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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이레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道草(みちくさ)』이고 『한눈팔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번역자의 말에 의하면 道草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라고 한다. 책 내용으로 보자면 후자가 더 어울리는 제목 같다. 어떤 의미로 제목을 붙였든 이 소설은 소세키가 완성한 최후의 소설이며 유일한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자전적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적 두 번 씩 버려졌던 일이나 친가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양가와 친가가 소세키를 사이에 두고 돈을 주고받은 사실들은 이미 고모리 요이치가 쓴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에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소세키가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을 당시를 배경으로 주변 인물들과 아내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세계적인 공황도 문제였겠지만 소세키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소세키가 다달이 얼마간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아내는 고집이 세고 히스테리를 심하게 앓는다. 소세키에게는 딸 다섯 아들 둘이 있었지만 이 책은 셋째 딸의 출산시기가 배경이니 아직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다. 아들을 기다렸는지 셋째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그렇게 같은 것만 낳아서 어떻게 할 셈이냐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아내를 힐난’한다.
아이들도 산적한 일에 방해만 되는 존재일 뿐 각별한 정이 없었던 듯싶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이 남았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세키는 제법 잘 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소세키를 마중 나온 딸은 ‘좀 더 멋진 사람일줄 알았다’며 옆 사람에게 소곤거렸다고 한다. 딸이 아버지에게 실망한 것처럼 아버지도 예뻤던 딸의 모습이 변해 있어서 실망한다. 둘째 딸에 대해서는 ‘턱이 짧고 눈이 큰 그 애는 푸른 바다 거북이가 둔갑이라도 한 듯한 모양’이라고 표현하며 ‘셋째 딸만 예쁘게 자라주리라는 기대는 아무리 욕심 많은 부모의 눈이라 할지라도 바라기 어려웠다’고 썼다.
천식을 앓는 누이, 병약한 형, 커다랗게 열린 동공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아내, 호시탐탐 돈을 뜯어 가려는 양부모, 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역시 도움을 원하는 장인. 소세키 주변인물들은 모두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세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세키는 제 지갑에 여유돈이라고는 없으면서도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의 피를 빨 수 없어 제 피를 빠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열거하다보니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을 하며 별 걱정 없이 생활이 가능했던 <그 후>의 다이스케 같은 인물은 소세키의 희망사항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소세키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늘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가졌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동안 읽어왔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소세키 소설들이 모두 사건다운 사건하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솔직히 소설적 재미는 없다. 대신 소세키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다. 책을 다 읽고 나 후 옮긴이의 글에서‘완성된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을 봤다. 어느새 소세키의 소설을 다 읽었단 말인가,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는 학생들에게 소세키의 작품을 추천할 때 우선 <산시로>를 권하고 “나이 들면 <길 위의 생>을 읽으십시오.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지금 읽으십시오.”라고 꼭 주를 단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읽어온 것이 소세키의 작품이었다면 <길 위의 생>은 소세키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던 듯싶은데 이 책은 그런 작가에 대한 환상을 깨고 생활인 소세키를 정면으로 맞대면하게 해주었다. 환상은 깨졌지만 애착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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