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좋아하는 작가와 믿을만한 번역가의 글을 읽는 것은 누구와도 나누고싶지 않은 비밀의 맛이다. 명절을 앞두고 집안청소와 장보기, 음식준비 등으로 마음이 조급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선뜻 덮어둘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로 나를 매료시켰다.이후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인기몰이를 하며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 다녀간 기억도 있다.『개미』이후엔 그의 작품을 찾아읽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언제나 내게 과도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곤한다.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개미』의 행간에 오랜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는 중독성 강한 페로몬을 뿌려놓았던게 틀림없다. 

 『여행의 책』이라고 해서 흔한 세계여행 안내책 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면서도 베르베르가 여행책을? 하며 미심쩍어 했었고 그래도 베르나르라면 뭔가 다르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언제 서점에 가면 정말 그런 여행서인가 한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잊어버려도 그만이려니 싶어 적어두지도 않았던 책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그에서 보게된 이 책이 지리적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한때 마음주었던 남성작가여서 선뜻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났다고 했다. 1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두번 만날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더란다. 나는 예전에 사랑했었던... 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지내던 남자조차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도 못해본 찌질이도 운도 없는 년이다. 근데 이게 불운 맞나?

한때 마음주었던 남자를 길가다가 마주쳤다고 치자. 그 남자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면 내 가슴도 뛸까? 아니면 이미 자산이 되어버린 이 특유의 뻔뻔함으로 어제 만난 친구인듯 담담하게 대할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닥쳐봐야 알것같다.

 10여년 전의 베르베르는 서구적이고 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느낌을 전해주었었다. 바쁜척 하고 다니긴 하지만 10년전에 찜해둔 남자라도 절대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법. 간간이 눈동냥 귀동냥으로 그가『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뇌』, 『나무』 등을 출간했다는 소식 정도는 접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과학적 상상력을 생각해보게 되는 제목들이었다.

그러나 십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동양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석적인 것을 다 아우르고 난 후의 총체적 느낌이랄까.훨씬 더 편안해지고 여유로와진 느낌이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참 많은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과 연애질(?)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여행의 책』은 독특한 느낌을 전해준다. 책이 내게 1:1로 말을 걸어오고 나를 신천옹으로 변신하게 한다. 책은 나를 데리고 시간적, 공간적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과거일수도 있고 또 미래일수도 있다. 그곳은 바로 여기일 수도 있고 먼 과거속의 어느 바닷가일수도 있다. 몸의 여행이 아니라 정신의 여행인 것이다. 그는 공기, 흙, 물, 불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공기의 세계에서는 육체에서 정신을 해방시킨다. 정신의 해방은 마약이나, 종교,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흙의 세계는 안식처다. 나 나름대로 나만의 집을 짓고 꾸민다. 안식의 집에는 나의 상징이 있고 무기가 있고 축제가 있다. 불의 세계는 싸움터다. 이곳에서 나는 내 개인적인 적과도 싸워야 하고 체제나 조직과도 싸워야하며 질병과도 불운과도 싸워야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고 체제는 공격하지 않고도 낙후시킬수 있는 창의적 능력도 있다.또 내몸은 이미 진통제나 소독약, 소염제 등을 스스로 만들어낼 줄 알기 때문에 질병 또한 더이상 적이 아니다. 불운과 맞서서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불운이 안개처럼 덮쳐오거든 가만히 엎드려서 걷히기를 기다리며 나를 되돌아보면 된다. 불운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물의 세계는 만남의 세계이다. 물의 세계에서는 나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조부모를 만난고 조부모의 조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의 조상들을 만나고 더 거슬러 올라가 나의 행성과 은하와 태초의 빅뱅을 만날 수 있다. 

 일찌기 철학자들은 공기, 흙, 불,물을 우주의 4원소로 보았다. 베르베르는 우주의 구성원소인 4원소의 세계로 각각 우리를 안내하면서 동시에 우주로의 여행을 안내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책'은 또한 '책의 여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태초의 빅뱅을 만나던 우주여행을 떠나던 여하간 10년만에 다시 만난 베르나르 베르베르. 가슴이 뛰지는 않았지만 약간 변질된 듯한 그의 페로몬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며 또 다시 10년 후가 되더라도 나는 기쁜마음으로 아무 망설임없이 그를 다시 만날 것같다.  

 

p.s 오늘 아침 그가  영화개봉 관계로 또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개미>도 우리나라 감독과 영화로 준비중이라네.. 돈 많은 남자야 부담없지만 돈 밝히는 남자는 매력없는데...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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