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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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병맛을 어째 ㅋㅋㅋ 못생긴 그림에 못생긴 글씨(작가님 죄송:; 남 말 할 수준은 아닙니다만)로 이런 웃긴 과학 수학 만화를 그리다니! 깨알 댓글에 몇 번을 뿜었는지 ㅋㅋㅋ 얼마 전 읽은 ‘인문학 거저보기: 서양철학편’도 생각나고. 자기 전공 공부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진정한 공부천재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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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혐오로 맞서면 안 된다"고 말하는 ‘점잖은‘ 태도는 ‘남성혐오‘를 걱정하는 목소리와 만나 꾸준히 여성의 목소리를 ‘정리‘하려고 애쓴다. 이미 존재하는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새로운 언어를 ‘남성혐오‘라고 명명하며, 전자의 혐오보다 후자의 ‘혐오‘가 ‘문제‘되도록 만든다. 이제는 추모 현장에까지 ‘메퇘지들‘이나 ‘메갈년들‘이라는 말이 돌아다닌다. 여자들이 뭘 하기만 하면 ‘메퇘지들‘이나 ‘메갈년들‘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북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종북 빨갱이‘가 튀어나오면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더욱 극심해질 수 있다. 여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 P65

언어의 재개념화는 절실하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광복절은 ‘광복‘과 무관한 날이다. 8월 15일 광복절 즈음 TV에서 "광복절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에요.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어요"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던 날, 나는 새삼스럽게 충격받았다.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일제’는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 해방과 무관한 이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나, 이것이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생각하는 일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성혐오의 해법으로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제안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와 결합했을 뿐 가부장제를 대체하지 않았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임금노동자의 가정을 굴러가게 하는 가정 내 노동자, 곧 부불노동자의 존재는 여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최저임금과 무관하게 집안의 노동은 여성이라는 특정 성별에 맡겨져 있고, 그들의 무급노동으로 ‘집안‘이 굴러간다. - P66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ㅇㅇ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 P67

아직도 자궁의 이야기는 부족하다. 수많은 딸들이 자궁에서 사라졌다. 가난한 여성들은 ‘대리모‘라는 이름 아래 인권침해를 견디며 자궁거래에 참여한다. 내가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자궁의 이야기도 있다. 일제시대에 포르말린 용액 속에 담겼으며 그 후 국과수에서 계속 보관하던 조선 여성의 생식기(2010년에 ‘폐기’되었다), 19세기에 유럽으로 팔려와 사망 후에도 1970년대까지 박물관에 전시된 사라 바트만 Sara Baartman의 생식기. 자궁에는 ‘냄새‘보다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내 방, 짙푸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그림 <아이리스Iris> 덕분에 자궁냄새가 가득하다. - P84

이러한 ‘문화’가 19세기의 관념만은 아니다. 실제로 성폭행 가해자가 피해자와의 결혼으로 자신의 죄를 ‘책임’지는 형태는 한국에서도 비교적 최근까지 법의 인정을 받았다. 1999년 1월 《인권하루소식》 1291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여고생을 성폭행해 강간치상죄로 기소된 20대 남자가 피해자 부모로부터 "딸이 자란 뒤 결혼하라"는 합의를 받아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7세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태워 외진 곳으로 끌고 가 강간한 가해자는 1심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후 항소심에서 위의 합의를 조건으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 P90

그 때문에 ‘미러링‘은 어렵기도 하지만 거울을 비췄을 때 상이 맺히는 부분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수많은 현실은 그 거울 속에 다들어오지도 못한다. ‘남성혐오‘는 형식상으로도 이렇게 불가능하다. 여성혐오의 대칭으로 남성혐오라는 개념을 언론이 적극적으로 유포하지만, 이조차 여성혐오다. ‘뒤집어진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알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여성들은 언어를 익혀나가며 입을 열고 있지만, 그동안 이 입을 억압하던 남성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귀는 얼마나 진화했을까. ‘양심이 있는 귀‘로 진화하지 않으면 여성들의 진화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더 정확히는, 알아듣기를 거부한다. - P97

<바람난 가족>에서 부부관계가 끝난 후 호정(문소리)은 혼자 자위를 한다. 여성의 자위 장면이 한국 영화에서 드물기도 하지만, 남편 옆에서 성관계 후 자위하는 모습은 용감하기까지 하다. "꼴리는 건 자유지만 덮치는 건 폭력이다"는 2011년 잡년행진에 등장했던 구호이다. 이 구호에 대해 한 남성이 내게 무척 불편하다는 마음을 밝힌 적이 있다. 저 문장을 보고 ‘왜 남자가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을 굳이 들고 나왔는지‘라는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 P99

생리대 광고에서 "깨끗해요"를 강조하듯이 여성은 깨끗해야 한다. 한국은 심지어 귀신도 처녀 귀신이다. 다른 남자가 다녀가지 않은 몸(처녀), 먹은 흔적이 없는 몸(살), 세월의 흔적이 없는 몸(주름살), 이슬만 먹고사는 깨끗한 몸(배설)이어야 한다. 여성들은 털을 밀고 땀을 더욱 단속하며 주름과 모공을 가린다. ‘하얀 얼굴‘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자외선과 사투를 벌이는 여성들은 여름이면 자발적으로 온 얼굴과 팔을 칭칭 감고 다니기도 한다. - P104

여성은 흔적과 과정을 숨겨야 마땅한 존재이기에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여자‘에 대한 혐오가 표출되기도 한다. "여성들 ‘길거리 화장‘ 자제하길"이라는 기사까지 나올 지경이다. 냄새를 비롯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요소가 있다는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단속하려는 태도는 단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가리고 수줍어하는 것이 ‘여자다움‘에 맞는 행동이므로 화장하는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뻔뻔스럽게 노출하는 여성을 거북하게 바라본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여자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한다. - P105

생리대 부작용 논란의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그중 하나는 여성의 몸에 대해 이처럼 침묵하게 만든 악습에 있다. 생리에 대해 말하지 못하도록 만든 사회가 결국 여성의 건강을 위협한 꼴이다. TV에서 생리대 광고는 1980년 9월부터 오후 9시 이전에 주류 광고와 함께 전면 금지되었다가 1990년대 들어 다시 등장했다. 그때 광고에 등장한 액체는 파란색이었다. 순진한 남학생은 여자들은 ‘거기‘에서 진짜 파란색 피가 나오느냐고 묻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리대‘라는 말이 불편하다며 ‘위생대‘라고 부르자던 정치인도 있다. ‘위생‘이라는 개념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에 더욱 강하게 개입한다. 실제로 프랑스어에서 생리대는 ‘위생수건 serviette hygiénique‘이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가 쓴, 몸을 중심으로 일생을 담은 소설《몸의 일기 Journal d‘un corps》에서 주인공의 어린 아들은 ‘위생수건‘이 생리대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식당 화장실에서 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 P107

캐나다 시인 루피 카우르Rupi Kaur는 자신의 생리혈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으나 두 번이나 삭제당하는 경험을 했다.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생리혈이 아니더라도 오줌, 콧물, 땀 등을 여성은 더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 여성에게 ‘관대하게‘ 허락된 액체는 눈물이다. 애교와 마찬가지로 눈물이라는 ‘약자의 무기‘를 쥐어주고 ‘여성성‘을 드러내도록 한다. 영화에서는 생리혈보다 ‘처녀를 증명하는 피’를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액체 중에 눈물과 함께 관대한 대접을 받는 액체다. ‘처녀막이 터져’ 피가 나오는 ‘전설‘을 가부장제는 사랑한다. 또한 시각 매체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은 주로 여성의 ‘젖가슴‘에 초점을 맞춘다. 그 가슴에서 나오는 ‘젖milk‘이 아니다. - P109

월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재생산에 기준을 둔 남성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된다. 월경을 시작하면 여자가 ‘되고‘ 월경을 마치면 여자로서 ‘끝난’ 것처럼 표현한다. 생식을 기준으로 여성의 성을 보기 때문이다. 에밀리 마틴Emily Martin은 "월경의 목적이 임신이 아니라 질을 관통하는 혈류 자체, 즉 주기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 자체, 여성의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출혈 자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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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아 작가님 병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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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입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글 뒤에서 페미니즘을 비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완전무결하며 언제나 ‘올바른 길‘만 걸어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게완전무결한 요구를 하며 정의를 가장해 페미니스트의 입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모두의 진정한‘ 평등과 정의를 위해 여성을 열심히 단속하는 그 마음의 진정성이야말로 의구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 P41

페미니즘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종종 지배하고 진압하려 한다. 실제 성차별주의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성차별주의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혐오사회Gegen den Hass》를 쓴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는 이러한 걱정의 실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속에는 혐오와 원한과 경멸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걱정이라는 모습을 땀으로써 용인할 수 있는 한계점의 위치를 옮겨놓는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하는 "이게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은 페미니즘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걱정거리를 찾는다. ‘수구‘ 우파가 북한 인권을 걱정하듯이. "걱정의 대상이 반드시 그 원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걱정의 대상은 때로 걱정하기에 적합한 것처럼 만들어지기도 한다." - P45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 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 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 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 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 P52

가네코는 도쿄에서 식모살이, 노점 일 등을 거치며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나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이것은 하쓰요 상을 알게 되면서 하쓰요 상이 내게 읽게 해준 책들의 감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쓰요 상 그 자신의 성격이나 일상생활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335쪽)
가네코가 자기 인생에 ‘단 한 명의 여성‘이라 말한 니야마 하쓰요는 그의 지적 성장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친구다.

《노동자 세이로프》를 감격에 겨워 나에게 권한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죽음의 전야》를 빌려준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베르그손이나 스펜서나 헤겔 등의 사상 일반을, 혹은 적어도 이름이라도 알게 해준 사람이 하쓰요 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하쓰요 상이 갖고 있던 니힐리스틱한 사상가들의 사상이었다.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331쪽)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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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을 때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페미니스트 검증으로 포장한다.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검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켜본다. 한 손에는 확대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집어 올릴 수 있는 핀셋을 든 채 언제라도 ‘실수‘를 포착할 준비를 한다. 탈탈 털어 작은 먼지라도 잡아내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은 진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 P5

너는 ‘메갈‘이냐 아니냐,워마드에 비판적이냐 아니냐는 식으로 질문을 가장한 검증의 태도에 나는 응할 생각이 없다. ‘종북‘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싶지 않듯이, 나는 ‘메갈‘이나 ‘워마드‘로 ‘오해’받을까 봐 조심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조심하도록 만드는 권력이 바로 내가 대항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흘러가듯이 페미니즘, 한국 내의 페미니즘, 온라인에서 작동하는 페미니즘, 메갈리아, 나아가 워마드도 시시각각 흘러간다. 쉽게 규정짓거나 판단하기 어렵다. 개별 사안을 비판하는 것과 낙인을 찍어 "○○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다른 문제다. 물론 일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발언을 뱉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을 교정하려 하기보다, 그러한 행동이 발생하도록 만든 감정의 맥락을 수용하는 것이 먼저다. - P7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나의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 P10

구별의 기준이 선명해질수록 차별이 문화로 안착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혐오는 주로 이러한 구별과 밀접하다. 이분법은 혐오를 설계하는 중요한 지침서로 작용한다. ‘무엇‘의 권리를 말하면 자동적으로 다른 무엇은 권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서 ‘무엇만‘ 중요하다는 거냐고 따진다. 이 ‘분노‘는 어느 정도 진심이다. 사드THAAD 배치 과정에서 진짜 성주 사람과 외부인, 진짜 페미니스트와 메갈(‘꼴페미‘, ‘페미나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호남 사람과 아닌 사람, 백인과 비백인……. 이렇게 커다란 집단으로 나누어 구별하는 데 익숙해진 사고는 개개인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거리가 멀다. 구별을 빙자한 차별의 대표적 예는 ‘성역할‘이다. 엄마가 맡은 ‘밥 하는 사람‘의 역할을 성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 P22

정말로 여자가 ‘같은 여자라서‘ 여자를 돕는다면 사회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의 제도와 문화를 결코 유지할 수 없다. 노예제 폐지보다 가부장제 폐지가 더 어려운 이유는 여성 억압의 역사가 250년의 노예제보다 길어서만은 아니다. - P34

가정은 부계 중심, 사회는 강한 남성연대의 인정으로 구축되어 있어 여성이 여성과의 관계를 위해 가족관계부터 배반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제 속에서 ‘흑인 노예‘와 달리, 여자는 모두 ‘같은 계층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편 여자라는 이유로 계층과 지역을 막론하고 겪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문제’는 이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에 난감하게 걸쳐 있다. 그러나 여성이 정치세력화될 때는 개별성을 강조해 연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여성이 하나의 주체적 인간이 되려 할 때는 ‘같은 여자‘로 묶어놓는다. - P35

여성은 여성을 비판하기도, 지지하기도 쉽지 않다. 남성 사회의 평가 기준에 맞춰 비판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선택해야 안전하다. 남성 집단의 욕을 먹는 여자에게는 여자도 같이 욕을 해야 하며, 남성집단의 칭찬을 듣는 여자에게는 여자도 같이 칭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의 적인 여자‘가 되거나, 여자라서 단순히 여자를 지지하는 평평한 상황이 된다. 남성 사회에서 찍힌 여성은 사라진다. 반면 남성은 여성들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삶을 위협받는 일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모두가 남성 사회의 인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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