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설거지도 5호 상자에나 들어가던 거다."라고 했다. 아빠도 "그래, 2호상자에는 그게 안 들어간다고. "하며 거들었다."그건 결혼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부모님이 요리를 해주셨으니 당연히 설거지는 밥을 먹 - P95
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거죠." 언니의 말에, 먹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K는 조용히 일어나 싱크대의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K의 오빠가 빈 그릇을 싱크대 쪽으로 날랐고 설거지까지 함께 했다. 변화라면 변화였다. - P96
"사람은 뭐라도 키우게 되어 있는데." - P99
어느 밤의 도로에서 정우가 해준 말 위를 이제 안나는 흘러간다. 그 말은 겨우 한 문장 정도였지만 자꾸 불어나고 불어나 안나를 든든하게 채운다. 삶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알아. 먹구름에 가려 일몰을 볼 수 없는 날도 생기고, 애써 준비한 마음이 오해되고 버려지는 경우도 생기겠고, 삶의 타이밍이 늘 한 발 늦을 수 있고, 내 경우엔 미련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열 발쯤늦을 때가 많고, 시간 낭비 같은 산책도 많지. 회복불가능할 정도의 일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세계가 훼손되고 내 속도가 흔들릴 때도 울지 않을 거 - P258
라고 말할 자신은 없는데. 그렇지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아주 좋아한 힘이라는 건 당시에도 강렬하지만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만만치 않아. 잔열이, 그온기가 힘들 때도 분명히 지지대가 될 거야. - P259
그리고 둘은 세상에 오롯한 것이란 지금 이 순간뿐인 것처럼 뜨겁게 포옹하는 거라고, 안나가 말했다. - P269
2022년 2월 첫 책녹색평론 휴간에 맞추어 정기구독에서 후원회원으로 변경했다. 휴간기간 동안에는 녹색평론 대신 책을 보내준다는데 마침 1월에 녹색평론 서문집 개정증보판 나왔다고 바로 보내주었다. 귀한 창간호까지 덤으로! 과월호 6권이랑 도서 1권도 신청해서 곧 올텐데.. 밀린 책들 언제 읽으려나…
파란 하늘이 속눈썹에 닿을듯이 가까이 내려왔다. 티끌 하나 없이 푸른 4월의 하늘, 그러나 4월은 잔인한 달, 일 년 열두 달 중 잔인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4월은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섭고 섬뜩하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달력을 북 찢어 없애 버리고 싶은 달. - P27
"보아하니 고등학생 같은데 그 나이에 근심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근심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 P34
"내가 명호를 오해하게 한 것 같네요. 혁명을 꼭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역사에 남는 혁명은 주로 정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환경을 위해 분리 수거에 앞장서는 것도 혁명이고,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혁명이고, 친구와 싸운 후 먼저 사과를 하는 것도 혁명입니다. 저는 꿈을 가진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은 빨간머리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피가 만들어지는 바로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 P50
"엄마가 생각하기엔, 한 번밖에 안 본 왕자님이랑 결혼하는 건 너무 이상해. 성에서 사는 것도 너무 지루할 것 같고, 엄마가 백설공주였다면 난쟁이들 중 한 명이랑 결혼해서 광산 탐험도 하고, 숲 속으로 소풍도 가면서 재미있게 살았을 거야." - P57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 내 인생 자체가 항상 이런 거야.""니 인생이 어때서?""거지 같잖아.""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생각을 해?" - P85
노인이 말했다."그런 말들에 흔들릴 것 없다. 누구 하나 제 모습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라. 문제는 다른 사람이 널 어떻게보느냐가 아니라 네가 너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그거 아니더냐."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꾸했다."그런 위로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지겨워요.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 절 난쟁이, 라고 부르면 저는 난쟁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도사님, 전 만족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기만 했어도, 이 두 다리가 눈에 띄지만 않아도 좋겠어요." - P97
붉은 진주알 같은 열매들이 옹기종기 달려 있는 나무, 사냥한 무당벌레를 머리에 이고 나무 밑동 굴로 들어가는 개미 떼행렬, 검은 갑옷에 삼지창 집게발을 휘두르며 개미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약탈자, 배고픈 곤충들이 엄마 등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소나무 껍질, 솔 냄새로 가득한 숲, 숲에 불어오는바람, 바람을 만드는 하늘, 유유히 흘러가는 양떼구름. - P174
"실패했어."체의 짧은 한마디에 엄마는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물었다."실패? 뭐가?"체는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무언가를 그려 가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냥….… 모든 게…… 가기 전에는 정말 자신만만해서 집으로 돌아올 땐 엄마가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해서 올 생각이 - P231
었는데…… 결국은 다 실패해 버렸어. 이렇게까지 뭔가를 열심히 해 본 건 처음이었는데…… 근데도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가지 말걸, 합이 하는 말 들을 걸 괜히 고집 피워서 얘까지 고생시키고…… 다 나 때문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안 되는 건데." - P232
어머니의 존재감은 다소 약한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노먼에게 적용한 글쓰기 교육법이 인상적이다. 줄이고 줄여서 써 오라고 반복하여 돌려보내다가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었을 땐 됐다고 하며 "이제버리거라."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정법을 죽이라는 말로 들린다. 단호한 그 한마디에 노먼은 지겨운 글쓰기 훈련에서 벗어나 종이를 박박 뭉쳐 구겨선 쓰레기통에 던지고 오후 내내 동생 폴과 함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논다. "버리거라." 이 말은 머무르지 않고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지혜와도 다르지 않다. - P103
마지막 목회에서 아버지는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고 설교한다. 이 말은 길게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가족 간의 설명할 수 없는 애증에 대한 진언(盡言)이다. 나아가한 사람의 예술가를 향한 헌사, 범신론적인 대자연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삶과 예술과 자연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저 너머의 세계에서 우리를 부르며 미소 짓는다. -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