이면의 슬픔을 슬쩍 보여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죠. 미자 씨는 먹고 싶은 걸 참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돈을 몽땅 잃어버린 다음부터 말이에요.
"오늘도 눈치 없이 먹고 다녔나 보다."
밤이 되면 미자 씨는 하루를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곤 했어요. 어떤 날은 훌쩍훌쩍 울기도 했죠.

 미자 씨의 억척스러운 식탐 뒤엔 잃어버린 것들이 남겨놓은 텅 빈 자리들이 훵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슬픈 것을 슬프지 않게 보여주고 웃고난 다음에 아프게 한다.  

<동태 두 마리>에서 미자 씨는 수요일과 토요일 아침마다 반찬거리를 트럭에 싣고 팔러 오는 부식차 장사가 선물로 준 동태 두 마리를 가지고 '얼큰 시원 동태찌개'를 만든다. 이혼한 부모때문에 큰아빠네 얹혀서 혼자 사는 5학년짜리 성지가 마을회관 컴퓨터로 검색해서 알아다준 레시피를 참고로 해서. 그런데 레시피대로 찌개를 끓일 수가 없다. 레시피에 있는 재료를 다 갖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대받은 손님 성지는 그 점이 못마땅하다. 도무지 제대로 된 찌개가 될 것 같지가 않아 불만이다.  

"정말 그것만 넣을 거야?" 
"음, 걱정하지 마. 이렇게 해도 돼." 
"맛없잖아."
"아니야. 맛이 있긴 있어. 많지 않아서 그렇지 보통은 돼."
"아, 아줌마 보통은 보통이 아니라니까."
"........"
미자 씨는 마늘을 다지다 말고 성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있잖아 성지야, 내 보통이 보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게?"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불행해져."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우기면서 살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기를 쓰고 우기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불행해지지 않는다. 우리를 보통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것까지만 봐야 한다. 유명한 블로그에서 찾아냈다는 '얼큰 시원 동태찌개 만드는 법'같은 건 아예 눈을 질끈 감고 보지 않아야 한다. 보고도 못 본척 해야 한다. 갖가지 재료가 들어가야 하는'얼큰 시원 동태찌개 만드는 법'을 '보통'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억소리도 모자라게 비싼 집, 차, 옷, 가방, 구두 그리고 기죽이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늘씬하고 예쁜 사람들이 절대로 보통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화려한 것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가려진 다음에야 보통인 우리들이 비로소 아름답게 반짝 드러날지도 모른다.   

"칫, 어떤 미친 도둑이 아줌마네 집을 털어" 
성지가 피식 웃었어요.
"너 모르는구나. 캄캄한 데서 언뜻 보면 우리 집도 부잣집으로 보일지 몰라. 옛날에 니네 큰엄마가 그랬거든. 캄캄한 데서 언뜻 보면 나도 되게 예뻐 보인다고."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는 곳에서는 우리의 추레함도 적나라하게 드러날 터,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늘 속에 있는 것은 양지의 그러한 횡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외로운 성지는 외로운 미자 씨에게 올 때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가 된다. 치약의 다양한 사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동태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아는 사람, 동물학대에 대해서 자신있게 주장을 펼치고 여우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만나서 조금은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걸까.   

"성지야." 
"왜 그러는데."
"나 한 번만 안아 줄래?"
"그러면 들어갈 거야?"
"음."
"여우 목도리 풀어. 그럼 안아 줄게."
미자 씨는 목도리를 풀었어요. 그리고 성지를 꼭 안았지요.
"아, 숨 막혀. 팔에 힘 좀 빼."
성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어요. 사람 품에 안겨 본 게 아주아주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 외로움은 꽉 안아줘야 한다. 자꾸 억지로 쫓아내려하면 더 질기게 붙잡고 늘어질 위험이 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그 사람이 외로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겠다), 하다못해 베개를 끌어안고서라도 외로움은 풀어내야 한다. 자기가 '보통'이라고 믿는 외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작가는 '내 안에 미자 씨가 있다.'고 했다.  내 안에도 미자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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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14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도 미자씨가 있어요~~~~~~ 라고 고백하고 싶은 리뷰!

섬사이 2011-04-14 10:37   좋아요 0 | URL
그럼 우리 숨막히게 꽉 안아줘야 하는데.. ^^

다락방 2011-04-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여동생 읽으라고 줬더니 "미자씨 읽으니까 언니 생각난다" 하더라구요. 제 안에도 미자씨는 있어요.

섬사이 2011-04-14 10:36   좋아요 0 | URL
우린 거의 모두 '보통'으로 외로운가 봐요. ^^

마녀고양이 2011-04-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래서 오늘 잘 때도, 딸아이의 곰돌이를 꼭 껴안고 잤나 봐요. ^^

섬사이 2011-04-15 13:35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꼬맹이딸을 꼭 안고 자요.
꼬맹이딸이 자라서 제 품을 떠나면...그 땐 저도 곰돌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