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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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진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강유원이 책의 표지 안쪽에 밝혀둔 이 책을 쓴 목적이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순전히 강유원에게 매료된 탓에 이 책을 구입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선택하게 된 데에 조금 보탬이 된 것은 이 책이 ‘살림지식총서’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사 읽은 몇 권의 살림지식총서들이 내게는 내용면에서나 분량에서나 가격에서나 모두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매력은 단연 무게와 크기이다. 핸드백에 넣고 다니기에 이보다 더 알맞은 책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핸드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늘 책을 담고 다니는 내 핸드백은 제대로 된 모양을 가진 것이 거의 없다. 삐져나온 옆구리 살처럼 울룩불룩 배가 부른 핸드백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는 듯 늘어져있다. 이 나이에 책가방을 맬 수도 없으니 어쩌랴, 수시로 가방을 바꾸는 수밖에. 포기했었는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기 위한 살림지식총서의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살림출판사의 옹골찬 기획이 내 구차한 살림살이를 보살필 줄이야.

최근 나는 강유원에게 홀딱 빠져 있다. 그의 강의들을 다운받아 듣고, 게시판의 그의 글을 찾아 읽고, 언제쯤 강의를 들어볼 수 있으려나 눈과 귀를 모두 열어두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어쩌다  스스로에게서 이런 스토커적 징후를 느껴보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다. 이런 내 증세들을 그는 아는지 마치 내가 오염물질이라도 되는 양 차단한 벽을 만들어 두었다. 그 벽의 하나는 게시판의 트래픽 초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붉은 글씨의 벽이고, 둘은 내게는 만만치 않은 이 책이다. 나는 얼음판 위를 굴러가는 짱돌처럼 그의 책 겉에서 맴돌고 있다. 

 

 

세계의 인구가 60억이라고 할 때 책을 읽는 사람은 1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강유원의 말대로라면 1억의 환자들이 있고 나도 그 환자 중의 한명이다. 사자는 풀을 먹으면 치료가 되는 모양인데 왜 나는 책을 읽을수록 병이 더 깊어만 지는지 모르겠다. 읽을수록 넓어지는 무지의 세계, 그 무지를 해결할 길 없는 나의 무력과 무능을 매일 확인하는 일은 차라리 저주다.

『책과 세계』는 그동안 내가 접한 살림지식총서 중 가장 버거운 책이다. 책은 세계를 상정하고 있고, 세계는 인간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의 세계이므로 모든 책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룬다. 강유원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세계의 근본문제>에서 짚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강유원은 인류의 4대문명 발생지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이집트 문명 지역의 『사자의 서』를 짚는다. 황화문명과 인더스문명은 빠져있는 대신  히브리 민족의 서사시라 할 『구약성서』가 들어가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사자의 서』, 『구약성서』등을 통해 강유원은 그 책이 나온 당대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와 인간의 사이에 존재하는  '책'을 통해  시간을 역류하는 힘을 그는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고대, 로마와 중세, 근대의 차례로 고전이라 할 텍스트들을 선정하여 당대와 그 시대의 세계인식을 정밀하게 요약해두었다.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라는 제목으로 다룬 두 챕터는 시대구분용인 것 같다. 책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차례를 만들어보았다.

 

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2. 세계의 근본 문제 

   쓸쓸한 세계 『길가메시 서사시』--수메르(지금의 이라크지역) 
   텍스트의 힘 ; 모세 5경 - 히브리

   정지된 영원함 『사자의 서』 - 이집트

3. 인간과 사회

   영웅의 운명 『일리아스』
   철저한 자기인식 ;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 
   순수주의의 체계화 『국가론』

4.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 

   매체의 발견 ; 진흙판에서 파피루스까지

5.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단순한 실천 『갈리아 전기』 
   행복한 시대의 징후 『우정론』

6.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환상적 불멸성 『신국』 
   중세의 봄 『신학대전』 

   중세의 가을 ;유식한 무지론 
   세속의 재발견 『군주론』

7.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 

   인쇄술, 매체의 혁명

8.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차가운 현실법칙 『리바이어던』 
   텍스트에 의한 전통의 전복 『백과전서』 
   행복한 날들 『국부론』 
   쓰라린 세계 『종의 기원』

9. 에필로그

강유원은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을“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목적대로 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읽은 책이 하나도 없고 읽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는 참담한 자극 말이다. 나는 정신착란푼수녀를 가끔 자처하지만 이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책을 읽는 1억 명의 환자들을 나란히 줄 세우고 그 줄의 맨 꼴찌에 서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언젠가 내가 정말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저 책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기억하리라. 한때 내가 해바라기 하던 강유원의 ‘고전안내서’가 있었노라고.  

 

그의 또 다른 목적은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그런데 나는 왜 전혀 짐작이 안 되는 걸까? 그가 책의 제목 앞에 써놓은 비슷한 수식어만 눈에 띈다. ‘행복한 시대의 징후 『우정론』’, ‘행복한 날들 『국부론』’같은 것 말이다. 표를 만들어놓고 보니 ‘텍스트의 힘 모세 5경’과 ‘텍스트에 의한 전통의 전복 『백과전서』’도 눈에 들어온다.

결국 나는 책을 살 때 내가 전혀 저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책을 읽고 나서도 전혀 그의 목적에는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 나는 언제쯤 이 책을 버릴 수 있을까? 과연 버리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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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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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월을 가장 좋아한다. 모기에게 뜯기고 금속성의 매미 울음소리가 톱질해놓은 백야처럼 얇은 여름잠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하늘과 상큼한 바람이 있는 9월이 오면 차렵이불로 몸을 감고 비로소 잠다운 잠을 잘 수 있다. 고단한 육체와 어지러운 영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는, 잠 다운 잠 말이다. 이렇게 잠을 자고나면 나는 신선한 뽕잎을 먹고 넉 잠자는 누에처럼 고운 실을 뽑을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이 근지럽기까지 하다.

내가 깊은 잠에 빠졌던 2002년 9월, 아룬다티 로이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9월이여, 오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녀는 미국인에게 끔찍한 기념일이 있는 9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등이 민간항공기와 폭탄을 이용한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주범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9월은 미국인에게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왜 하필 9월 11일이었을까? 세계의 9월은 시간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22년 9월 11일 영국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발표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는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다. 1990년 9월 11일 조지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음을 선포했다.

아무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의 9월은 그러나 교묘하게 ‘보이지 않는 주먹을 가진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에 의해 주물러졌다. 이 모든 배후에는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번져가고 있는 미국의 세계화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전쟁의 핵심 주역은 바로 미국이었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소설가다. 그녀의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 미국에서 출판되면서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그녀에게 소설가라는 이름과 함께 활동가라는 이름 하나를 더 붙여주었다.  소설의 성공으로 1년여간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후 인도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비판하는 글, 댐건설 문제 등에 근본적인 비판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소설가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요구하는 모든 공적 정보나 공적 설명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것은 인도의 오래된 브라만적 본능 때문이다. 카스트제도로 알려진 이 신분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4계급으로 나누어지고, 이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달리트(불가촉천민) 계급이 하나 더 있다. 최상의 지배계급인 브라만은 제사를 지내거나 베다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베다힌두의 처세훈에는 달리트(불가촉천민)가 경전의 일부라도 엿들었다면 그의 귀에 납을 녹여 부어야한다고 쓰여 있다니 그들의 신분차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인도는 거대 댐 건설국이다. 인도사람들에게 대형 댐은 굶주림과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구이며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하나의 신앙이다. 그러나 댐 건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국제적 부패가 작동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이 미국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도는 세계의 축도이다. 카스트 시스템 안에서 인도정부를 향한, 또 인도 너머의 미국을 향한 용기 있는 발언들을 공유하기 위해 나는 9월의 달디 단 잠을 헌납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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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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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미나에서 들었던 한 시인의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외국의 자연과학 서적에는 다양하게 詩들이 인용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현재의 문단이 사회의 문제들을 빗겨나 있다는 말로 들었다. 곱씹어 보아야할 이 말은 일차적으로 세미나에 참석한 문인들을 겨냥하고 있지만 상대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빼어나지만 타학문과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의 부재가 원인이기도 할 터이다.

프롤로그에서 경제학자 우석훈은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짧지만 강렬한 스냅숏처럼 보여’준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또한 그런 책이 되기를 바란다는 우석훈은 기형도의 ‘짧고 날카롭고 문학적 감수성이 가득한 문장 대신에 나는 수다스러움으로, 관광버스 춤을 추는 여행 가이드의 어수선함으로 지겹게 만들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두었다.

우선 반가웠다. 경제학자의 책에 기형도의 산문집이 등장하고, 이상의 <오감도>가 인용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 미술 등 각 예술장르가 골고루 언급되고 있다. 그가 얘기하는 ‘수다스러움’을 한 꼭지 옮겨보면 이렇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상상력, 특히 예술적 상상력은 모두 도시 미학의 찬가 안에 갇혀버렸다. 물론 한국은 여전히 높은 도시빈민 비율을 나타내지만, 기이하게도 도시 빈민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문화가 거의 없다. 노동운동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 도망쳐 온 공지영은 분당 아파트에 갇혔다. 가장 먼저 생태시학을 주장했던 김지하는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더 이상 상상력을 발동하지 못한다. 1990년대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작가 김영하는 2007년 다시 고시원에 갇혔고, ‘압구정동’에 갇혀 있던 유하 감독은 2006년 여전히 ‘비열한 거리’에 갇혀 있다. 수많은 드라마 PD들은 여의도에서 청담동 사이의 88도로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예술혼을 갖추고 싶던 건축가들은 테헤란로에 갇혀 있다. 도시 빈민 미학의 진실성이 은폐되고 각색되는 동안 도시 미학이 만개한 2000년대의 미술계는 삼성그룹의 용인창고에 갇히고, 조각예술은 홍대와 대학로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강남역 사거리에서 봉인되었고, 음악은 증발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전국에 모세혈관처럼 흩어진 만홧가게를 통해 꿈틀거리던 만화는 인터넷 한구석에서 숨만 겨우 헐떡거리는 시대가 되었다.

우석훈이 우리사회의 당면문제 즉 청계천, 대운하, 아파트 문화 등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그의 수다스러움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했다. 동아일보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청계천에 물이 흐르고 물고기를 방류하면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청계천의 구조상 비가 올 때마다 많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은 모른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청계천을 ‘수도꼭지’ 또는 ‘어항’이라고 부른단다. ‘청계천은 생태복원도 아닐뿐더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도시 조경 사업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전문가들의 직무유기 같은 것을 떠올렸다.

포항, 울산, 새만금 사업등 연안지역개발에서 시작된 한국경제는 이제 대운하로 대표되는 내륙개발로 돌아섰다. 대운하 건설에 대한 찬반 양측의 입장과 국토 생태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채롭게 문제를 검토하는 시각을 갖게 해준다. 낙동강축의 식수문제, 전력생산과 홍수관리의 관점에서 해온 그동안의 물 관리정책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문제 등 전문가적 시각이 필요한 사안을 접해볼 수도 있다.

 

아파트 문화로 대표되는 도시건설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고층 건물의 숲을 통과하면서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정서, 아토피로 대표되는 각종질환 등. 건설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우석훈이 드러내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그의 말을 빌리면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우석훈이 누군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 이 많은 문제들은 누구의 책임인가?  특정 정치가도 건축가도 아니다. 그것의 책임은 바로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미적 감수성에 있다.  바로 우리의 미학이 문제다.

 

『88만원 세대』, 그가 해제를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이어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읽으면서 나는 갑자기 이 여름을 잘 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80 골골”이라며 나를 위로했던 의사의 말은 아무래도 수정되어야할 것 같다. 첩첩이 쌓여가는 문제들을 접하면서  눅눅한 습기가 온몸을 친친 감아오는 이 여름, 나는 마치 두엄더미 하나를 선물 받은 기분이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오지랖으로 싼 두엄더미. 나는 우석훈이 던져준 두엄더미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읽는다.

 

어차피 나도 우석훈처럼 가늘고 오래 살아야한다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에 대해, 그리고 그 대상에 보내는 열광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생태미학에는 예술가들의 몫이 할당되어있다. 이 시대에 예술 그것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경제학자의 글에 문학이 언급되고 시가 인용된다고 좋아라하던 마음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깔려 죽어버렸다. 그렇지만 그가 던져준 두엄더미는 꼬물거리는 무수한 생명체의 보고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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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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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일 개성에 다녀왔다. 나는 아무런 기대도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내 몸 상태는 날씨만큼이나 꾸물꾸물 했다. 현대아산의 직원들이 안내를 맡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개성관광객들의 연령층이 높은 탓인지 출입국관리소의 분위기는 시외버스터미널 같았다. 북측 안내원 두명의 안내를 받으며 개성공단을 지나 나무 없는 산들을 구비돌아 송악산에 다다랐다. 박연폭포, 관음사를 비와 땀으로 돌아내려와서야 내 몸은 정상모드로 돌아왔다.

오가며 접한 북한 주민이나 안내원, 군인들의 모습이 아직 내 맘속에 남아있다. 그들은 모두 까무잡잡한 피부에 여위고 왜소했지만 표정은 송악산에 흐르던 개울물만큼이나 맑았다. 특히 군인들은 나이가 무척 어려보였고 상대적으로 큰 모자탓에 장난감 병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북한은 초등학교과정이 4년이고 중학교과정이 6년이라고 했다. 그리곤 바로 군대에 가거나 전문대 혹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모양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갔다면 그들의 나이는 17,8세 일것이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북한에는 괴물의 형상을 한 빨갱이가 산다는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런 내가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은 어느 오지 마을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온 것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그들은 전해주었다. 비록 하루일정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측 안내원들과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돌아와 이 책을 찾아 읽게까지 되었다. 핵 폐기문제,탈북자 문제, 자주통일, 옥수수 5만톤지원에 대한 거부 등 많은 사안들이 있었지만 도대체 사람이 그것도 두어시간이면 다다를 곳에 사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해야만했기 때문이다.
 
장 지글러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접해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세계지도를 책의 앞부분에 펼쳐놓고 바라보면 기아의 문제로 언급되는 나라들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집중되어있다. 북반구의 부의 축적과 남반구의 아사자의 수는 반비례하고 있는 셈이다. 60억의 세계인구가 생산하는 식량은 120억 인구가 먹고도 남을 양만큼인데도 하루에 10만명이상이 굶어죽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이 어린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곡물사료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피드 롯'에서 미국의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톤에 달하는데 8억 5000만의 인간이 심각한 기아상태이거나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린다.(1999년 한해 통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대한 장 지글러의 대답은 다양하다. 자연도태설이라는 사이비 신화를 신봉하는 자들, 자연재해, 정치부패, 시장가격 조작, 전쟁, 신식민지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단지 그것하나만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따라서 한가지 처방책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배후에는 아귀들린 자본시장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칠레 대통령 아옌데와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와의 관계가 그렇고,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와 프랑스의 일부세력과의 경우도 그렇다.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시족도 마찬가지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100년만의 대홍수라는 1995년의 재해로 인한 논과 관개시설의 파괴, 연이은 가뭄 등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강제집단화정책으로 몰락해버린 농목축업, 지배층의 독식등 다양한 이유를 들고 있다. 나는 제3자의 이런 객관적 보고앞에서 몹시 마음이 불편하다. 북한에 지원하던 원조를 갑자기 끊어버린 소련의 행각 등 아마도 이 책에 서술되지 않은 또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른 비닐장화를 신고 개성시내를 걸어가던 아이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떠오른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유난히 덜 젖은 북측안내원에게 비결이 뭐냐고 묻던 내게 자기는 몸이 가늘어서 빗줄기사이로 마구 지나다닌다던 농담이 새삼스레 아프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거나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은 그르지 않다. 책을 읽은 것이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데 나는 민들레 홀씨만큼의 역할도 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나는 또 밥상머리에 앉아 모래알을 씹을 것이고 밥과 국을 남기는 가족들한테 신경질만 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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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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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미루어두었던 김훈의 『칼의 노래』를 해치우듯 읽었다. 이상하게 나는 김훈의 글은 비껴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작의 제목을 보게 되었다.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김훈에 대한 수식어를 똑같이 사용하는 그의 글이 궁금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김훈의 묘사는 끔찍하고도 아름다웠다. 그의 글은 너무 아름다워서 끔찍했고 혹은 너무 끔찍해서 아름다웠다. 그런 그의 글은 대상을 낱낱이 분해하고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느낌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칼의 노래』도 이런 느낌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단문으로 일관하는 그의 글은 잘 벼린 단도 같다. 그가 이순신을 위해 포획한 모든 언어들은 이순신의 칼처럼 날이 섰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칼에 베일 것만 같아 긴장했어야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순신을 1인칭 화자로 내세운 이 소설은 소설 같지 않고 소설의 형식을 빌린 전기 같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대립항들이 이것이 김훈의 소설임을 증명해준다.  삶과 죽음, 공격과 수비, 이동과 정지, 집중과 분산, 개인과 전체 등은 김훈의 글쓰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극과 극의 극명한 대립이 난중일기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감각적인 특히 후각에 대한 끔직한 묘사 역시 김훈의 글쓰기 특징이다.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에게서 풍겨오는 냄새에 대한 그의 끔찍한 묘사를 접한 바 있다. 『칼의 노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모든 냄새를 비린내로 환원시킨다. 어린 아들 ‘면’에게서 나는 젖 냄새, 안개의 냄새, 바다의 냄새, 피 냄새, 심지어 보리 삶는 냄새에서 마저도 그는 비린내를 맡는다. 난 중에 두어 번 품게 되는 여자에게서조차 ‘오랫동안 뒷물하지 않은 더러운 여자의 날비린내’를 맡고,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냄새’를 맡는다. 이런 냄새에 대한 천착들은 이것이 이순신의 전기가 아니라 김훈의 소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임진왜란은 1592년 시작되어 1598년까지 7년을 끌었으나 이 책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임진년이 아닌 끝나기 직전의 정유년과 무술년을 다루고 있다.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수군은 강화도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육군 역시 적군의 뒤만 따를 뿐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자한테 바칠 죽은 시체의 머리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회군을 결정한 왜는 명나라 지원군들과 책략을 꾸민다. 전쟁은 끝나고 적은 돌아가지만 이순신에게 적의 철수는 삶의 무의미로 남는다. 이순신이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의 무의미함이다.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적의 적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길 뿐이다. 이순신의 남도에서의 삶은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려는 여정이었고 김훈의 언어와 더불어 끔찍하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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