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말 속에서 당장 짐을 싸 도망쳐버리고 싶은 그 많은 날들을 나는 어떻게든 견뎠다. 심지어 인간들을 견디는 그 힘든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냈다. 나는 나를 세뇌했다. 저 정도면 좋은 사람이라며, 모른 척 한 본 척, 잘 지냈다. 유머와 친화력은 내 무수한 성격적 결함들을 커버하며 조직형 인간의 장점으로 두루 각광받았다. ‘사내정치의 달인’이라는 비아냥이 들려놨을 때, 내가 울었던가 웃었던가. 쟤는 출세하려고 저런다, 누구하고나 잘 지내는 거 봐라, 저게 다 권력 획득을 위한 관리다 등등. 차라리 그런 사짜의 권력의지가 내게 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분열 없이 행복했을 것인데, 못하기 싫었을 뿐인데 쓸데없이 너무 잘해버려서, 은밀히 이런 고충을 토로하면서 모두가 놀라며 믿어주지 않았던 것. 피부에 들러붙은 피복처럼 몸에 익어버린 처세. 내면과 외면의 격차. 그게 내 고통의 원천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나이에 커리어의 한복판에 주저앉아버린 원인일 것이다.


(13-14)

한심하게 빈둥거렸던 그 긴 시간이 즐거웠다고만 할 수는 없다. 늘 낙담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내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나의 미래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나는 자주 낙담했다. 혼자서 학교 다릴 수 있으면 자식은 다 키운 거라던 내 계산은 완전히 빗나간 오답이어서, 두 사춘기 자녀의 양육이라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과업은 다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도록 나를 압도했다. 달콤했던 고독이 자각할 새도 없이 위태로운 고립으로 나를 몰어넣은 일도 흔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울 일이 많았고, 나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인에 대해 낙담하고 또 낙담했다.


(31)

인사권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사기업이든 국가기관이든 권력이란 그 조직의 수장에게 부여된 인사권을 일컫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조직의 소명과 비전에 따라, 능력과 적성에 맞춰 인사를 하면 참으로 좋으련만, 너무 많은 리더들이 자신의 안위와 편의를 최종심급으로 인사권을 행사한다. 내 말을 잘 듣고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등용할 사람이다 보니 그들이 유능하거나 윤리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자들은 옆에 두면 불편하니까. 피곤하니까. 그렇게 등용된 사람은 당연히 인사권자의 은혜에 감읍하여 충성에 들이고 보니 자리 보전이 지상의 과제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아래로는 쥐어짜고 위로는 굽신굽신거리는 사이, 어, 비전과 소명은 어디로 갔지? 가끔씩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운전기사가 딸린 법인차량을 떠올린다. 전망 좋은 임원실과 명함을 내밀면 고개를 조아리며 “만나뵙게 돼서 영광”이라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다. 나는 잘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잃을 순 없다. 주제에 감히 의로운 것들은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다.


(42-43)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욕망의 지도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간다. 내 삶은 지금까지 축적해온 내 선택들의 총합이다. 나는 아마 인생을 다시 살아도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내 욕망의 나침반이 결국 같은 지도를 그리게 만들 테니 말이다. 욕망의 지번이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온통 나 같은 사람들이다. 끝내 순정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 아무리 날렵한 지성과 세련된 유머를 구사해도 알고 보면 우직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촌스러운 사람들.

                              

(89)

멀어진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늘 청결한 욕실을 원한다면 청소라는 노력이 부단히 필요한 것처럼, 멀어지는 마음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햇볕을 자주 쐐주야 한다. 가까이 있는 동안은 이러저러한 사회적치적 자력으로 인해 접시가 잘 깨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관계를 유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멀어지고 나면 이런저런 실금들이 총궐기하면서 관계의 청산을 요구한다. “이런 일들이 있었잖아요! 그만 끝내라고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당신은 실금들의 궐기에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지고 싶지 않다면 전화기를 들어야 하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며, 가끔은 선물을 고르고, 편지를 써야 합니다. 내가 미처 못했을 땐 아무리 바빠도 기쁘게 연락을 받아야 하고, 정말 바빠서 연락을 놓쳤다면 반드시 콜백을 해야 하며, 예기치 못한 편지나 선물에는 산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반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멀어지기의 기술입니다.


(97)

대학이란 이상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즐겁다. 즐겁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비슷한 능력과 비슷한 야심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사람들은 즐거운데, 나만 혼자 이렇게 달려져 있다. 생애 첫 외톨이 체험이라는 불의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자처한 일임에도 쉽지 않았다. 고립이란 그 나이가 되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서, 혼자서 밥을 혼자서 강의를 듣고 혼자서 도서관에 가 있는 끝없는 나날들은 굳은 결의와 심지를 요했다. 자꾸 투항하려는 스스로를 저지하며 나는 남몰래 쓸쓸했다.


(106)

어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 깨달음이란 기쁨과 함께 오지 않고 슬픔과 함께 온다는 것. 사람을 더 현명해지도록 만드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 더 현명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더 슬픈 사람이며, 그것이 내가 그토록 강렬하게 슬픔의 수집가가 되려면 이유였던 것이다. 나는 삶을 잘 살고 싶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 삶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삶의 폭력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슬퍼야 한다. 슬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슬픔만이 나를 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137)

몇 해 전 옐로스톤에 갔다가 절벽 앞에 큰 글씨고 Know Your Limits 라고 써놓은 경고문을 골똘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몹시 참신했다. 미국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The sky is the limit(한계란 없어).”, “Anything is possible(무엇이든 가능해).” 같은 ‘내 귀에 캔디(ear candy)’들뿐인데, 네 한계를 알라니 매우 청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같은 험준한 여행지에 가면 절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발뒤꿈치만 대고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한두 명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그곳의 절경보다 더 놀랍다. 그러다 발생하는 추락사가 그랜드 캐니언에서만 연간 방문객 40만 명당 한 명꼴이라고 한다. 2015년 한 해에만 55명이 그렇게 죽었다. “당신의 한계를 아세요.” 이 단호한 명령이 내게는 엄마의 다정한 꾸짖음처럼 그렇게 정겹고 위안이 된다.


(157)

너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다. 너에게 인색하기란 내게 몹시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란 본디 흘러넘치는 것이고, 정량의 사랑이란 고로 형용모슨이다. 베이킹용 계량법의 봉긋 솟아오른 밀가루를 자객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날로 깎아내는 그런 깍쟁이 같은 사랑은 내게 사랑이 아니다.


(161-162)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 속에 아이를 낳아 내놓았다. 인간이 결코 철회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다면, 결단코 손절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이다. 깍쟁이 아내, 얌체 남편은 있어도 깍쟁이 엄마, 얌체 아빠는 없어서 이 관계에서만큼은 모두가 흘러넘친다. 오랜 세월 자신의 둑 안쪽에 가둬뒀던 그 많은 사랑을 댐처럼 방류한다. 밭이 바닥에 닿지 않는 사랑의 도도한 강물 속에서 마치 온수풀에 커다란 튜브를 끼고 누운 것처럼 유영을 즐기던 아이들은 성당과 함께 매정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 내던져지고, 급격한 온도변화가 가하는 열충격에 파열한다. 부모가 쏟아부른 아무리 거대한 사랑도 아이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뜨거우면 끄거울수록 얼음물 속에 집어넣은 뜨거운 크리스털 잔처럼 열충격에 더 취약할 뿐이다. 세상이 주는 고통에, 타인이 주는 상처에, 사회가 가하는 압박에 잔뜩 겁먹고 할퀴어진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공격한다. 당신이 묻지도 않고 나를 낳아서 일방적으로 낳음 당한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다며 정서적으로 엄마를 후드려 팬다. 우리는 이것을 ‘중2병’이라는 유머러스한 이름으로 더 이상 불러선 안 된다. 이러한 경박한 명명이 모종의 라이선스를 숨을 쉬지 못하는 아이들이 엄마를 후드려 패는 얘기가 쉬쉬할 뿐이지 집집마다 한가득이다.


(169-170)

세상에 상처받을 때마다 엄마를 공격하는 대신, 엄마, 힘들어요,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아직 어린 너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 세상을 호의도 선의도 예의도 거칠고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놓고 집에서만 너무 많은 사랑을 퍼부은 탓에 너희들이 휘청거린다. 너희가 받는 사랑의 원천이 더 다양했더라면, 우리가 사랑의 에너지를 더 많은 곳에 골고루 나누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 꼬고 꼬고 또 꼬아놓은 기형적 문제들과 거기에서 갈리는 0.1점의 차이가 너희들 매일의 삶을 옥죄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양육고를 겪는 일도 없었을 텐데. 너희들을 달래려 그 많은 특권들을 탕진하듯 누리도록 하지도 않았을 테고, 왜 마음대로 나를 낳아 이 거지 같은 일들을 겪고 하느냐는 원망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193)

고통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살아남은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오만방자한 발언이다. 하지만 거기엔 일말의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이 누군가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남으라고,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세상엔 뜻밖에도 허술한 구석들이 제법 있다고 등 두드려주고 싶다.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말라고, 주눅 들 것 없다고, 알고 보면 뭐 중뿔난 것도 없다고 손 꼭 잡아주고 싶다. 세상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아 잔뜩 움츠러든 소녀들, 소년들, 청년들에게 야심을 가지라고, 호랑이를 그리려고 덤벼야 고양이라도 그리는 법이라며, 힘차게 등 떠밀어주고 싶다.


(205)

돌이켜보면 내 삶에도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엉터리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내게 약식 반주법을 알려준 성가대의 대학생 언니, 내가 글짓기 숙제를 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 주눅 든 내가 꿈을 작게 가질 때마다 더 큰 꿈을 꾸라고 격려해준 고3 담임선생님. 그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격려 덕분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세상은 알고 보면 좋은 곳이라고, 사람들은 사실 누군가를 돕고 싶어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것도 물려줄 게 없는 부모를 만나는 불운을 겪어도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도와준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샤넬 크롭티를 물려주는 엄마가 없어도,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된다. 때로는 그렇기에 더더욱 좋은 사람이 된다.


(252)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능력 중 하나는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고정된 악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말이 맞는 말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꿀 결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고, 달라질 결심을 품지 않는 것은 굳이 힘들게 달라져봐야 얻을 실익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잠깐이라도 엿보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빚어내는 변화의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겪게 된다면, 생각을 고쳐먹게 될 것이다. 자기가 속한 작은 곳에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 나 사는 마을에서부터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정색해보자. 뒤에서만 쑥덕공론하다가 한 번에 보내버리지 말고, 시시때때로 정색하면서도 서로에게 관대했으면 좋겠다.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서로가 서로에게 주었으면 좋겠다.


(276)

나는 낭비된 여행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행은 나를 성장시켰고, 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 방랑벽을 선택해 또다시 여행들을 탕진할 것읻. 누구에게든 여행에 탕진된 한 시기는 있는 편이 좋다는 생각한다. 젊어서 할 수 없었다면 나이 들어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 삶을 구원한다는 그런 낭만적 생각은 아무 다시는 갖지 않을 것 같다. 내겐 결핍들을 축적해 갈망으로 변환시키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에 쫓겨, 현실이 싫어, 그저 떠나는 것에만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미친 시간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287-288)

우리 좀 대충 살면 안 될까. 부모의 높은 기대로 괴로워하는 저 많은 아이들을 보라. 길거리에 나붙은 저 많은 소아청소년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의 간판을 보라. 포기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포기와 체념은 사람을 살게 한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인근 학교 학생의 자살 소식을 1년이면 한 번은 꼭 들었다.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로 동네 고등학교에서 인도계 학생 한 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학교에서 학생, 교사, 학부모는 물론 동네 주민들까지 불러 상담 세션을 연 날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글자가 뭐라고 생각해?” 아이들이 사랑, 가족, 행복 같은 단어들을 댔다. “엄마는 포기하고 생각해. 포, 기.” 백미러에 아이들의 의아한 표정이 비쳤다. “정말 힘들 땐 포기하면 돼. 포기해도 괜찮아. 포기가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해주는데,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삶.”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까봐, 맨날 포기할까봐, 그게 무서워서 포기하지 말라고, “포기는 배추 셀 때난 쓰는 말”이라고 가르쳤지만, 우리가 실상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건 포기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언제 포기할 것인지, 어떻게 포기할 것인지, 왜 포기하는 것인지를 가르치는 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닐까.


(291)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 무엇도 나를 죽이지 못하게 했다.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들과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면서 장차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들 덕분에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도 되지 못한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굳이 추락하고 싶지는 않지만, 추락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다. 이 생각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비로소 숨 쉬게 하는지, 자주 놀란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썼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박줄, 그것도 심연 위에 놓인 밧줄을 건너가는 존재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극하면서 짐승에서 과정에서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니체가 말하는 몰락이란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한 과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자신을 해체해야 한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307)

빛이란 전자가 높은 에너지 준위에서 낮은 에너지 준위로 떨어질 때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형식이라고 한다. 각각의 전자가 위치하는 궤도인 전자껍질마다 필요로 하는 에너지값이 다르고, 에너지 준위라 불리는 그 특정 값은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불연속적 계단 구조로 상승 혹은 하강한다. 전자가 낮은 계단에서 높은 계단으로 올라설 때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빛의 형태(광자)로 흡수된다. 반대로 높은 계단에서 낮은 계단으로 내려갈 때 그 에너지의 차이는 빛의 형태로 방출된다. 빛에 관한 이 설명이 나는 몹시 마음에 든다. 높은 계단으로 올라설 때가 아니라 낮은 계단으로 내려올 때 빛이 나오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이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그렇지 않다. 내려와도 괜찮다. 빛이 거기에 있다.


(314)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은 그 위치에너지의 힘으로 끝내 우리를 구원한다. 너무나 지쳤다는 것,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난다는 것. 입을 뻥긋할 기운도 없는 깊은 절망과 피로,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다. 세상의 많은 혁명은 넌덜머리의 에너지로 발발했으며, 지긋지긋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도록 만드는 가공할 힘, 넌덜머리. 지긋지긋.


(340-341)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한테 갔다.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아이들이 할머니랑 같이 잤다. 엄마가 큰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애기가 왜 불안할까.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궈놓은 꽃밭에서 재밌게 뛰어놀던 되는데, 뭐가 걱정이 그렇게 많아. 어디 엄마 아빠뿐이야. 여기 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또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모두 다 빙 둘러싸서 너를 지켜주고 있는데, 넘어지지 말라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라고 다 지켜보고 있는데, 왜 불안해. 걱정하지 말어, 응?” 엄마가 돌아누워 멀대처럼 키가 큰 손주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나를 진정시켰던 다정한 말. 나를 달래줬던 사려 깊은 말. 새빨갛게 들어온 편도체의 불을 꺼주는, 쪼그라들었던 전전두엽이 비로소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내 엄마의 자애롭고 지혜로운 혀. 내가 너무 뒤늦게 흉내 내기 시작한 내 최초의 혀. 그렇지, 엄마가 내게 준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이거였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언제든 엄마한테 돌아오라는 말, 엄마랑 같이 어디든 도망가자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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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매니저 2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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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번에 이어서 존 르 카레의 <나이트 매니저> 2권을 이야기 할게. 1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조너선 파인이 영국정보부의 타겟 로퍼의 신임을 얻게 되면서 마무리가 되었잖니. 오늘은 그 이후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게. 조너선은 로퍼의 손님 자격으로 크리스털 섬에서 지내게 된단다. 로퍼의 부하들 중에 일부는 조너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이들도 있어. 그렇다 보니 조너선은 영국정보부의 레너드 버 요원에게 연락하기가 조심스럽고 어려웠어. 간신히 연락해서 짧은 정보가 주고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어.

로퍼는 조너선을 완전히 신뢰하여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어. 그러면서 자신의 사업 이야기도 스스럼 없이 이야기했단다. 로퍼와 갖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로퍼의 젊은 애인 제드와도 만나게 되는데 좀 불편했단다. 그 불편함의 다른 감정은 사랑이었단다. 조너선이 부상이 어느 정도 낫고, 로퍼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자신의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어. 그러면서 조너선에게 임무를 주었단다.

…

위험하긴 하지만 조너선은 로퍼의 비밀정보를 빼와야 했어. 로퍼가 자리를 비웠을 때 조너선은 로퍼의 침실을 통해 사무실에 들어갔어. 그런데 그 사무실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조너선은 제드와 마주치고 말았어.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까? 조너선은 제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단다. 제드가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한 채 당황했단다. 조너선의 순발력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진심이기도 했단다.

…

며칠 뒤 제드는 조너선을 찾아왔어. 그러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어. 제드는 로퍼의 정체를 모르고 그를 따라 이곳에 왔고, 지금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어. 조너선은 그 이야기를 듣고 승부수를 띄웠어. 조너선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솔직히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리고 소피를 로퍼에게 잃었다는 것도 이야기했어. 이젠 둘 만의 비밀이 생긴 거야. 조너선은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을 것 같구나.

 

1.

한편 영국정보부에서도 조너선의 잠입을 이용하여 바쁘게 움직였어. 1권에서 영국정보부는 로퍼의 변호사 아포스톨을 만났잖니. 그를 비밀리에 만나 로퍼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득했어. 결국 아포스톨은 로퍼의 범죄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영국정보부를 도와주기로 했단다. 아포스톨은 레너드 버에게 로퍼의 사업 정보를 넘겨주었어.

….

조너선은 이제 로퍼의 신임을 확실히 얻어서 함께 전용비행기를 타고 외국에도 갔어. 마약 거래 현장에도 동석하게 하고, 무기를 테스트하는 장소에도 함께 가서 무기 성능 시험을 하곤 했어.

…

그런데 어느날 영국정보부에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어. 아포스톨의 정체가 드러나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야. 그런데 아포스톨이 죽기 전에 조너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어. 조너선에게도 상당히 위한 상황이구나. 하지만 조너선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어떤 조치를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야. 또 다른 하나의 정보도 입수했는데, 로퍼의 애인 제드가 조너선과 전화 통화량이 늘었다면서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는 내용이야. 이것도 상당히 위험한 정보였단다.

…

무기 성능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길에 조너선은 다른 때와 다른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어. 몇몇 메모가 로퍼에게 전달되고 그 메모를 본 이후 로퍼는 안색이 변하고 조너선을 대하는 것도 좀 달라진 것 같았어. 로퍼의 최측근 코코란도 뭔가 아는 것 같았어. 조너선의 정체가 밝혀진 것 같은 분위기였단다.

…

영국 정보부의 레너드 버와 굿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고민했어. 그리고 아포스톨의 정체가 발각된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어. 최근에 영국정보부의 활동이 로퍼가 감지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는데, 아포스톨의 발각은 그것을 확신하게 하는 사건이었단다. 그들은 영국정보부 또는 협력하는 미국의 마약 단속국에 로퍼의 끄나풀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

버는 미국 마약단속국의 던햄을 만나서 한가지 제안을 했어. 로퍼의 무기밀거래 선박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있는데 이 선박을 억류하자고 제안을 했어.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선박을 억류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어. 언제 미국이 법적 근거를 따졌다고. 그저 돈만 된다면 트럼프는 그런 법적 근거를 없어도 가능했을 텐데…

…

레너드 버는 함정 수사를 해서 영국정보부에서 활동하는 로퍼의 끄나풀을 찾아낸단다. 로퍼도 예상처럼 조너선이 첩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고문을 가했어. 하지만 조너선은 모진 고문에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신의 단독 행동이라고 했어. 제드와 관계도 발각된 것 같았어. 조너선은 제드와 관계도 부정했단다. 로퍼는 제드도 불러와 조너선과 관계를 추궁했지만 제드는 조너선을 보호하려는 듯한 발언을 했어. 사랑의 힘은 위대하구나.

…

한편 영국정보부의 레너드 버는 로퍼의 끄나풀을 조사하다 보니 영국정보부 내부의 부패세력이 엄청 났어. 로퍼를 체포하게 되면 영국 정부의 추악한 비밀과 고위층의 범죄 연루가 드러날 것 같았어. 그들은 비겁한 거래를 하게 된단다. 한편으로는 조너선을 구해주어야 하는 의무감도 있었어. 레너드 버는 로퍼와 협상을 했어. 로퍼가 국제 무기 거래망을 유지해 주는 조건을 걸고 영국정보부와 관계는 비밀로 하고, 조너선과 제드를 풀어달라고 했단다.

로퍼도 이 조건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단다. 그렇게 조너선과 제드는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소설을 끝이 났단다. 아빠가 뭔가 잘못 이해를 한 것인가 싶었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가장 큰 목적은 로퍼를 잡아들이는 것 아니었나? 로퍼를 그냥 풀어주면서 소설을 끝내다니…

지은이 존 르 카레가 전직 첩보원 출신으로 혹시 실제 있었던 경험을 소설로 쓴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나. 로퍼가 그냥 그렇게 풀려나는 것이 하도 이상해서 이 소설 <나이트 매니저>의 후속작이 있는지 검색해보니 없다고 하더구나.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것이구나. 독자들의 예상을 확 빗나가게 하는 결말. 지은이가 그것을 노렸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소설은 그렇게 끝.

…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도 한번 보고 싶구나. 그리고 검색을 하다 보니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는 10년 만에 시즌 2로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우리가 좋아하는 톰 히들스턴이 주인공이기도 하니, 더욱…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섬은 ‘크리스털’ 쪽과 ‘읍내’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니 행여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녀서 멀쩡한 사람 둘 잡기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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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매니저 1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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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첩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이야기할게. 아빠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지금까지 네 권을 읽었고, 오늘 이야기할 <나이트 매니저>는 다섯 번째란다. <나이트 매니저>는 두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오늘은 1권을 이야기해줄게. 책 표지에 보면 우리들이 좋아하는 얼굴이 보이는구나. 톰 히들스턴. 이 소설 <나이트 매니저>는 오래 전에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톰 히들스턴이 주인공을 맡았다고 하는구나. 그 드라마도 보고 싶은데 우리나라 OTT에서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구나. 소설 <나이트 매니저>도 존 르 카레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첩보에 관한 영화란다. 시대적 배경과 전문 첩보에 관한 상식이 부족해서 소설을 읽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읽었단다.

…

소설은 1991년 1월 스위치 취리히 마이스터 팰리스 호텔이라는 곳에서 시작한단다. 그곳에 야간 지배인, 그러니까 나이트 매니저는 영국인 조너선 파인이란다. 이 조너선 파인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드라마에서 톰 히들스턴이 연기를 했단다. 조너선 파인은 육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집트 카이로에서 선원으로 일했는데, 지금은 호텔의 야간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어. 그날 마이스터 팰리스 호텔에는 거물급 손님이 도착 예정이라서 조너선 파인은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단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날 스위스 취리히는 폭설이 내리고 있어서 예정대로 거물급 손님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

거물급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지 그 폭설을 뚫고 호텔에 도착을 했단다. 영국인 사업가 로퍼와 그의 무리들이었는데 모두 열여섯 명이란다. 조너선은 로퍼를 알고 있었어. 카이로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단다. 조너선은 육 개월 전에 카이로에 있는 퀸 네페르티티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어. 그 호텔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 중에 소피라는 여자가 있었어. 소피는 퀸 네페르티티 호텔의 주인이자 카이로의 갑부 프레디의 애인이기도 했어.

소피는 조너선에게 기밀서류를 복사해서 금고에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단다. 소피는 혹시 자신이 사라지면 그 서류를 오길비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 조너선은 소피 몰래 한 부를 더 복사해서 오길비한테 전해 주었단다. 그 문서에는 카이로 갑부 프레디와 디키 온슬로 로퍼가 불법으로 무기를 거래하는 내용이 있었어. 소피가 오길비에게 정보를 주려고 했던 것 같아. 사실 오길비는 영국정보부 소속의 첩보원이었어. 그런데 프레디는 소피가 자신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었다고 의심하고 다그쳤단다. 소피에게 폭력까지 써가면서 진실을 말하라고 했어. 프레디는 그 일로 로퍼에게 신뢰를 잃었다면서 크게 화를 냈어.

소피는 얼굴에 피멍이 든 상태로 조너선을 찾아왔어. 조너선은 사실 소피를 마음에 품고 있었단다. 조너선는 소피를 데리고 룩소르에 숨겨 주었는데, 며칠 뒤 소피는 살해된 채 발견되었단다. 조너선은 오길비를 찾아가 정보원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고 크게 화를 냈지만, 죽은 소피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어. 조너선은 소피가 죽고 나서 카이로를 떠나 취리히에 온 것인 것인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피를 죽인 자들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았어.

 

1.

그 일이 있고 나서, 영국정보부 소속의 버와 굿휴는 조너선을 섭외하기로 했단다. 버는 취리히에서 호텔 지배인을 하고 있던 조너선을 찾아와 무기밀거래상인 로퍼를 잡는 작전인 림페트 작전을 설명하면서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했단다. 그렇게 조너선은 영국정보부의 스파이로 일하게 되었단다. 조너선은 잭 린덴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로 했어. 조너선의 임무는 로퍼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었어. 쉽지 않은 임무로구나.

조너선은 로퍼가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좋지 않은 이력을 쌓기 시작했단다. 조너선, 아니 잭 린덴은 랜즈엔드 외곽에 선원인 척하면서 지냈어. 그것에서 호주인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와 동시에 잭 린덴이 사라져서 경찰은 잭 린덴을 용의자에 올렸단다. 이것은 버의 지시로 일부러 수배자가 되기 위한 작전이었어. 조너선은 캐나다 퀘벡의 에스페랑스라는 작은 어촌으로 갔단다. 그는 그곳에서는 자크 보르가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좋지 않은 일들에 연루되어 확실히 신분 세탁을 했단다. 조너선은 호텔에서 일해서 그런지 요리를 잘 했단다. 그는 에스페랑스에서 지내면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어.

….

영국 정보부 소속의 버는 미국 마약 단속국 스트렐스키를 만났어. 스트렐스키는 로퍼를 불법마약거래 건으로 추격하고 있다고 했거든. 버와 스트렐스키는 함께 로퍼의 변호사 아포스톨를 만났어. 아포스톨은 로퍼를 사업가로 알고 있고 그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를 듣고 있던 스트렐스키는 화를 내면서 로퍼는 무기와 마약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사랑이라고 큰소리 쳤단다.

…

조너선이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로퍼 일당이 주최하는 파티에 요리사로 일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 파티에서 소동이 하나 일어났단다. 불한당들이 로퍼의 어린 아들 다니엘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어. 이때 조너선이 몰래 그들의 뒤로 다가가 잽싸게 제압하고 다니엘을 구출하는 일이 있었어. 조너선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다니엘은 안전하게 구출했단다. 사실 이 일은 영국정보부가 꾸민 일이었단다. 이 소동으로 로퍼도 그 자리에 와서 조너선을 봤는데, 스위스 호텔에서 만났던 것을 기억해냈단다.

조너선은 이런 저런 일로 캐나다까지 도망 오게 되었다고 했어. 이 납치 사건으로 로퍼는 조너선에게 신뢰를 갖게 되었단다. 조너선은 부상을 입어서 며칠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가 로퍼의 초대로 로퍼의 섬에 와서 지내게 되었어. 로퍼는 자신의 측근인 코코란에게 조너선의 뒷조사를 하게 했고, 잭 린덴으로 신분 세탁을 제대로 해서 로퍼는 잭 린덴에 대해 의심할 부분을 찾지 못했어. 로퍼는 자신의 아들을 살려준 잭 린덴, 즉 조너선을 신뢰하고 자신의 섬에 머물면서 쉬라고 했단다. 조너선이 구출한 로퍼의 아들 다니엘도 조너선을 잘 따랐단다.

…

여기까지 대략적인 <나이트 매니저> 1권의 이야기란다. 더 많은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아빠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정확하지 않고, 몰라도 전체 흐름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뺐단다. 조만간 <나이트 매니저> 2권에 대한 이야기해도 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91년 1월 어느 눈 덮인 저녁, 취리히에 있는 마이스터 팰리스 호텔의 영국인 야간 지배인 조너선 파인은 안내 데스크 뒤 사무실에서 나와 유명 인사의 때 늦은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전에 없던 기분에 사로잡혀 로비를 지키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너무 작게 속삭여서 굿휴도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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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아니, 많이 사용했지” 하고 소장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어.” 프리뮬러꽃과 전원 풍경은 한 가지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것들은 그냥 손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자연에 대한 애착은 공장을 분주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하층계급의 경우는 자연에 대한 애착은 포기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자연에 대한 애착은 포기시키지만 운송가관을 사용하는 경향은 그대로 보존시킨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증오토록 하면서도 그들을 시골로 보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지 프리뮬러꽃이나 전원 풍경에 대한 사랑보다 운송기관을 사용케 할 보다 건전한 경제적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59-60)

그런데 가정은 물질적으로 누추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누추했다. 물질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토끼집과 같았다. 지독히 협소하고 밀집생활의 마찰로 열기가 가득 차고 감정이 새어나왔다. 가족집단의 성원들 사이에는 질식시킬 것 같은 친밀감이 있었고, 위험하기 짝이 없고 광적이고 추잡한 관계가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광적으로 애지중지했다. (물론 자신이 낳은 자식을 말한다.) 마치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어미 고양이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 하고 한없이 반복하여 말할 줄 알았다.

 

(86-87)

“자, 이것이 바로 진보라는 것이야. 노인도 일하며 노인도 이성과 교합하며 노인에게도 시간이 없게 되었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여가가 없으며 잠시도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지. 또한 불행히도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시간의 터널이 입을 벌린다면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는 거야. 유쾌한 소마가 있지. 주말에는 반 그램, 휴일에는 일 그램, 호사스런 동방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이 그램, 달나라의 영원한 암흑 속에서 잠자고 싶으면 삼 그램, 그곳에서 돌아오면 시간의 터널을 빠져 저쪽편에 와 있게 되는 거야. 매일매일의 노동과 기분전환이라는 견실한 대지에 안착되는 것이지. 촉감영화로부터 다른 촉감영화로, 이 여자로부터 탄력 있는 여자로, 전자 골프 코스로부터 다른……”

 

(269-270)

‘이 필자를 감시하기 바람. 세인트 헬레나 섬의 해양생물학 연구소로 전보발령을 내릴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명을 하면서 가엾게 되었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걸작이다. 하지만 일단 목적론적 해석을 용인하기 시작하면-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그것은 상층계급 사이에서 확고한 사상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 받은 조건반사 교육을 백지로 돌릴 가능성이 있는 사상이다. 지고의 선(善)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상실케 하고 그 대신 인간의 최종목적이 어느 피안에 있다고 믿게 할 위험이 있는 사상이다. 최종목적이란 현재의 인간 영역 밖에 있으며 인생의 목적이란 행복의 유지가 아니라 의식의 강화와 세련이며 지식의 확대라는 믿음을 심어 줄 위험이 있는 사상이다. 사실 그것이 옳은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총통은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의 여건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 출판불허라는 단어 밑에다 두 번째 줄을 그었다. 먼저 그었던 줄보다 더 두껍고 더 진했다. 그는 다시 한숨을 지었다. ‘행복에 대한 사색을 허가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336)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강철이 없이는 값싼 플리버 승용차도 만들 수 없어.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자네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 밖으로 집어던진 것 말일세, 자유라!” 총통은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델타 계급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다니!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자네답군!”

 

(339)

“우리는 행복과 안정을 신봉하네. 알과 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불안정하고 비참해지지 않을 수 없는 걸세. 알파 노동자로 채워진 공장을 상상해 보게-다시 말해서 좋은 유전인자를 지니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책임을 떠맡는 일이(제한이 있겠지만) 가능하게끔 조건반사적으로 단련된 개별적으로 상호연관이 없는 인간들로 채워진 경우를 상상하란 말일세. 그것을 상상해 보란 말일세!”하고 그는 반복했다.

 

(343)

벌써 일세기 반 전에 실험이 행해졌었지.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네 시간 노동제를 실시했던 거야. 결과가 어떠했는지 알겠나? 다만 불안과 소마 소비량의 증가라는 결과가 따라왔었네. 단지 그것뿐이었지. 세 시간 반이나 늘어난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그 여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도피할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말았단 말일세. 발명국에는 노동절약을 위한 계획이 산적돼 있네. 수천 가지의 계획서가 작성되어 있단 말일세.”

 

(358)

“바로, 우리들, 즉 현대 세계야. ‘앞길이 창창한 젊은 시절에만 신에 의존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의 독립은 최후까지 인간을 안전하게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죽을 때까지 청춘과 번영을 잃지 않게 되었단 말일세. 그 결과가 무엇이냐고? 분명 우리는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 걸세. ‘종교적 감정이 모든 손실을 보상해 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네만 우리에겐 보상할 손실이란 것이 없는 형편인걸. 종교적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았어. 젊음의 욕망이 쇠퇴하지 않는 마당에 왜 구태여 그것의 대용품을 찾아나서겠는가? 최후까지 옛날의 모든 바보스러운 유희를 즐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분 전환의 대용품을 찾아나서겠나? 우리의 심신이 계속적으로 활동의 기쁨을 누리는 마당에 왜 휴식을 필요가 있겠나? 소마가 있는데 위안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사회의 질서가 있는데 불변부동의 그 무엇이 왜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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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평전 - 105년 만의 귀환
박균.정규화 지음 / 이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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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얼마 전에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미륵 평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이 책은 박균 님과 정규화 님 공저란다. 2010년에 초판이 나왔고, 2025년에 개간본이 나왔는데, 아빠는 2025년 개간본으로 읽었단다. 그 15년 사이에 공동저자이자 평생을 이미륵 님과 그의 작품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신 정규화 님께서 고인이 되셨고, 이미륵 님은 고국을 떠난 지 105년만인 2024년에 비록 유해이지만 우리나라로 돌아오셨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105년 만의 귀환>으로 하셨구나. 더욱 뜻 깊은 개간본이 된 것 같다.

아빠가 이 책을 보고 유튜브로 이미륵 님을 검색해 보니, 옛날 영상이긴 하지만 몇몇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찾아 보았단다. 그 영상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고 정규화 교수님이 등장하는데, 정말 이미륵 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하신 것 같더구나. 자, 그럼 이미륵 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간단히 이야기해볼게.

 

1.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으로 미륵이라는 이름은 아명으로 이미륵의 어머니가 딸만 셋만 낳고 절에 치공을 드린 후 낳은 아들이라서 아명을 이미륵으로 했다는구나. 이 책에서는 본명 이의경과 아명이자 필명인 이미륵을 모두 사용했지만 아빠는 이미륵으로 통일해서 이야기를 할게. 이미륵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군에 태어나셨어. 그의 삶에 대한 읽다 보면 얼마 전에 읽은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 대한 내용과 겹치는 내용이 많단다.

이미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동빈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했단다. 하지만 나라 정세는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어. 너희도 역사를 배웠으니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들을 알고 있겠지.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1910년부터는 신식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어. 이미륵의 아버지는 회복을 하시고 다시 안 좋아지기를 반복하다가 1913년에 돌아가시고 말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을 시키려고 했는지, 이미륵은 11살 나이에 결혼을 했단다. 결혼 후 7년 만에 딸을 얻었지만 세 살 때 그만 죽었다고 하는구나.

1917년에는 독학해서 경성의전에 합격하여 의학 공부를 시작했단다. 의대를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수배령이 내려져서 고향으로 피신했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망명하여 유럽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셨어. 그렇게 그는 중국 상하이로 갔단다. 유럽 유학을 준비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사에서 간호사를 육성하는 일을 맡았단다. 그리고 1920년 4월 여권을 발급받고, 1920년 5월 상해를 출발하여 유럽에 도착하게 된단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이야기했듯이 함께 유럽에 간 안봉근의 도움으로 그는 독일 남부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서 지냈어.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을 검색해보았더니 아직 있더구나. 그곳에서 지내다가 1922년 뷔르크부르크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낯선 언어로 하는 의학 공부는 쉽지 않았어. 당시 독일 남부 지역에는 수십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는구나. 생각보다 많은 숫자로구나. 그런데 친일파의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미륵은 한국에 이어 독일에서 공부했던 의학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뮌헨 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단다.

…

1927년 유덕학생회(옛날에 독일을 덕국이라고 불렀는데, 유덕 학생회는 덕국에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구나.) 소속의 이극로가 연락을 해왔단다. 세계 피압박 민족 결의 대회에 조선 독립을 의제로 제출하려고 한다고 했어. 이극로, 김법진, 이미륵은 함께 <한국의 문제>라는 글을 써서 세계 피압박 민족 결의 대회에 제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부결되어 안건에 상정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1927년 하반기, 이미륵은 알 수 없는 신열로 고생을 했다는구나. 오랜 타지 생활로 몸에 탈이 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는 스위스에서 세 달 동안 요양을 하고 치유가 되어 다시 뮌헨으로 돌아왔어.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서 로자 마우러라는 여자와 만나 교제를 했다는구나. 그런데, 나중에 로자는 나치의 육군부대에 들어가 통역사로 일하면서 멀어졌다고 하는구나.

…

생물학을 전공하던 이미륵은 1928년 ‘재생’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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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의경은 강인한 생명력이란 결국 ‘생’에 대한 항구적이고 독자적인 재생 의지에 달려 있음을 인식했다. 살아남은 개개의 객체들이 때로는 잘려나간 부위를 때로는 상처 입은 부위를 스스로 복원시켜 생명을 연장하였고, 자율적인 복원 능력을 상실한 것들은 결국 도태되고 소멸해버리고마는 ‘진정한 생명의 원리’를 의경은 오히려 생물학의 연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체’의 놀라운 재생력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생의 신비’에 감동했다. 그것은 단지 실증적 실험의 결과로써 뿐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생의 본질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경험세계였고, 의경은 바로 그 본성에 포진해 있는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재를 ‘재생’의 의미로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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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이미륵은 직업을 바로 가질 수 없어서 가난하게 지냈단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지냈단다.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로 자일러 박사의 초대를 받았어. 자일러 박사와 식구들은 이미륵의 서예와 동양 철학에 매료되었단다. 특히 자일러 박사의 아내가 감동을 많이 받아 이미륵에게 잘해 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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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7)

한국의 지성인들은 대부분은 아주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습자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서체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개인이 지향하는 정신적 이데아를 미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개성을 담은 서체로써 그때그때 강하게 혹은 유연하게 자기 사상을 표출하기도 하고, 동시대인과의 예술적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서예는 그 자체로 한국의 전통문화입니다. 그것은 나를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나의 영혼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예술혼의 원천이지요. 사람들은 가장 독특하면서도 난해한 글자체인 초서로 운(韻)에 갇혀 있는 시 문학을 아주 자유분방하고 추상적인 회화예술로 바꾸어 놓지요. 붓은 나 자신을 아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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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이미륵은 자일러 박사의 가족과 연을 이어가 그의 집에서 지냈단다. 자일러 박사 부부는 이미륵을 양아들이라 생각하고 지원해주었어. 이미륵도 이때부터 오랫동안 타지의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해.

 

2.

이미륵은 1931년부터 단편 소설을 비롯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을 썼어. 그리고 한국의 종교와 사상 등을 발표하여 우리나라를 독일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어. 독일에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지. <압록강은 흐른다>의 첫 번째 이야기 <수암과 미륵>을 1935년에 발표했어. 이때부터 필명을 이미륵이라고 했다고 하는구나. <수암과 미륵>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을 독일어로 소개를 했단다.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독일 사람들을 위해 중국어 사전도 편찬하려고 했는데 독일어를 잘하는 중국인을 찾기 어려웠다고 하는구나.

1942년에는 <어느 한국인의 유년에 대한 회상>을 발표했어. 그 즈음 이미륵은 1927년 뮌헨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가르쳤던 스승 쿠르트 후버 교수를 다시 만났어. 쿠르트 후버 교수는 동양 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이미륵과 교류를 하면서 동양 사상에 대한 공부를 했단다. 그런데 쿠르트 후버 교수가 나치에 저항하는 비폭력 저항 단체 ‘백장미’에 참여를 했다가 발각되어 잡혀간 뒤 처형당하고 말았단다. 이미륵은 그의 가족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단다. 그런 행동은 나치에게 끌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나눈 정(情)이 아니겠니..

…

이미륵은 유년 시절부터 독일에 정착할 때까지의 소재로 쓴 단편소설들을 모아서 1944년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된단다. 당시 세계 2차 대전의 말기로 세상이 어려운 시절이라서 그런지 바로 출간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5월 출간되었다고 하는구나. 책이 출간되고 독일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 인간성이 말살된 전쟁이 끝난 뒤 출간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인간미가 풍부하면서 신비한 동양의 이야기였단다. 책이 출간된 지 삼 일만에 한 매체에서 시작된 좋은 평가는 계속 이어졌단다. 그러면서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세계에서 유명해졌어. 책을 통해 그려진 고귀한 문화를 가진 한국을 알렸고,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했단다. 독일 여러 매체들에서 책에 대한 리뷰는 이어졌단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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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05)

독일에서 이름난 잡지와 지역신문에서 연이어 화려한 찬사의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은 매혹적인 삶으로 충만한 낯선 문화의 먼 나라 신비로운 이야기일 뿐 아니라, 마지막 행에 이르러 깊은 감동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고국 땅에서 나온 큰 울림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격정과 힘을 얻는다. 우리는 작가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신비한 나라, 수천 년 동안 유지해온 심오한 정신과 본성 그대로의 순수성을 강탈했던 일본 군대의 포악성에 밤새도록 생각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미륵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울쳐 있었고, 부유하게 태어난 그의 정신적 기질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중국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별이 그토록 오랜 세월 계속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 독일에서 제2의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늘 연평도와 고요한 송림, 고향의 언덕, 그리고 한국에 두고 떠나온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너무도 섬세하고 순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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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가 성공하면서 이미륵은 그 뒷이야기들을 준비했단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널리 유명해지면서 독일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제대로 된 전문가는 부족했어. 그래서 이미륵은 해니쉬 교수의 추천으로 1947년 뮌헨 대학에서 동양학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어. 한국에 대한 강의도 하고 한국어를 소개하기 위해 <한국어 문법>을 저술하기도 했단다. 동양 철학도 강의했는데 특히 <맹자>를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한시를 번역하여 소개했어. 그에게 배운 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뮌헨대학의 동양학부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었어. 그가 계속 독일에서 우리나라를 알리는 일을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단다.

1950년 1월 갑자기 심한 발작과 통증이 찾아왔어.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라고 했단다. 수술을 하고 나서 요양소에서 지냈어. 양어머니 자일러 부인과 제자 애파가 병상을 지켰어. 하지만 그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50년 3월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단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이구나. 그의 작품을 사랑했던 많은 독일인들이 이미륵을 추모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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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이미륵은 절대 자유의 신봉자였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개성을 억압하고 획일화시킨다고 인식했다. 그는 부모가 원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고, 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을 깨우치기보다는 부모가 숟가락으로 떠넘겨주는 것을 떠받아 먹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이들에겐 자유가 필요하고, 그 자유를 통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론과 정치적 주제 포스터가 생을 구원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오직 인간 영혼의 가장 내면적인 가치를 울리게 했을 때 삶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치유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역설했다.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내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나야 하고, 의사는 피딱지와 오물딱지를 씻겨줄 뿐, 진정한 치유는 자기 속으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 아물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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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독일 펜클럽 부회장인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어. 그 때 그는 시간을 내어 이미륵의 누나 이의정을 만나 이미륵의 독일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하는구나. 이 책의 지은이 정규화 교수 등은 이미륵을 한국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의 독립 운동과 한국을 독일 세계에 알리는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단다.

…

이미륵이 우리나라를 떠난 것은 1919년,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한 살.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데 돌아오지 못한 채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타국에서 지내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이미륵은 고향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출하신 것 같구나. <압록강은 흐른다>는 전쟁이 끝난 1946년 삭막한 독일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었단다. 어떤 평가는 1946년의 최고의 독일 문학은 한국 사람이 독일어로 쓴 작품이라는 극찬도 있었다는구나.

<이미륵 평전>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이미륵 님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었는데 그때마다 가슴에 콱 막히는 느낌이었단다. 그런 감정들이 쌓여 병이 생기신 것은 아닌가 싶구나. 얼마 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500번째가 출간되었는데 바로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하는구나.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고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024년 11월 14일 이른 아침 시간, 독일 뮌헨 근교의 작고 조용한 도시 그래펠핑의 공원묘지.

책의 끝 문장: 1996년에 발간된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문을 이미륵의 애제자였고, 훗날 뮌헨대학교에 봉직하던 Wolfgang Bauer(1930~1997) 교수가 써줘서 더욱 돋보였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오직 이 종교만을 추종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가르침을 그릇된 교리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미신이니, 우상숭배이니 하는 말들을 했고, 사람들을 기독교와 이교도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오직 하나의 가르침에만 주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정말 새로운 개념 "종교"가 나타났다! 이후 사람들은 구교인지 아니면 신교인지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물었다. 기독교인들은 한국 땅에서 자신들의 선교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고, 시민들을 교육하였다. 그들은 이 땅의 모든 우상 숭배자들을 몰아냈고, 당목을 베어냈고, 미신적인 종이형상과 신모(神帽)를 불태워버렸다. 새로운 가르침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곳곳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 P125

늘 신을 향한 믿음 속에서 성장해온 한국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개의 낯선 종교들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유교, 인도의 불교, 팔레스티나의 기독교가 그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모든 종교를 숭상했지만, 오히려 그 낯선 객들이 서로 화합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싸우고 또 서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데 그런 종교들마저 이젠 유물론에 위협을 받고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 종교들이 언제 이 땅에서 유기될지, 또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을 정복하게 될지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는 단 한 번도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 민족은 그들의 땅에 들어온 모든 가르침에 감사하지 않았던가. 유교에서는 도적적 질서를, 불교에서는 절제를, 기독교에서는 이웃사랑을 배웠다. 그런데 유물론을 통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 P127

"창공의 어두운 벨벳 속에 박혀있는 작은 은빛 점으로 빛나고 있는 허공의 별을 가리키며, 서양 사람들에게 저 별들은 아득히 먼 별 무리 어딘가에 있는 Altair와 Wega이지요. 두 별은 저기 하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자존심이 강한 청년별과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별은 서로를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지요. 그것은 두 성좌 사이에 바로 강물이 놓여 있기 때문이겠죠. 그 두 별 사이에 있는 너무도 광대한 은하수, 우리 고향에선 그 희뿌연 우윳빛 길을 은하수라고 부르지요." - P142

"그는 결코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다. 한국인 이미륵의 내면 깊숙이 깃들어 있었던 그의 사상과 그의 유산들. 그것은 지혜의 단편이고, 동양의 질서이고, 조화이며, 신의 장소이다. 꽃잎의 그림자는 꽃잎 아래 드리우고, 강줄기는 강바닥 속에서 결코 넘치는 일이 없으며, 밤을 배회하는 사람의 길 위에 뜬 달과 저 멀리 떠난 친구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책상 위의 갓등도 그대로이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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