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입시 논의에서 시험 제도의 공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본질을 회피하는 태도이다. 사회를 변혁할 혁신가를 찾고 싶다면, 시험 제도 논의에 모든 것을 얽매지 말고, 어릴 때부터 싹이 꺾여버린채 꽃 피울 엄두도 못내고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꽃 피우도록 돕는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

시험 제도에 대한 논의는 홈에 들어오는 결과의 공정함만을 논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공정한 입시 논의는 교육의 메스로만 처치할 수 없다. 교육 현장의 키워드가 협력과 융합이라면, 이제 입시 논의 또한 교육의 관점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 살 무렵에 이미 저소득층 아동이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3,000만 개나 더 적은 수의 단어를 들으면서 성장한다. 이런 불이익을 겪으면서 자란 저소득층 아이들은 이런 경험이 장차 그들의 학업성취도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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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강제하는 방법에는 너도나도 공감하고 수긍하겠지만, 그 원인이자 대전제인 마땅히 해야할 일에 대한 일반의지에의 합의에는 모두가 눈을 감은 채 각자도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법을 준수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 forced to be free’한다... (중략)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정말 이익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은 스스로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일반의지를 따르고 순응하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을 거라는 취지이다. (중략)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됨으로써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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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난 학급 규칙 정하는게 항상 내키지 않았다. 모둠별로 이끔이 기록이 뭐 이런거 정해서 하는 것, 손뼉 세 번 치기 짝짝짝 같은 것, 무언가 활동에 순서나 절차가 있는 것 등등등.

모둠별 활동을 하게 되면 역할도 알아서 논의하는 것이 좋고, 무언가 우왕좌왕해서 무질서한 것처럼 보여도 그게 더 마음에 들었더랬다. 그래서 지금도 뭐 학급 약속 규칙 이런게 잘 없다.

효율성. 초등학교에서까지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싶지는 않다. 배움은 효율을 추구할지라도, 삶과 생활은 개성이 살아있는 교실을 만들고 싶다.

테일러는 평균주의의 중심 지침, 즉 개개인성의 등한시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업계의 비효율성을 체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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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행동은 기질에 따른 일관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상황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학교에서 이러저러하니 집에서 훈육해주세요, 같은 교사의 조언은, 그런 의미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아이는 당연히, 학교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다르다. 상황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가정이라는 상황에서의 아이의 모습을, 학교에서는 담임과 학급 구성원이라는 상황 속에서의 아이의 모습을 파악하고 자료를 공유하기 위해 협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는 아울러, 학년별로 아이가 처하는 담임 변수, 아동 변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아이에 대하여 인수인계(?)하는 것도 사실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작년의 그 아이는 그 상황 맥락에서 그러하였음을 고려하여 올해는 다른 상황 맥락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을 향한 품이 많이 든다. 괜찮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좋은 면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학교 선생님들이 (이분들의 대응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으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내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랬다면 나에게 공격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대신, 또 ‘문제아’의 낙인을 찍는 대신 도움이 돼줬을 텐데, 왜 내가 그런 맥락에서 말썽을 피우는지를 헤아리려 애썼다면 내 성격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간주해버리지 않고 담임교사에게 귀띔을 하거나 나를 다른 반으로 옮기는 식으로 중간에서 조정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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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발전’의 많은 부분은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주요한 사례는 독립적인 개인이 점차 임금노동자로 전환된 현상일 것이다. (중략) 요즘은 예전에 무료로 제공되던 용역을 사업화하는 것이 새로운 이윤의 원천... 아이들이나 노인을 돌보는 일이 이제 가정이 아니라 탁아소나 요양원의 몫... 하루에 두 번 개를 산책시키는 귀찮은 일도 다른 사람에게 하청... 물론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이 내가 방금 언급한 과정과 상당히 달라 보이는 지점 중의 하나는 아이들을 가족의 자산으로 간주하는 인식만큼은 한국이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찌감치 앞서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최상의 경쟁자가 되도록 교육받고 자기착취로 볼 수 있는 과정들을 연마하도록 강요받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성공적인 임금노동지가 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표인 것처럼 양육된다. 그래서 학교나 학원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으로 아이다움을 박탈당하고, 보통은 여가와 꿈꿀 수 있는 여유를 통해 발달하는 주요한 감각들 또한 상실한다. (중략) 그렇다면 사회적 관계들은 상품화될 뿐만 아니라 억압되고 부정되고 있는 셈이다.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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