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문 안에서 - 나쓰메 소세키 최후의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의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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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세키가 죽기 전해인 191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역시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연재 1회 분량씩의 짤막한 글이 총 39편 실려 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을 적은 듯 문장은 담백하고 편안하지만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가 묻어난다. 소세키는 1910년 인사불성의 위독 상태인 이른바 ‘슈젠지 대환’을 경험했고, 1914년 위궤양이 재발하여 한 달 동안 투병했다. 1915년 신년 연하장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썼다고 하는데, 소세키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와 고양이, 어릴 적 살았던 마을, 할머니로 알고 있었던 생모에 대한 기억이 안타깝다. 또 고립되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 그동안 맺어온 인연들을 돌이켜 보는 소세키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했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믿지도 않는 신을 상정한 그의 기도는 간절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하신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나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밝고 맑은 직감을 주시어 나를 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시켜 주기를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민한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와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만나는 행복을 내려 주기를 기도한다.”

어쩐 일인지 나는 소세키의 이 기도가 상처받은 자의 자기 연민이 아니라 그렇게도 인간을 연구했지만 여전히 더 알고 싶은 것이 남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 한 인물들을 창조해 낼 때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고뇌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 콧잔등이 맵다.

“나는 지금까지 남의 일과 자신의 일을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썼었다. 남의 일을 쓸 때는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썼다.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비교적 자유스러운 공기 속에서 호흡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자신이 가진 모든 속기(俗氣)를 남김없이 벗어던질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만큼의 자만심은 없었다 치더라도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그예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 루소의 참회, 오피움이터의 참회, 그런 것들은 아무리 더듬어 가 보아도 참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서술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하물며 내가 여기 쓴 것은 참회가 아니다. 내 죄는 - 만일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다면- 지나치게 밝은 쪽에서만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소세키는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자신의 속된 기운을 작품으로 깨끗이 씻어버리려 한 모양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비록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쓰지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참된 사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필은 소설과 달라서 읽는 그대로 가슴에 와 얹힌다. 소세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을 읽으니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줄지어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많은 주인공들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 이치로, 선생님, 겐조, 그리고 이름 없는 ‘나’가 내 마음속에 돌올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랑스런 인물들을 창조해냈지만 여전히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인간을 다 그리지 못한 것만 같은 나쓰메 소세키. 누구나 안아줄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안길 수 없었던 소세키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이런 나는 여전히 헤픈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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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헤픈여자는 그런게 아닐꺼예요.. 반딧불이님. ^^
그런게 헤픈여자면 좀 헤프면 또 어떨까요?


진실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사람, 마음을 다해 세상을 살아보려 하는 이의 외로움과 고통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싶은 반딧불이님의 저 깊숙한 마음이 글 곳곳에 드러나 저 또한 울컥합니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되어요. 봄 바람이 좋은 아침이예요..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7-10 19:29   좋아요 0 | URL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소세키를 보면서 참 외로웠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어요. 덧없는 순간이지만 누군가 그에게 이 세상이 참 따뜻한 곳이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해요.

참으로 오랫만에 바람도 맑고 햇살도 따스한 날입니다. 현대인들님 가슴에 이 햇살, 이 바람 담뿍 담기시길...

blanca 2010-05-0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을 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그 모습이 더 숭고하고 고결해 보입니다. 작가는 그러한 것이군요.

반딧불이 2010-05-03 00:01   좋아요 0 | URL
작품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소세키의 껍질을 한겹 벗긴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작품속에서 늘 거짓된 것, 꾸민 것을 싫어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냈는데 그게 바로 소세키 자신의 모습이었나봐요.

그리고 작가이기 이전에 외로운 인간이었다는 느낌이 마음을 짠하게 하더라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5-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 나쓰메의 글들을 읽을 때 도움이 될 여러 얘기들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딧불이'님의 감상도 마음에 다가오구요.
저도 찬찬히 그의 소설을 읽어봤으면 좋았을텐데요. 헐레벌떡 읽어왔다는 생각을 더러 합니다.

반딧불이 2010-05-03 18:1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읽을수록 애정이 가서 이러다 소세키 빠~가 되는건 아닌가..염려도 되었었는데 닥나무님의 즐거운 딴지(?) 덕분에 저도 좀 더 공부할 기회가 되었어요. 저도 감사드립니다.

2010-05-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리 2010-05-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야 반디님 서재를 찾아와서,추천도장 꾹 찍고 갑니다.
쌤의 따뜻한 열정 덕에 소세키를 읽어가는 시간들이 더 즐거워요. 늘 감사드리는 거, 아시죠?(전..퍼렁이여요ㅎㅎ)

반딧불이 2010-05-07 00:56   좋아요 0 | URL
유리님께서 소세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셨는걸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행복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저 역시 감사드려요. 퍼렁쌤~

프레이야 2010-05-10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딧불이님의 소세키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한 느낌이에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10-05-10 10:4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즈음은 영화 리뷰전문가 같으셔요. 가끔은 저를 위해 문학관리뷰와 책 리뷰도 올려주셔요.
100년후를 기대하고 작품을 썼던 소세키가 기운빠져 있으니까 마음이 짠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