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급함에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주스병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또는 출근길에 무거운 발을 끌며 편의점에 들어가 울렁거림을 가라앉혀줄 초코우유나 이온음료를 샀으렷다. 그리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생각하겠지. ‘내가 미쳤지…. 이번엔 진짜로 끊을 거야.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사람이 아니고 개다!’ (해장을 잘만 했다면 당일 오후 5시, 잘 안 되었어도 다음 날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다짐.) - P9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퍼뜩 깨달았다. 음료는 최전방에 선 용사. 지독한 숙취에 맞서는 첫 번째 저항군! 그가 숙취와의 첫 싸움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정시 출근 여부와 해장 음식 메뉴 그리고 자숙의 기간이 달라진다. 그러니 이 첫 번째 용사의 전투력은 술꾼들에게 초유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것이다. 숙취를 빨리 없애줄 방도만 있다면 하찮고비루한 몸뚱이 따위, 임상실험 대상으로 몇 번이나 내놓아도 좋을 만큼 간절한 문제. - P10
술을 마시면 우리 몸의 수분이 손실된다. 그렇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직관적으로는 이해를 못하고 있다. ‘내 몸 안에 액체를 몇 리터나 들이부었는데 수분이 부족하다는 거지? 화장실도 몇 번 안 갔는데?‘ 이거 너무 무식한 발언인가요…. 아무튼 전문가들에 따르면 수분을 잃고 나서 보충하는 것보다는 술을 마실 때 똑같은 양의 물을 마셔주는 게 좋다고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셨으면 곧바로 물 한 잔을 마시는 식이다. 그런데 이게 소주는가능할지 몰라도 맥주는 될 리가 없다. 맥주로 이미 배가 부른데 어찌 물을….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술마시고 안주를 먹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만으로도 무척 바쁘다. - P11
나도 술꾼들이 등장하는 만화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해장? 다 필요 없고 딱 세 가지뿐이야. 잠! 물! 똥!" 그 어떤 음료보다도 몸에 가장 좋은 건 물이라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따로 해장 음료를 찾는다. 왜? 그게 물보다 잘 먹히니까. 생수 500ml 마시긴 힘들어도 음료수 500ml는 꿀떡꿀떡 넘길 수 있으니까! - P13
한국과 러시아 못지않게 한 술 하는 영국인들도 토마토 주스로 해장을 한다. 주스에 보드카를 넣는 게 살짝 특이점이기는 하지만···. 영국이 사랑하고 자랑하는 칵테일 ‘블러디 메리 (Bloody Mary)‘는 일종의 해장술인 셈이다. - P15
준 변하지 않는 진실은 딱 하나다. 많이 마셔야 한다는 것. 물이든 음료수든 동치미 국물이든 뭐든 무조건 많이 마셔서 알코올을 소변과 함께 몸 밖으로 내보낼 것. 나중에 속이 쓰리더라도 당장 오렌지 주스 밖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거라도 마시자. 알고 보면 소금물에 불과하지만 플라세보 효과라도 있다면 이온음료, 벌컥벌컥 마셔주자. 액체로 된 건 뭐든 다좋다. 딱 하나, 술만 빼고! - P19
같은 평냉 애호가라해도 선호하는 맛에 따라 우래옥파, 을지면옥파, 을밀대파, 평래옥파 등으로 갈린다. 모여 앉았다 하면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최근에 어디 가봤어?" "강남 쪽 신흥 강자는 어디야?" "아무개 집 육수 맛이 변했다는데 정말이야?" 등등…. - P33
각설하고, 평양냉면은 해장으로 완벽하고, 안주로도 빼어난 음식이다. 해장하러 가면 다음번 안주로 다짐하고, 안주로 먹고 있으면 다음 해장을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안주와 해장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순환선 같은 존재. 가만! 평양냉면을 일단 좋아하게 되면 최고의 안주, 최고의 해장 음식 두 개가 동시에 생기는 거잖아? 일거양득! 일타쌍피! 이래서내가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을 끈질기게 영업하고 있던 거였다. 한낱 부잡스럽고 시끄러운 평빠에게 실은 이렇게나 깊은, 하해와 같은 속뜻이 있었거늘….나 반성 안 합니다! 못해요! 평양냉면이 최고야!(쩌렁쩌렁) - P36
"부드럽고 수수한 것. 고담하고 소박한 것." 백석의 시에서 국수는 이렇게 묘사된다. - P39
허영만 작가는 만화 『식객』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 크! 명문입니다. - P47
묵직하고 푸석푸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볍고 탱글탱글했다. 숟가락이 지나간 단면은 색이 더 밝고 먹음직스러웠다. 이번에는 밤 크기로 잘라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보았다. 국물이 스며 있었는지 씹을 때마다 촉촉함이 배어 나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다! 맛있어! 나는 다시 한번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숙취의 신에게 제압당해 팔다리를 마리오네트처럼 삐걱삐걱 움직이느라 앞에 앉은 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위양 한 점을 집어 재빠르게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꿀꺽. 하마터면 젓가락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를 칠 뻔했다. - P60
별안간 시큰둥하게 굴려는 게 아니라, 타인, 타문화권의 해장 방식을 두고 효과가 있네 없네, 이건 이상하네 어쩌네,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인류가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수천 년이나 흘렀는데도 현재까지 지구상의 모든 연구논문과 문헌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숙취 해소법은 ‘알코올 섭취를 줄이거나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숙취를 바로 없애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뜻이다. - P87
한 설문조사 결과 한국인이 가장 즐겨 찾는 해장 음식 1위는 콩나물국이었다. 아스파라긴산의 검증된 효능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결과다. 2위는 짬뽕이고 3위는 라면, 그다음으로 뼈해장국, 순댓국 순이었다. 이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역시 한국인의 해장은 국물이라는 사실. 특히 빨간국물. 단일 메뉴로는 콩나물국이 1위지만 전반적으로 많은 술꾼들이 매콤하고 칼칼한 국물을 선호한다. 오전에 가장 많이 팔린다는 분식집 해장라면은 라면에 콩나물을 한 줌 올림으로써 자극적인 걸 먹고 싶은 입의 요구와 숙취 해소 효과를 갈구하는 몸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해주는 해장 음식계의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다. - P91
숙취에도 장점이란 게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다. 반성하고, 쉬게 하는 것. 술을 마실 때야 언제나 즐거움 뿐이다. 이 세상에는 맛있는 술,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고 하찮은 일로도 까르르 웃고 떠드는 친구들과의 시간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천국이 따로없다. 다만 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즐거움과 정비례한 크기로 찾아오는 숙취가 괴로울 뿐이다. - P110
그럴 리가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머리가깨질 것 같고 속이 뒤틀릴 때 술을 몇 잔 마셔주면통증이 일순 사라지기는 한다.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숙취가 사라진 게 아니라 감각이 마비된 것뿐이다. 숙취를 유발하는 원인은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이론은 ‘염증반응가설‘이다. 알코올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일종의 병균으로 파악해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작동되고 염증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P112
해장술을 마시는 이유는 숙취의 고통을 참지 못해서다. 고통을 대면하지 못하고 피하기. 덮어버리기. 미뤄버리기. 아침에 견디지 못한 고통이 오후에몸집을 불려서 다시 찾아오는데 그때라고 버틸 수있을까? 한 잔 더 마셔서 또다시 유예시키면 될까?만약 그렇게 해장술이 낮술과 밤술로 이어지면‘장취’ 상태가 된다. ‘장취’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장기간 취해 있는 상태‘를 일컫는데, 나는 이 무시무시한 단어를 알코올중독자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루 만에 술을 멈추면 다행이지만, 진짜 장취 상태에 돌입하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달씩이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술만 마신다. - P113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숙취를 없애주는 음식은 없다. 전 세계 의학계와 기업들이 궁극의 숙취 해소법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뾰족한 답이 없는 게 현실이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는 게 그나마 가장 효과가 빠르지만 지금은 음식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 영국의 작가 킹슬리 에이미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확실하고 즉각적인 숙취 해소법을 찾는 일은 신의 존재를 찾는 것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 P141
남편과 나는 죽이 잘 맞는 음주메이트이자 해장메이트인데 (그래서 결혼까지 한 건데) 음주를 매일 하고 해장도 매일 하다 보니 결국 위장의 모든 사정을 공유하는 위장메이트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 P170
이 책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 본 서점일 듯^^엄마 칠순 여행 때 엄마 사진 한컷!
안녕달 작가님 인터뷰 너무 귀여우시고,백희나 작가님 한복 자태가 넘나 아름답네요.
제시카 러브의 인터뷰. 다시 읽어도 좋다~
겉으로만 보면 우린 생계부양자와 돌봄노동자로 엮인, 참으로 모범적인 관계였다. 우리가 이룬 유기체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훌륭한 부품이었고, 빈틈없이 완벽해서 어떤 오류도 나지 않을 듯 보였다. 시곗바늘처럼 찰칵찰칵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나 하나 불만 없이 수긍하면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평온했고, 모든 걸 헝클어버리고 싶은 짓궂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창틀을 벅벅 닦으며 떨쳐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말한 ‘우리 돈‘과 ‘내 돈‘이 그동안 눌러두었던 분노를 점화했다. 우리의 허술한 연대는 이렇게 박살났다. - P152
"그럼 네가 돈 벌어와!"남편은 싸울 때마다 말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네가 어떻게 살 건데?‘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남편이 밤늦도록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애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육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고, 그건 내가 집에서 그의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정신승리를 해왔지만 ‘돈 버는 유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벌어오는 돈에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건 사실이었고 언제나 돈 버는 일은 다른 일보다 중요했으니까. - P155
집안일과 육아도 그랬다. 돈 버는 사람은 퇴근 후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으므로 무조건 쉬어야 한단다. 돈을 얼마를 벌건 집안일과 육아는 공동의 일이다. 돈을 번다는 이유로 집에 있는 사람을 부릴 권력을 가질 순 없다. 그럼에도이 사회는 돈 버는 사람에게 집안일과 육아를 방치해도 되는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런데 과연 돈 때문일까. 그런 이유라면 돈 버는 여자들도 휴식을 누려야 할 텐데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 P156
신기하게도 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인분의 돈을 벌면서 남편과 감정적으로 부대끼는 일이 줄었다. 누가 아이를 보느냐, 왜 배수구를 닦지 않느냐, 분리수거할 때 플라스틱 병뚜껑을 왜 종이상자에 넣느냐며 아옹다옹하긴 해도 남편에 의해 나의 기쁨이 좌우되지 않았다. 확실한 벌이를 가짐으로써 화가 줄어든 것이다. 나의 자존감이 고작 이정도였나 쓴웃음이 배어나오면서도 가족 안의 역할에 매이지 않는 다른 정체성의 위력을 실감했다. - P162
드디어 발표날, 발표 직전까지 나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앞선 발표자의 발표가 끝나고 마이크를 전달받았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웠다. 일부러 가슴을 더 내밀어 굽어진몸을 펴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니 무슨 일인가 싶어 도우미에게 안겨 나를 보고 있었다. 제발 울지 않기를, 5분만 기다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발표를 마쳤다.내 인생은 애를 낳았단 이유로 끝나지 않았다. - P176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왜 남편은 이 일을 고민하지 않는 걸까? 왜 나만 열심히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걸까? 비록 남편이 나를 도와주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육아를 맡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육아와 일 모두를 잡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야만 했다. - P182
나는 ‘적당한‘ 관계보다 ‘건강한‘ 관계를 원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 기분이 나쁜지, 어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편 가족들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연을 이어가면 좋을지를 물은 것이다. - P195
나는 친한 친구나 친정 가족들에게조차 안부전화를 자주하지 않는다. 용건이 있을 때나 전화하고, ‘정말 가끔‘ 누군가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면 통화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니 시가에 전화하는 일이 ‘의무‘로 주어졌다. 전화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제때 전화를 받지 않거나 하지 않으면마음이 영 찝찝해 깍듯하게 답하곤 했다. 안부전화를 안 하면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나쁜 며느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 P196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여성과 남성의 삶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니,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 또한 가부장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니들, 온갖 차별과 폭력을 견디며 혹독한 시대를 지나온 어머니들, 그러면서도 딸보다 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 어머니들,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굳건히 떠받친 어머니들….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의 치열했던 삶이 안타깝고, 아프고, 또 존경스럽다. - P204
나와 시가는 ‘남편‘이라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계속 뭔가를 시도 중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반걸음씩 물러났다. 부담 없이 편안한 이 거리가 계속 평행선이 될지, 더 멀어질지, 조금씩 가까워지다 결국 만나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다가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예의를 지키자는 마음과 언제든 ‘며느리 사표‘를 던질 마음이 공존한다. 개선은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관계다. 한동안은 이 평행선을 유지하며 변화의 방향을 고민할 생각이다. - P206
스물여섯 출판사에 다닐 때도, 서른넷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여성단체에서 일할 때도, 나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때 나는고마워했던가. 도시락을 싸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노력이라도 해봤던가. 그때의 나는, 우리 엄마의 수고와 고마움도 모르고 밥을 받아먹는 지금 내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 P223
오랜만에 엄마가 오셨다. 빨간 장바구니 카트를 밀고 오리털 파카를 껴입은 오한옥 씨가 왔다."봄이야, 할머니 몸이 지금 차. 이따가 이리 와."남편은 일을 나갔고, 나는 글 쓴다고 밤을 샜다."엄마, 봄이 좀 봐줘. 나 좀 잘게."밤새 친정 엄마의 돌봄노동에 대한 글을 써놓고 또다시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찔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 P225
프리랜서인 내게는 단기 일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과로사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고, 아이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때마침‘ 정년퇴임한 친정 엄마의 돌봄을 받아야 했다. - P229
부끄럽게도 나는 대학에서 여성 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너무나 당연히 비혼주의자였고, 가부장제도 안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임신이나 출산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 중에도 내가 아들을 낳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임신 16주가 지나의사가 아이 성별을 ‘아들‘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잘못 보신 것 같다고, 다시 확인해달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