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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불교 ㅣ 살림지식총서 256
오세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평점 :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나 소설은 인식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시가 그 대상을 객관에서 찾느냐 혹은 주관에서 찾느냐에 따라 대상시와 비대상시가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대상없는 시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 혹은 미래파의 시 역시 대상 없이 쓴 시가 아니라 객관 대신 주관을 대상으로 하여 쓴 시의 한 유형이다.
객관을 대상으로 하든 주관을 대상으로 하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시론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론서들이 펼쳐놓은 몇 백 쪽에 이르는 책을 몇 권씩 읽어도 오리무중을 넘어 십리무중이 되어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인가. 작지만 매운 이 책은 무지의 더께를 한 겹 벗겨주었다. 최근 몇 권의 이 살림지식총서들이 여간 마음에 드는게 아니다.
오세영은 휠라이트의 시론과 하이데거의 시론이 불교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음을 명료하게 정리해놓았다. 휠라이트에 의하면 대상이 지닌 실재를 기술하는데 있어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실재와 어긋나 있다. 오직 시의 언어만의 대상이 지닌 실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물을 물질이나 도구로 보지 말고 하나의 실존으로 대해야한다. 즉 대상은 주체가 진실한 마음으로 타자를 향해 귀와 마음을 열고, 타아의 실존 속에서 그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되어 줄 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닿아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현존재를 구분하고 존재는 현존재를 통해 숨겨진 자신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 존재는 언어를 통해 개시되며 이 존재를 이해하는데 언어 이외의 통로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처음으로 현존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시인들이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의미의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그들만의 눈으로 존재를 바라보고 우리에게 '현존'하도록 하는 것일 터이다. 우리가 늘 시에 있어서의 참신성,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학습으로 인해 덧씌워진 내 눈의 껍질을 대체 몇 번이나 벗어야 시의 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불교는 내면의 성찰을 그 핵심으로 한다. 내면을 성찰해 무아의 경지인 해탈(깨달음)에 이르고자 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점수의 수행법이나, 선의 돈오법 등은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수행을 통한 청정심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순간적인 직관의 돌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불교에서의 이 깨달음의 상태는 게송 혹은 오도송을 발생시킨다. 하이데거가 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이든 하이데거의 시론이든 불교의 게송이든 시는 내가(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온다. 더 쉽게 풀어쓰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인은 다만 받아 적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사물은 온몸으로 말한다. 따라서 시인은 사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기 위해 경건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끊임없는 독서와 성찰과 체험을 가지고.
하이데거는 여전히 버겁다.
존재와 현존재의 의미가 헷갈려 머리 쥐어 뜯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이후에 들뢰즈, 알랭 바디우 등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건, 우연, 주름 등 수습할 길 없이 헝클어져 있었던 기억은 악몽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명사와 동사의 차이로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준 이정우 선생의 기억이 생생할 뿐이다.
현대시와 불교의 상관성을 짚은 작가는 '선시란 무엇인가'묻고 그 의미와 종류를 분류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백담사 무금선원 無今禪院 에 기거하는 오현스님의 시에 대한 해설이다. 당시에 서울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을 만큼 오독(?)되었던 <님의 침묵>은 여기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듯하다. 한용운이 자신의 깨달음을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랑을 소재로 한 자유시의 형식을 선택한데 반해 조오현은 시조의 형식을 사용한다. 그동안 한시의 번역본만을 읽다가 한글로 된 시조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