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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이건 역시 삼천포행 독후 감상이 될 것이나 그렇거나 말거나 몇마디 적어본다. 스토너의 삶은 사랑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그 무엇이든 고저 묵묵히 버티며 말없이 감내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버티며 감내하는 삶은 세상과 주변인에 대한 무심함으로 단단히 포장되어 있다. 이디스는 스토너 자신이 선택한 여성이었고 당연히 첫눈에 반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디스의 마음의 문을 열기위해 스토너가 기울인 노력은 거의 전무했다. 스토너는 그저 참고 견뎠다. (적어도 한번쯤은 얼굴을 붉히고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라도 했어야 했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불간섭주의이자 불개입주의다. 말인즉슨 인간은 본인의 문제에만 개입할 수 있으니, 조강지처나 자식새끼라고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어야하고 그 답이 오답이든 정답(정답이 어디 있겠는가만은)이든 결과는 본인이 짊어져야할 보따리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더 쓸쓸한 것 같지만 인간 종은 원래가 고독하고 쓸쓸하게 생겨먹은 것이다. 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이 소설의 스토리가 뭐 특이한 것이 없고 평이하다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소생은 천만의 말씀 만만의 꽁떡으로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스토너가 대학원생 워커 문제로 로맥스와 불꽃을 튀기며 싸울 때는 책을 잡은 소생의 손이 다 떨렸다. 마직막에 스토너가 암으로 고통받을 때는 정말 죽는다는 게 너무나도 두렵고 무섭게 생각되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정말 천년만년 살고만 싶다. 아아아아아 어찌할 수 없는 축생이다. 스토너를 읽는 내내 소생의 아둔한 머리 속에는 줄곧 백색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떠다녔다. 오랜만에 여기 옮기면서 나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