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와 불교 살림지식총서 256
오세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나 소설은 인식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시가 그 대상을 객관에서 찾느냐 혹은 주관에서 찾느냐에 따라 대상시와 비대상시가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대상없는 시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 혹은 미래파의 시 역시 대상 없이 쓴 시가 아니라 객관 대신 주관을 대상으로 하여 쓴 시의 한 유형이다.

 

객관을 대상으로 하든 주관을 대상으로 하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시론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론서들이 펼쳐놓은 몇 백 쪽에 이르는 책을 몇 권씩 읽어도 오리무중을 넘어 십리무중이 되어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인가. 작지만 매운 이 책은 무지의 더께를 한 겹 벗겨주었다. 최근 몇 권의 이 살림지식총서들이 여간 마음에 드는게 아니다.

오세영은 휠라이트의 시론과 하이데거의 시론이 불교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음을 명료하게 정리해놓았다. 휠라이트에 의하면 대상이 지닌 실재를 기술하는데 있어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실재와 어긋나 있다. 오직 시의 언어만의 대상이 지닌 실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물을 물질이나 도구로 보지 말고 하나의 실존으로 대해야한다. 즉 대상은 주체가 진실한 마음으로 타자를 향해 귀와 마음을 열고, 타아의 실존 속에서 그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되어 줄 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닿아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현존재를 구분하고 존재는 현존재를 통해 숨겨진 자신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 존재는 언어를 통해 개시되며 이 존재를 이해하는데 언어 이외의 통로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처음으로 현존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시인들이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의미의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그들만의 눈으로 존재를 바라보고 우리에게 '현존'하도록 하는 것일 터이다. 우리가 늘 시에 있어서의 참신성,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학습으로 인해 덧씌워진 내 눈의 껍질을 대체 몇 번이나 벗어야 시의 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불교는 내면의 성찰을 그 핵심으로 한다. 내면을 성찰해 무아의 경지인 해탈(깨달음)에 이르고자 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점수의 수행법이나, 선의 돈오법 등은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수행을 통한 청정심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순간적인 직관의 돌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불교에서의 이 깨달음의 상태는 게송 혹은 오도송을 발생시킨다. 하이데거가 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이든 하이데거의 시론이든 불교의 게송이든 시는 내가(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온다. 더 쉽게 풀어쓰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인은 다만 받아 적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사물은 온몸으로 말한다. 따라서 시인은 사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기 위해 경건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끊임없는 독서와 성찰과 체험을 가지고.

하이데거는 여전히 버겁다.
존재와 현존재의 의미가 헷갈려 머리 쥐어 뜯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이후에 들뢰즈, 알랭 바디우 등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건, 우연, 주름 등 수습할 길 없이 헝클어져 있었던 기억은 악몽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명사와 동사의 차이로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준 이정우 선생의 기억이 생생할 뿐이다.

현대시와 불교의 상관성을 짚은 작가는 '선시란 무엇인가'묻고 그 의미와 종류를 분류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백담사 무금선원 無今禪院 에 기거하는 오현스님의 시에 대한 해설이다. 당시에 서울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을 만큼 오독(?)되었던 <님의 침묵>은 여기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듯하다. 한용운이 자신의 깨달음을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랑을 소재로 한 자유시의 형식을 선택한데 반해 조오현은 시조의 형식을 사용한다. 그동안 한시의 번역본만을 읽다가 한글로 된 시조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10-12-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적은 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읽으니 새롭네요^^

반딧불이 2010-12-13 01:29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책도 읽었군요. 저도 새롭습니다. 이때만 해도 시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나봅니다.
 
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좋아하는 작가와 믿을만한 번역가의 글을 읽는 것은 누구와도 나누고싶지 않은 비밀의 맛이다. 명절을 앞두고 집안청소와 장보기, 음식준비 등으로 마음이 조급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선뜻 덮어둘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로 나를 매료시켰다.이후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인기몰이를 하며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 다녀간 기억도 있다.『개미』이후엔 그의 작품을 찾아읽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언제나 내게 과도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곤한다.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개미』의 행간에 오랜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는 중독성 강한 페로몬을 뿌려놓았던게 틀림없다. 

 『여행의 책』이라고 해서 흔한 세계여행 안내책 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면서도 베르베르가 여행책을? 하며 미심쩍어 했었고 그래도 베르나르라면 뭔가 다르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언제 서점에 가면 정말 그런 여행서인가 한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잊어버려도 그만이려니 싶어 적어두지도 않았던 책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그에서 보게된 이 책이 지리적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한때 마음주었던 남성작가여서 선뜻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났다고 했다. 1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두번 만날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더란다. 나는 예전에 사랑했었던... 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지내던 남자조차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도 못해본 찌질이도 운도 없는 년이다. 근데 이게 불운 맞나?

한때 마음주었던 남자를 길가다가 마주쳤다고 치자. 그 남자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면 내 가슴도 뛸까? 아니면 이미 자산이 되어버린 이 특유의 뻔뻔함으로 어제 만난 친구인듯 담담하게 대할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닥쳐봐야 알것같다.

 10여년 전의 베르베르는 서구적이고 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느낌을 전해주었었다. 바쁜척 하고 다니긴 하지만 10년전에 찜해둔 남자라도 절대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법. 간간이 눈동냥 귀동냥으로 그가『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뇌』, 『나무』 등을 출간했다는 소식 정도는 접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과학적 상상력을 생각해보게 되는 제목들이었다.

그러나 십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동양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석적인 것을 다 아우르고 난 후의 총체적 느낌이랄까.훨씬 더 편안해지고 여유로와진 느낌이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참 많은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과 연애질(?)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여행의 책』은 독특한 느낌을 전해준다. 책이 내게 1:1로 말을 걸어오고 나를 신천옹으로 변신하게 한다. 책은 나를 데리고 시간적, 공간적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과거일수도 있고 또 미래일수도 있다. 그곳은 바로 여기일 수도 있고 먼 과거속의 어느 바닷가일수도 있다. 몸의 여행이 아니라 정신의 여행인 것이다. 그는 공기, 흙, 물, 불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공기의 세계에서는 육체에서 정신을 해방시킨다. 정신의 해방은 마약이나, 종교,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흙의 세계는 안식처다. 나 나름대로 나만의 집을 짓고 꾸민다. 안식의 집에는 나의 상징이 있고 무기가 있고 축제가 있다. 불의 세계는 싸움터다. 이곳에서 나는 내 개인적인 적과도 싸워야 하고 체제나 조직과도 싸워야하며 질병과도 불운과도 싸워야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고 체제는 공격하지 않고도 낙후시킬수 있는 창의적 능력도 있다.또 내몸은 이미 진통제나 소독약, 소염제 등을 스스로 만들어낼 줄 알기 때문에 질병 또한 더이상 적이 아니다. 불운과 맞서서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불운이 안개처럼 덮쳐오거든 가만히 엎드려서 걷히기를 기다리며 나를 되돌아보면 된다. 불운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물의 세계는 만남의 세계이다. 물의 세계에서는 나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조부모를 만난고 조부모의 조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의 조상들을 만나고 더 거슬러 올라가 나의 행성과 은하와 태초의 빅뱅을 만날 수 있다. 

 일찌기 철학자들은 공기, 흙, 불,물을 우주의 4원소로 보았다. 베르베르는 우주의 구성원소인 4원소의 세계로 각각 우리를 안내하면서 동시에 우주로의 여행을 안내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책'은 또한 '책의 여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태초의 빅뱅을 만나던 우주여행을 떠나던 여하간 10년만에 다시 만난 베르나르 베르베르. 가슴이 뛰지는 않았지만 약간 변질된 듯한 그의 페로몬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며 또 다시 10년 후가 되더라도 나는 기쁜마음으로 아무 망설임없이 그를 다시 만날 것같다.  

 

p.s 오늘 아침 그가  영화개봉 관계로 또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개미>도 우리나라 감독과 영화로 준비중이라네.. 돈 많은 남자야 부담없지만 돈 밝히는 남자는 매력없는데...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수잔 손택을 처음 만난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만났던 것은 확실하고, 김수영의 시와 산문들에서 만났던 것도 확실한데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허긴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에게 마음두고 있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얼마전 김수영을 다시 읽으면서 몇장 되지 않는 그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 적 있다. 언제나 런닝셔츠 차림인 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어 얼굴을 찌그러뜨린채  45도 정도 위로 시선을 두고있다. 그가 저렇게 응시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늘 궁금해지곤 한다. 그곳은 김수영이 지향하던 곳이지만 어디라고 딱히 규정되지 않는 곳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의 포즈가 손택의 시선과 유사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애써 그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배치해보지만 그들의 시선은 늘 어긋나고 단 한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인물사진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손택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을 완독하지 못한 채로 『타인의 고통』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읽다가 이책의 전작에 해당하는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을 알게되었다.나는 차근차근 탐독하고 싶은 마음에 『타인의 고통』을 접고 『사진에 관하여』를 준비하면서 그녀의 또 다른 책 『우울한 열정』을 함께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가장먼저 읽게 된 책이 되어버렸다. 내가 읽다가만 『사진에 관하여』의 표지는 아래 왼쪽의 것인데 최근 것은 손택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삼았다. 그녀의 책 대부분이 그녀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소설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온 그녀의 수많은 이력들 중에서 문학평론가로서의 그녀의 모습과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된 셈이다.


『우울한 열정』은 "Under the Sign of Saturn(토성의 영향아래)"라는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손택이 선택한 7명의 예술가들에 관한 에세이가 실려있다.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는 내게도 친숙한 이름이지만 폴 굿맨, 레니 리펜슈탈,지버베르크,엘리아스 카네티, 앙토냉 아르토 등은 손택을 통해 처음 접하게된 인물들이다. 그녀의 각 인물들에 대한 열정과 예술작품에 대한 냉철한 비판으로 인해 나는 친숙한 인물에게서는 더욱 친밀함을, 낯선 인물들에게서는 호기심과 함께 객관적 시선을 갖게 되었다.

"나는 폴 굿맨을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 생존해 있거나 사망한 작가들 중에서, 나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의 가치를 정립하게 해준 작가, 그리고 그 사람의 글을 내글을 평가하는 판단 기준으로 삼은 작가가 몇 명 있는데 그는 그 중 한 사람이다." 20여년 동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로 존재했던 폴 굿맨의 부고를 접한 수잔이 그에 대해 쓴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폴 굿맨은 시, 희곡, 소설뿐만아니라 사회비평, 문학비평 등 지적 전문분야에 관한 책까지 썼다고 한다. 수잔은 그를 미국의 사르트르이고 장 콕토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20여년동안 폴 굿맨의 책 대부분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한 번도 산적이 없다는 수잔의 고백을 듣는 것은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녀의 행복이 부럽다. 누군가 그녀를 우상으로 삼아 그녀의 책을 모두 갖춘 집에서 살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그런것을 알수 없는 곳에 있다. 폴 굿맨의 작품은 아직 번역이 안된 것인지 검색되는 것이 없어서 이 또한 안타깝다.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레니 리펜슈탈에 관한 글은 냉철하다. 리펜슈탈의 나치 전력에 대해 조목 조목 짚어가는 수잔은 그녀의 그런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든 영화『의지의 승리』나 누바족의 사진이 실린 책 『누바족의 최후』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나치즘의 무시무시한 선전선동가여서가 아니라 언제나 아름다움을 병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파시스트 미학은 절제,복종적 행동,과장된 노력,고통의 인내 등에 대한 몰두에서 나오며 이를 정당화한다.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주의와 복종심을 동시에 종용한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는 독특한 볼거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공식 공산주의 예술의 무성적 경건함과 대조적으로 나치 예술은 외설적이며 동시에 이상주의적이다. 유토피아적 미학(육체적 완벽함,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은 이상주의적 에로티시즘을 뜻한다. 섹슈얼리티는 지도자의 매혹과 추종자의 기쁨으로 변환된다. 파시스트적 이상은 성적 에너지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정신적 힘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등 섹슈얼리티가 파시즘과 관계 맺고 있는 파시스트 미학에 대한 수잔의 통찰은 경청해두어야할 것이다.  

 <바르트를 추억하며>역시 바르트가 예순네살로 사망한 후에 수잔이 쓴 글이다. 수잔은 바르트의 작업 전체를 결국은 '자기 묘사'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기획으로 보고 있다. 동성애자였던 바르트는 수잔의 말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자의 관심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의 단상』이 그랬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하지만 『현대의 신화』나 사진에 관한 글에서는 좀 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토성의 영향아래>라는 제목의 벤야민에 관한 글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다. 중세 생리학에서는 피,점액,황담즙,흑담즙등 의 체액의 배합정도가 사람의 성격과 체질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배합의 정도에 따라 쾌활, 냉담, 다혈, 그리고 우울 등의 기질이 나타난다고 했다.벤야민은 스스로 자신을 우울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전통적인 점성술 개념을 끌어와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으로 정의했다. 벤야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토성적 기질을 모두 자신의 연구과제에 투입했으며 그의 기질이 글쓰기의 주제를 결정했다. 

토성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지, 토성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어떤 성향을 띠는지 벤야민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의 작품들과 관련짓고 있다. 철학자이면서 뛰어난 문예 이론가인 벤야민이 점성술을 끌어들이는 것도 재미있지만 점성술에 나타나는 우울증적 기질을 너무나 잘 이용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꼼꼼이 다시 읽어야할 부분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껄끄러운 번역때문에 몇번씩 다시 읽어야했던 문장들이 많다. 수잔의 작품들은 번역한 사람이 각양각색이다. 그만큼 수잔이 관심둔 분야가 다양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0페이지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 수천 페이지를 써야했고 매 페이지마다 30-40개의 초고가 필요했다는 수잔의 글을 완벽하게 번역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번역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책 읽는 즐거움에 번역이 거는 딴지를 부록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번역만으로도 충분이 고마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옮긴이가 도정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뜻 집어들었다. 오래전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읽고 그의 글쓰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비평적 글을 읽는 일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詩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책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가뭄에 콩나듯 계간지나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몇 번 접할 수 있었던 그의 글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책이 다른 책들보다 얼마나 더 잘 번역되었는가는 내 능력밖의 일이지만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품해설 역시 쉽고 명료하게 전달된다. 1945년 8월 17일 출판된 이 책은 영미 두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성공은 『동물농장』이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소련에서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볼세비키 혁명 세력이 유럽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정책(착취계급제거, 평등의 실현, 생산수단의 공유화등)을 펼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런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실현될수 있을까하는 궁금증때문에 이 책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동물농장』에서 오웰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회주의 혁명 자체이거나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독재권력'이며, '혁명의 배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발빠르게 번역된 이 소설은 그러나 오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반공문학으로 오독되고 있는 모양이다. 학창시절 나도 책읽기를 종용당했지만 워낙 정치와 무관하고, 정치에 무식한 탓에 내용파악만 하고 있었을뿐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었다. 뒤늦게 뒷북치듯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왜 우리나라 대통령의 얼굴들이 줄을 서는지 왜 이명박 정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특히 소설 속에서 나폴레옹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스퀼러에게 나는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갔다. 책속의 스퀼러는 러시아 혁명세력의 기관지로 쌍트페테부르크에서 창간되고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 '프라우다'를 상징하고 있다. '진리'를 의미한다는 이 단어가 스퀼러에 의해 끊임없이 조작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조중동의 편파 보도나 우리 정부의 언론 비보도 압력 등을 보고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오웰은 그의 산문 <나는 왜 쓰는가>에서 그가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 그는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형용사들 속으로 속아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그가 '정치적'이라고 밝힌 것이 반드시 사회주의체제하의 소련의 정치상황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오웰도, 번역을 한 도정일도 밝히고 있듯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좀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 폭넚게 이해되어야 할것이다.

도정일은 '풍자(satire)는 무엇보다 당대성의 서사장르'라고 규정하고 '풍자가 물어뜯고 비꼬고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은 그 풍자가 생산되어 나온 당대 사회의 실존 인물, 사회환경과 제도, 이데올로기, 사건, 편견 같은 것'이라고 덧붙인다. 또 그는『동물농장』은 역사적 정치풍자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농장』을 특정의 시대에 얽매이는 역사적 풍자소설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함의의 폭이 훨씬 넓은 우화(fable)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우화는 생산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도 효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솝 우화가 2천 6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듯이 『동물농장』을 우화로 읽을 때 독재 일반에 대한 정치풍자로 그 범위가 확장 되기 때문이다.  

『동물농장』의 주인은 인간 존스에서 스노볼로 또 나폴레옹으로 바뀌지만 정작 농장의 구성원인 동물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오웰은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 본질적 사회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것,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한다는 것 등'이 그가 『동물농장』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라 말하고 있다. 오웰은 권력 주체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무지 또한 같은 비중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뒤적이다 자꾸 미루어둔 오웰의 산문 『코끼리를 쏘다』와 영남대 교수이고 아나키스트인 박홍규가 쓴 조지 오웰의 평전 『조지 오웰-자유, 자연,반권력의 정신』를 함께 읽어두어야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02-12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물농장'을 상당히 인상깊게 읽어서 리뷰를 쓰려 했는데, 님의 글을 읽고 그냥 단념했습니다. 제가 쓰고 싶었지만 머리가 나쁜지라 글로 표현이 전혀 안되는 것들을 님께서 너무 잘 써주셔서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당~

반딧불이 2009-02-1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에~ 무슨 말씀을요. 제 리뷰는 제 '머릿속의 지우개'때문에 언제든 다시 보기 위한것일 뿐인걸요.
 
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핀치는 새 이름이다. 이 새는 대프니 메이저에 산다. 대프니 메이저는 갈라파고스 군도에 있는 작은 화산섬이다. 갈라파고스 군도는 남미의 태평양 해안, 에콰도르 영토이다. 이 화산섬에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도 전혀 없다. 찰스 다윈은 1836년 이 곳에 2주 동안 머물렀다. 다윈은 이 섬에서 핀치라는 새 31마리를 채집했다. 다윈 자신은 갈라파고스 군도에 다시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발자취를 좇아 수많은 자연과학자들이 그곳을 여행했다. 피터 그랜트와 로즈메리 그랜트는 각각 그들 여행자 중의 하나다.  이 부부는 20년 동안 대프니 메이저와 그들의 연구실이 있는 프린스턴을 오가며 핀치를 연구한다. 자연과학자들은 이 핀치를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했다. 땅핀치는 이런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한 핀치의 한 종이다. 그러나 이 땅핀치는 깃털이나 몸의 크기, 형태, 사는 곳 등으로 분류할 수 없고, 단지 부리로만 분류할 수 있다. 이 핀치들은 부리의 크기에 따라 각기 다른 크기의 씨앗을 먹고 산다.

 

 

대프니 메이저는 지면의 온도가 섭씨 50도를 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계속될 때도 있고, 3년에서 6년 기간을 두고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엘리뇨로 인해 몇 주 동안 무시무시하게 비가 내리기도 한다. 가뭄은 종을 말살시킬 지경까지 핀치들을 내몰고, 비가 퍼붓고 난 후에는 태어난 지 석 달도 채 안된 핀치들까지  광란의 교미를 한다. 가뭄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는 핀치가 있고 홍수 후에 더욱 번성하는 핀치가 있다. 대프니 메이저에서 연구한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이런 자연환경 이후의 핀치들을 연구한 결과 가뭄 때에는 큰 부리가 살아남지만 홍수가 지난 뒤에는 크기가 작은 부리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가뭄과 홍수를 되풀이 하는 변덕스러운 자연은 각각의 환경에 알맞은 종을 선택한다. ‘자연선택’ 혹은 ‘적자생존’은 이렇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보다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화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는데 다윈에 따르면 자연선택 자체는 진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진화를 이끌 수 있는 메커니즘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화는 화살을 쏜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계속될까, 아니면 역전될까? 다윈 이후에 대프니 메이저에 사는 핀치의 수만큼이나 많은 학자들이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그곳을 다녀갔다. 그들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예측’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세대 내에서 일어나지만, 진화는 세대를 가로질러 일어난다. 또 진화는 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생성’이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 『핀치의 부리』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핀치가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새가 된 이유다.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들의 주무대인 바다를 더욱 연구할 계획을 세웠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태운 해군측량선 비글호는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섬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항해하고 귀국한다. 이 배에 박물학을 공부하던 22세의 찰스 다윈이 탑승했고 그는 돌아와  『비글호 항해기』, 『종의 기원』, 『인간의 기원』등의 책을 썼다. 

 

 1831년 비글호를 탈때까지만해도 독실한 창조론자였던 다윈은 귀국후에는 진화론자로 변해버렸다.『종의 기원』의 원래 제목은『자연선택 또는 생존 경쟁에서 선호되는 혈통의 보존에 따른 종의 기원에 관하여』이다. 동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다윈은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채집한 새들의 연구에 골몰했고 이 동식물의 과거를, 역사를, 조상을 가계를 생각했다. 그랜트 부부는 갈라파고스 군도에 20여년을 살면서 다윈의 이런 생각들을 증명하기도 하고 진척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주로 연구한 것은 핀치였지만 다른 종들의 기원에도 적용할 수 있고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던 시대에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다윈의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 폭탄선언이 아니었을까.

 

 

추천의 글에서 최재천 교수가 “고통 없이 배우는 것처럼 행복한 배움이 또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수없이 외우고 학습해왔지만 입술에서만 나불거리던 다윈의 개념들을 그랜트 부부의 관찰과 연구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다.  

 

이 신비롭고도 아름운 섬을 여행하고 오신 분이 있다. 언젠가 반드시 내 발을 디디게 될때까지 위안으로 이 사진들을 보며 위안으로 삼는다.  

 

http://blog.naver.com/leenadd/100049217108 

 

http://blog.naver.com/leenadd/100049217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