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말 속에서 당장 짐을 싸 도망쳐버리고 싶은 그 많은 날들을 나는 어떻게든 견뎠다. 심지어 인간들을 견디는 그 힘든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냈다. 나는 나를 세뇌했다. 저 정도면 좋은 사람이라며, 모른 척 한 본 척, 잘 지냈다. 유머와 친화력은 내 무수한 성격적 결함들을 커버하며 조직형 인간의 장점으로 두루 각광받았다. ‘사내정치의 달인이라는 비아냥이 들려놨을 때, 내가 울었던가 웃었던가. 쟤는 출세하려고 저런다, 누구하고나 잘 지내는 거 봐라, 저게 다 권력 획득을 위한 관리다 등등. 차라리 그런 사짜의 권력의지가 내게 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분열 없이 행복했을 것인데, 못하기 싫었을 뿐인데 쓸데없이 너무 잘해버려서, 은밀히 이런 고충을 토로하면서 모두가 놀라며 믿어주지 않았던 것. 피부에 들러붙은 피복처럼 몸에 익어버린 처세. 내면과 외면의 격차. 그게 내 고통의 원천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나이에 커리어의 한복판에 주저앉아버린 원인일 것이다.


(13-14)

한심하게 빈둥거렸던 그 긴 시간이 즐거웠다고만 할 수는 없다. 늘 낙담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내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나의 미래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나는 자주 낙담했다. 혼자서 학교 다릴 수 있으면 자식은 다 키운 거라던 내 계산은 완전히 빗나간 오답이어서, 두 사춘기 자녀의 양육이라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과업은 다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도록 나를 압도했다. 달콤했던 고독이 자각할 새도 없이 위태로운 고립으로 나를 몰어넣은 일도 흔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울 일이 많았고, 나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인에 대해 낙담하고 또 낙담했다.


(31)

인사권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사기업이든 국가기관이든 권력이란 그 조직의 수장에게 부여된 인사권을 일컫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조직의 소명과 비전에 따라, 능력과 적성에 맞춰 인사를 하면 참으로 좋으련만, 너무 많은 리더들이 자신의 안위와 편의를 최종심급으로 인사권을 행사한다. 내 말을 잘 듣고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등용할 사람이다 보니 그들이 유능하거나 윤리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자들은 옆에 두면 불편하니까. 피곤하니까. 그렇게 등용된 사람은 당연히 인사권자의 은혜에 감읍하여 충성에 들이고 보니 자리 보전이 지상의 과제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아래로는 쥐어짜고 위로는 굽신굽신거리는 사이, , 비전과 소명은 어디로 갔지? 가끔씩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운전기사가 딸린 법인차량을 떠올린다. 전망 좋은 임원실과 명함을 내밀면 고개를 조아리며 만나뵙게 돼서 영광이라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다. 나는 잘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잃을 순 없다. 주제에 감히 의로운 것들은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다.


(42-43)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욕망의 지도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간다. 내 삶은 지금까지 축적해온 내 선택들의 총합이다. 나는 아마 인생을 다시 살아도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내 욕망의 나침반이 결국 같은 지도를 그리게 만들 테니 말이다. 욕망의 지번이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온통 나 같은 사람들이다. 끝내 순정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 아무리 날렵한 지성과 세련된 유머를 구사해도 알고 보면 우직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촌스러운 사람들.

                              

(89)

멀어진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늘 청결한 욕실을 원한다면 청소라는 노력이 부단히 필요한 것처럼, 멀어지는 마음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햇볕을 자주 쐐주야 한다. 가까이 있는 동안은 이러저러한 사회적치적 자력으로 인해 접시가 잘 깨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관계를 유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멀어지고 나면 이런저런 실금들이 총궐기하면서 관계의 청산을 요구한다. “이런 일들이 있었잖아요! 그만 끝내라고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당신은 실금들의 궐기에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지고 싶지 않다면 전화기를 들어야 하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며, 가끔은 선물을 고르고, 편지를 써야 합니다. 내가 미처 못했을 땐 아무리 바빠도 기쁘게 연락을 받아야 하고, 정말 바빠서 연락을 놓쳤다면 반드시 콜백을 해야 하며, 예기치 못한 편지나 선물에는 산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반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멀어지기의 기술입니다.


(97)

대학이란 이상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즐겁다. 즐겁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비슷한 능력과 비슷한 야심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사람들은 즐거운데, 나만 혼자 이렇게 달려져 있다. 생애 첫 외톨이 체험이라는 불의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자처한 일임에도 쉽지 않았다. 고립이란 그 나이가 되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서, 혼자서 밥을 혼자서 강의를 듣고 혼자서 도서관에 가 있는 끝없는 나날들은 굳은 결의와 심지를 요했다. 자꾸 투항하려는 스스로를 저지하며 나는 남몰래 쓸쓸했다.


(106)

어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 깨달음이란 기쁨과 함께 오지 않고 슬픔과 함께 온다는 것. 사람을 더 현명해지도록 만드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 더 현명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더 슬픈 사람이며, 그것이 내가 그토록 강렬하게 슬픔의 수집가가 되려면 이유였던 것이다. 나는 삶을 잘 살고 싶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 삶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삶의 폭력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슬퍼야 한다. 슬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슬픔만이 나를 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137)

몇 해 전 옐로스톤에 갔다가 절벽 앞에 큰 글씨고 Know Your Limits 라고 써놓은 경고문을 골똘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몹시 참신했다. 미국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The sky is the limit(한계란 없어).”, “Anything is possible(무엇이든 가능해).” 같은 내 귀에 캔디(ear candy)’들뿐인데, 네 한계를 알라니 매우 청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같은 험준한 여행지에 가면 절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발뒤꿈치만 대고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한두 명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그곳의 절경보다 더 놀랍다. 그러다 발생하는 추락사가 그랜드 캐니언에서만 연간 방문객 40만 명당 한 명꼴이라고 한다. 2015년 한 해에만 55명이 그렇게 죽었다. “당신의 한계를 아세요.” 이 단호한 명령이 내게는 엄마의 다정한 꾸짖음처럼 그렇게 정겹고 위안이 된다.


(157)

너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다. 너에게 인색하기란 내게 몹시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란 본디 흘러넘치는 것이고, 정량의 사랑이란 고로 형용모슨이다. 베이킹용 계량법의 봉긋 솟아오른 밀가루를 자객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날로 깎아내는 그런 깍쟁이 같은 사랑은 내게 사랑이 아니다.


(161-162)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 속에 아이를 낳아 내놓았다. 인간이 결코 철회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다면, 결단코 손절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이다. 깍쟁이 아내, 얌체 남편은 있어도 깍쟁이 엄마, 얌체 아빠는 없어서 이 관계에서만큼은 모두가 흘러넘친다. 오랜 세월 자신의 둑 안쪽에 가둬뒀던 그 많은 사랑을 댐처럼 방류한다. 밭이 바닥에 닿지 않는 사랑의 도도한 강물 속에서 마치 온수풀에 커다란 튜브를 끼고 누운 것처럼 유영을 즐기던 아이들은 성당과 함께 매정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 내던져지고, 급격한 온도변화가 가하는 열충격에 파열한다. 부모가 쏟아부른 아무리 거대한 사랑도 아이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뜨거우면 끄거울수록 얼음물 속에 집어넣은 뜨거운 크리스털 잔처럼 열충격에 더 취약할 뿐이다. 세상이 주는 고통에, 타인이 주는 상처에, 사회가 가하는 압박에 잔뜩 겁먹고 할퀴어진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공격한다. 당신이 묻지도 않고 나를 낳아서 일방적으로 낳음 당한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다며 정서적으로 엄마를 후드려 팬다. 우리는 이것을 2이라는 유머러스한 이름으로 더 이상 불러선 안 된다. 이러한 경박한 명명이 모종의 라이선스를 숨을 쉬지 못하는 아이들이 엄마를 후드려 패는 얘기가 쉬쉬할 뿐이지 집집마다 한가득이다.


(169-170)

세상에 상처받을 때마다 엄마를 공격하는 대신, 엄마, 힘들어요,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아직 어린 너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 세상을 호의도 선의도 예의도 거칠고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놓고 집에서만 너무 많은 사랑을 퍼부은 탓에 너희들이 휘청거린다. 너희가 받는 사랑의 원천이 더 다양했더라면, 우리가 사랑의 에너지를 더 많은 곳에 골고루 나누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 꼬고 꼬고 또 꼬아놓은 기형적 문제들과 거기에서 갈리는 0.1점의 차이가 너희들 매일의 삶을 옥죄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양육고를 겪는 일도 없었을 텐데. 너희들을 달래려 그 많은 특권들을 탕진하듯 누리도록 하지도 않았을 테고, 왜 마음대로 나를 낳아 이 거지 같은 일들을 겪고 하느냐는 원망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193)

고통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살아남은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오만방자한 발언이다. 하지만 거기엔 일말의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이 누군가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남으라고,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세상엔 뜻밖에도 허술한 구석들이 제법 있다고 등 두드려주고 싶다.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말라고, 주눅 들 것 없다고, 알고 보면 뭐 중뿔난 것도 없다고 손 꼭 잡아주고 싶다. 세상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아 잔뜩 움츠러든 소녀들, 소년들, 청년들에게 야심을 가지라고, 호랑이를 그리려고 덤벼야 고양이라도 그리는 법이라며, 힘차게 등 떠밀어주고 싶다.


(205)

돌이켜보면 내 삶에도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엉터리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내게 약식 반주법을 알려준 성가대의 대학생 언니, 내가 글짓기 숙제를 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 주눅 든 내가 꿈을 작게 가질 때마다 더 큰 꿈을 꾸라고 격려해준 고3 담임선생님. 그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격려 덕분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세상은 알고 보면 좋은 곳이라고, 사람들은 사실 누군가를 돕고 싶어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것도 물려줄 게 없는 부모를 만나는 불운을 겪어도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도와준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샤넬 크롭티를 물려주는 엄마가 없어도,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된다. 때로는 그렇기에 더더욱 좋은 사람이 된다.


(252)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능력 중 하나는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고정된 악인이 아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말이 맞는 말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꿀 결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고, 달라질 결심을 품지 않는 것은 굳이 힘들게 달라져봐야 얻을 실익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잠깐이라도 엿보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빚어내는 변화의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겪게 된다면, 생각을 고쳐먹게 될 것이다. 자기가 속한 작은 곳에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 나 사는 마을에서부터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정색해보자. 뒤에서만 쑥덕공론하다가 한 번에 보내버리지 말고, 시시때때로 정색하면서도 서로에게 관대했으면 좋겠다.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서로가 서로에게 주었으면 좋겠다.


(276)

나는 낭비된 여행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행은 나를 성장시켰고, 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 방랑벽을 선택해 또다시 여행들을 탕진할 것읻. 누구에게든 여행에 탕진된 한 시기는 있는 편이 좋다는 생각한다. 젊어서 할 수 없었다면 나이 들어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 삶을 구원한다는 그런 낭만적 생각은 아무 다시는 갖지 않을 것 같다. 내겐 결핍들을 축적해 갈망으로 변환시키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에 쫓겨, 현실이 싫어, 그저 떠나는 것에만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미친 시간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287-288)

우리 좀 대충 살면 안 될까. 부모의 높은 기대로 괴로워하는 저 많은 아이들을 보라. 길거리에 나붙은 저 많은 소아청소년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의 간판을 보라. 포기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포기와 체념은 사람을 살게 한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인근 학교 학생의 자살 소식을 1년이면 한 번은 꼭 들었다.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로 동네 고등학교에서 인도계 학생 한 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학교에서 학생, 교사, 학부모는 물론 동네 주민들까지 불러 상담 세션을 연 날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글자가 뭐라고 생각해?” 아이들이 사랑, 가족, 행복 같은 단어들을 댔다. “엄마는 포기하고 생각해. , .” 백미러에 아이들의 의아한 표정이 비쳤다. “정말 힘들 땐 포기하면 돼. 포기해도 괜찮아. 포기가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해주는데,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까봐, 맨날 포기할까봐, 그게 무서워서 포기하지 말라고, “포기는 배추 셀 때난 쓰는 말이라고 가르쳤지만, 우리가 실상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건 포기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언제 포기할 것인지, 어떻게 포기할 것인지, 왜 포기하는 것인지를 가르치는 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닐까.


(291)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 무엇도 나를 죽이지 못하게 했다.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들과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면서 장차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들 덕분에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도 되지 못한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굳이 추락하고 싶지는 않지만, 추락이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다. 이 생각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비로소 숨 쉬게 하는지, 자주 놀란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썼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박줄, 그것도 심연 위에 놓인 밧줄을 건너가는 존재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극하면서 짐승에서 과정에서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니체가 말하는 몰락이란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한 과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자신을 해체해야 한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307)

빛이란 전자가 높은 에너지 준위에서 낮은 에너지 준위로 떨어질 때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형식이라고 한다. 각각의 전자가 위치하는 궤도인 전자껍질마다 필요로 하는 에너지값이 다르고, 에너지 준위라 불리는 그 특정 값은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불연속적 계단 구조로 상승 혹은 하강한다. 전자가 낮은 계단에서 높은 계단으로 올라설 때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는 빛의 형태(광자)로 흡수된다. 반대로 높은 계단에서 낮은 계단으로 내려갈 때 그 에너지의 차이는 빛의 형태로 방출된다. 빛에 관한 이 설명이 나는 몹시 마음에 든다. 높은 계단으로 올라설 때가 아니라 낮은 계단으로 내려올 때 빛이 나오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이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그렇지 않다. 내려와도 괜찮다. 빛이 거기에 있다.


(314)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은 그 위치에너지의 힘으로 끝내 우리를 구원한다. 너무나 지쳤다는 것,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난다는 것. 입을 뻥긋할 기운도 없는 깊은 절망과 피로,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다. 세상의 많은 혁명은 넌덜머리의 에너지로 발발했으며, 지긋지긋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도록 만드는 가공할 힘, 넌덜머리. 지긋지긋.


(340-341)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한테 갔다.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아이들이 할머니랑 같이 잤다. 엄마가 큰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애기가 왜 불안할까.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궈놓은 꽃밭에서 재밌게 뛰어놀던 되는데, 뭐가 걱정이 그렇게 많아. 어디 엄마 아빠뿐이야. 여기 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또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모두 다 빙 둘러싸서 너를 지켜주고 있는데, 넘어지지 말라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라고 다 지켜보고 있는데, 왜 불안해. 걱정하지 말어, ?” 엄마가 돌아누워 멀대처럼 키가 큰 손주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나를 진정시켰던 다정한 말. 나를 달래줬던 사려 깊은 말. 새빨갛게 들어온 편도체의 불을 꺼주는, 쪼그라들었던 전전두엽이 비로소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내 엄마의 자애롭고 지혜로운 혀. 내가 너무 뒤늦게 흉내 내기 시작한 내 최초의 혀. 그렇지, 엄마가 내게 준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이거였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언제든 엄마한테 돌아오라는 말, 엄마랑 같이 어디든 도망가자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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