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빌려드립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하늘연못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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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마르케스는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다. 그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어있지만 대부분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가지로 반응하는 것 같다. 마르케스에게 빠지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내 책꽂이에도 <백년 동안의 고독>이 10년 넘게 고독을 씹고 있다. 이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르케스가 멕시코의 아카풀코 지방으로 여행을 가던중 영감을 받고는 모든 여행을 포기하고 돌아와 1년넘게 집중해서 쓴 글이라고 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전세계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런 작품의 영광과는 달리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포기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늘 마르케스에게 붙어다니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때문인지 나는 마술처럼 그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마술처럼 한권을 밤새워 다 읽고 말았다.  

<꿈을 빌려드립니다>는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는 단편소설이,  2부에는 산문이 그리고 3부에는 작가탐구가 실려있다.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그 느낌이 아직 살아있었던 탓인지 소설보다 먼저 산문을 읽었었는데 산문이 소설보다 훨씬 더 소설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권력과 마찬가지로 여행도 성욕을 돋군다."로 시작하는 <하늘에서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만일 항해자들의 연대기와 그들의 항해일지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금지된 문학의 대표적인 텍스트가 될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미해결된 범죄의 온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파이들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의 군주를 잉태한 밤의 천국이었다.

 
   

 처럼 선박과 기차 안에서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 마르케스는 또 "자동차 속에서 임신되는 아이들이 일반 아이들보다 더 똑똑하고 뼈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통계를 인용하면서 비행기에서의 사랑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비행기의 화장실에서 할수 있는 사랑의 체위는 무려 162가지이며 손잡이만으로도 74가지의 각각다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놀라운 정보도 접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산문부문에서는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과 노벨문학상에 대한 뒷얘기를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때로는 환상문학처럼, 또 때로는 너무나 사실주의적 문학으로 읽힌다. 사실 그의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은 '마술'과 '사실'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역을 한데 붙여놓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은 작품을 읽고나면 이보다 더 옳은 말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단편집에 실려있는 <포르베스 부인의 행복한 여름>과 <난 전화를 걸러 온 것뿐이에요>는 현대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명과 문맹, 소통과 소외, 집단과 개인의 문제등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문명의 혜택을 누린 대령이었던 할아버지와 전통적인 할머니 사이에서 8세가 될때까지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귀신과 괴물이 창궐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후에 마르케스에게 커다란 문학적 토양이 되었다고 한다. 또 마르케스는 토스토예프스키, 발자크, 카프카, 윌리암 포크너, 소포클레스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콜롬비아 태생인 그가 1995년 70세가 넘은 나이로 조국을 버리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을 위한 외교 활동을 해온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는 매일 여덟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하루 표준노동시간을 소설에 할애하고 있다. 그에게 문학은 노동인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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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시작시인선 82
길상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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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녁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길상호는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모르는 척』은 첫시집『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에 이은 두번째 시집이다. 등단 6여년만에 두권의 시집을 묶어냈다면 그는 시에 성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는 양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시집을 읽지 않은 탓에 그의 시가 어떤 시적 변화를 가졌는지 알 길이 없다. 두번째 시집의 제목으로 뽑아올린 시는 원제가 「모르는 척, 아프다」이다.  '모르는 척'이라는 말은 앎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는 사실은 '모르는 척' 할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냥 모르는 것이다. 시인은 무엇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전봇대는 술취한 이의 오줌발을 받아내면서 '모르는 척' 한다. 하지만 전봇대는 '아프다.'  전봇대는 전깃줄을 끌고 가가호호 방문한다.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다. 시인은 사랑에 감전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스스로 '모르는 척'해도 그는 아프다. 누구나 다 타인의 아픔을 아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기에 가능하다. 그가 '모르는 척'하는건 그가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깃줄 보다도 더 질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끈 world wide web으로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아파한다면 시인은 온 생을 앓으며 살아야하리라. 알아야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앓아야하는 것도 시인의 몫일 것이다. 알지만 앓을 수 없는 시인의 생존 방법은 그래서 '모르는척'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동안 두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그는 과일 껍질을 벗기면서 '삶의 나사를 풀어 놓는 중이라고'(「껍질의 본능」) 생각하고, 구두에서 소 한마리를 본다. 때로는 '몬트레 수심 1500m 바닥에/ 다리 셋달린 물고기(「세다리 물고기」)'도 보고  브라운관이 깨진 채 버려진 텔레비젼에서 '어떤 노숙자'를 읽기도 한다. 시를 찾는 시인의 눈이 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 폭넓은 視界는 그 넓이만큼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강변에 앉아 소주 한 병 들이켜고

소주병 말고 나를 던져버리면 되는 일,

어차피 병 속의 술을 몸에 옮겼으니

내가 소주병 되어

뻐끔뻐끔 기포 토하며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

                                        「서울이여, 안녕」

그가 저렇게  말하자 나는 공연히 불안해진다.  그의 첫번째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가 그 제목만으로 식물적 상상력 혹은 자연친화적이라면 이 두번째 시집은 앓고 있는 자의 '모르는 척'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 그가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다라랐음의 다른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난중일기를 떠오르게 하는

굳이 내 육신의 수몰처럼 사소한 일은

신문에 한 줄 글로 기록하지 마라

같은 구절에서는 그의 시에 넘쳐나는 물의 이미지와 겹쳐 나는 출렁, 시의 멀미를 느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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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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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났다>, <근대 문학의 종언>,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등의 책들을 보면 그 제목만으로도 무언가 끝나고 있고 아무래도 곧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는가 싶기도 하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이런 변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기류를 체감하지 못하는 막연함 속에 있다가  책을 읽으면서 그 실체들이 낱낱이 언어화되는 경험은 신선했다. 

제레미는  책 속에서 생산을 지향하던 산업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는 마케팅을 지향하는 문화자본주의의 시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처음 100년 동안은 물질적 가치와 재산의 축적에 집착하는 시대였다. 당연히 저축, 자본형성, 생산양식의 조직 등에 무게 중심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이런 부의 축적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땅을 소유하려 하였고 부의 척도는 돈이었다.그러나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은 무수히 많은 조립 라인과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져 나오는상품의 재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난제를 만났으며 이 난제의 해결책으로 거대한 소비문화를 창출하려는 새로운 소비지향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거대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극장에서 경험을 판매한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더이상 소유를 선호하지 않으며 접속을 선호한다. 기업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매한다. 기업은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비용을 줄이고 필요할때마다 사무실과 사무용품들을 빌려쓰는 리스산업을 이용한다. 이러한 형태의 문화자본주의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분류되던 사회계급은 이제 접속자와 비접속자의 형태로 분류된다. 

 
책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내 주변에는 기계치가 더러 있다. 아직도 핸드폰을 끄고 켜고 하는 일을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로 대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화를 걸고 받는 일외에 전전화기에 있는 다른 기능을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가끔 칠순이 넘은 내아버지가 보내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장부호는 물론 기호도 들어있고 어떤 날은 아이콘도 들어있었다. 지치지 않는 호기심도 놀랍거니와 이 세계와 끊임 없이 소통하고 있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아버지를 존경하게 만들기도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떤가.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받는다. 컴퓨터의 자판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의 기능이 체화되어서 수업시간에 얼굴은 선생님을 보고 있지만 핸드폰의 모니터를 보지 않고도 그들은 책상 밑에서 끝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전화나 문자만이 아니다. 아무때나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이빨을 쑤시고, 묶은 머리의 뒷모습을 사진을 찍어 확인하고 친구에게 전송해주고, 마음에 안들면 다시 수정하고.......  인터넷 접속하고...... 게임하고....음악듣고....영어단어 찾고.....아이들은 이미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는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이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엄마보다도 최고의 기능을 가진 핸드폰을 사줄 경제력있는 부모가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접속자로 남을 것인가, 비접속자로 남을 것인가.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물론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내게 접속을 요구해 오고 있지 않는가. 

주말을 이용해 책읽기를 끝내고 싶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292, 293쪽에 글이 없다.  나는 또 내눈이 헛것을 보나 싶어서 듬성듬성 확인해보니 무려 8쪽이나 되는 것이 흰 백지상태였다. 글로 적으려니 또 흥분이 되려고 한다. 뚜껑이 열린다는 말은 이럴때 사용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주는 충격도 충격이려니와 내로라하는 출판사의 책이 어떻게 이런 상태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나는 책을 샀던 인터넷 서점에 문의를 했고 판매한 사람보다도 출판사에 울화가 끓어 출판사에도 항의를 했다. 출판사 직원이 책을 보내라기에 새책에다가 밑줄 다시 다그어서 다시보내달라고 했더니 책 뒷장을 팩스로 보내란다. 이전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낸 출판사와 같은 출판사라는것 때문에 나의 까칠함은 극에 달했다. 이후에 나는 이책을 세권이나 더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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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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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는 영화 <닥터 지바고>, <해바라기>를 통해 남아있는 몇개의 이미지가 고작이다.
지도상에서 볼때 엄청 넓은 땅덩어리를 보며 징키스칸이 내달렸던 환상을 떠올리는것도 하나의 이미지로 첨부된다.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표기가 어느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볼쇼이 합창단, 짜르, 눈, 크레믈린 궁전 등 이미지도 없는 몇개의 어휘가 전부이고, 언젠가 영국인 친구에게 '러시아'라는 발음을 아무리해도 못알아 듣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러시아'보다 '러샤'에 더 가깝게 발음해야하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작품을 읽는 것은 솔직히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롤랑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를 읽었을때 내가 프랑스 문화를 알면 훨씬 더 재미있을거라는 생각과 함께 기필코 불어를 배우고야 말겠다는 넘치는 의지로 충만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의지는 물론 며칠 못갔고 대신 프랑스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친구를 하나 만들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이번에도 역시 러시아에 대한 기본지식이 너무 없다는 생각 특히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어야 고골의 작품이 훨씬 재미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까자크 전통이 살아 숨쉬는 우크라이나의 소로친치에서 태어났고 고골례보에서 자랐다. 우크라이나는 한때 폴란드의 식민지였고 12세기 초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징키스칸의 손자 바투의 주거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는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등 5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고골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찰관>, 러시아판 신곡이라 불리는 <죽은 혼> 등은 다른 책에 실려있는 모양이다.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는 서방진출을 위해 계획도시인 뻬쩨르부르그를 세웠고 관료제를 정비했다. 러시아의 관료는 모두 14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고골의 작품은 이 관료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년 9등관인 아까끼 아까끼에비치 바쉬마취킨이 어렵게 장만한 외투를 잃어버리고 죽어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의 <외투>, 어느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다가 코가 사라진 것을 알게된 8급관리 쿄발료프의 이야기 <코> 등을 통해 고골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고 있다.

10월 3일의 첫일기로 시작되는 <광인일기>는 12월 8일의 일기까지는 나름대로 시간의 순서를 지키던 날짜가 갑자기 '2000년 4월 43일, 30월 86일 낮과 밤 사이, 며칠도 아니다. 날짜가 없는 날,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다. 달도 없다. 왜그런지 알 수 없다.' 등 주인공의 정신병리학적 상태를 반영하며 전개되어간다. <광인일기>는 에는 당시의 주변국가들의 정치적 상황들이 언급되고 있다. 짜르 체제하에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작가 나름대로의 방책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초상화>는 한 예술가가 가난에 못견뎌 세속적 욕망과 결탁한후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진정한 예술은 무엇이며 타락한 영혼은 종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고골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느 시대에나 참다운 예술가의 적은 늘 물질적 욕망이었다. 현대의 이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예술가의 진정한 적은 무엇일까?

표도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도시 뻬쩨르부르그에는 네프스끼라는 거리가 있다. <네프스끼 거리>는 마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처럼 네프스끼 거리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 거리는 시간마다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붐빈다. 갓 구워낸 빵냄새가 가득찬 아침의 거리에는 남루한 노파와 거지들로 가득차고 12시까지의 거리는 그저 사람들이 지나가는 통로로 활용된다. 또 오후 두시부터 세시까지의 네프스끼 거리는 인간박람회가 열리는 시간이다. 이 거리는 황혼이 깃들면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는데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삐로고프 중위와 화가 삐스까료프의 이야기이다. 고골은 이 두 주인공의 허황된 욕망을 통해 네프스끼 거리를 영혼 부재의 공간으로 그려낸다. 계획도시로서의 뻬쩨르부르그와 이 도시의 대표적인 네프스끼 거리는 유럽 문화가 지배하는 공간으로서 물질적, 성적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범속한 거리로 묘사되고 있다.

어쨌거나 고골의 작품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면서도 인과관계를 무시한 다분히 환상적인 요소들이 소설 전편에 배어있다. 재미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야기 중간에 뛰어들어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었다.
<외투>에서 재봉사의 인물묘사를 하다가 '하기는 이런 재봉사 얘기를 길게 늘어놓을 것까진 없을 것도 같지만, 소설에는 어떤 인물의 성격이건 빠짐없이 묘사해야 한다는 게 이제는 통례로 되어 있으니 부득이 페트로비치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고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코>에서는 아예 소설의 마지막 한 쪽의 전부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객담은 재미도 있지만, 소설 속에서 문득 빠져나와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또 이런 황당무계한 소설을 쓰기는 하지만 작가자신은 이 모든 것을 너무나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고골은 <죽은 혼>의 인물창조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생을 마쳤다고 한다. 문득 글은 그 사람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생각이 든다.

 

고골을 읽으면서 작품을 읽는 시간보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시간, 러시아 역사를 훑어보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이 작품들을 계기로 러시아 문학에서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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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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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은 "한국문학이 돈(Money)과 매스미디어(MassMedia)라는 두 M신(神)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는 김우창 교수의 말을 본문 첫머리에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강준만은 그가(김우창) 개탄만 할뿐 본격적인 비판은 전혀 하지 않고 사색의 세계에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개진해 간다. 그는 계간지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주례비평을 쓰는 평론가와 각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과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는 '동인문학상' 등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어서 그는 현재 한국문단의 주류세력인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등의 정체성과 언론플레이 등 냄새나는 곳곳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다. 김정란, 권성우 등이 그의 날을 세우는데 나름으로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그의 칼날은 예리하고 정확해서 빼어난 검객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가 들이댄 칼이 부패한 곳을 정확히 도려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이 칼을 빼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사색을 거듭했으리라는 짐작을 해보면서 그의 목적이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위한 칼부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문학이라는 자장 밖의 사람인 그가 꽂은 칼의 상처를 치유할 사람은 정작 칼을 꽂은 사람이 아니라 칼 맞은 자여야 한다는 것. 칼 맞은 자들의 용기 있는 치유를 기대해본다.

강준만의 글은 빠르게 읽힌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논지에 맞게 정리한다. 이런 작업이 끝난 후에 개진되기 때문에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부지런함은 본받을 만하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단지 배설의 욕구로서가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당연히 해야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로 여기는 그는 성실하다.

<문학권력>은 강준만과 권성우의 공저로 되어있다. 권성우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다. <심미적 비평의 파탄>이라는 제목 하에 -남진우의 반론에 답한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심미적 비평은 남진우의 비평을 말하는 것이니 파탄 역시 남진우의 몫이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 그들 사이에 오고간 글들을 찾아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과 비난과 비판이 혼재하고 있는 글을 보면서 비평가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주먹을 휘두르고 피 터지는 육탄전을 벌리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히려 이런 육탄전 이후에 훨씬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는 건 단지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란 말인가. 주먹에 의한 상처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서로간의 마음의 상처는 남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 마음의 상처 위에 벚꽃 같은 새살이 돋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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