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을 때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페미니스트 검증으로 포장한다.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검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켜본다. 한 손에는 확대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집어 올릴 수 있는 핀셋을 든 채 언제라도 ‘실수‘를 포착할 준비를 한다. 탈탈 털어 작은 먼지라도 잡아내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은 진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 P5

너는 ‘메갈‘이냐 아니냐,워마드에 비판적이냐 아니냐는 식으로 질문을 가장한 검증의 태도에 나는 응할 생각이 없다. ‘종북‘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싶지 않듯이, 나는 ‘메갈‘이나 ‘워마드‘로 ‘오해’받을까 봐 조심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조심하도록 만드는 권력이 바로 내가 대항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흘러가듯이 페미니즘, 한국 내의 페미니즘, 온라인에서 작동하는 페미니즘, 메갈리아, 나아가 워마드도 시시각각 흘러간다. 쉽게 규정짓거나 판단하기 어렵다. 개별 사안을 비판하는 것과 낙인을 찍어 "○○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다른 문제다. 물론 일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발언을 뱉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을 교정하려 하기보다, 그러한 행동이 발생하도록 만든 감정의 맥락을 수용하는 것이 먼저다. - P7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나의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 P10

구별의 기준이 선명해질수록 차별이 문화로 안착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혐오는 주로 이러한 구별과 밀접하다. 이분법은 혐오를 설계하는 중요한 지침서로 작용한다. ‘무엇‘의 권리를 말하면 자동적으로 다른 무엇은 권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서 ‘무엇만‘ 중요하다는 거냐고 따진다. 이 ‘분노‘는 어느 정도 진심이다. 사드THAAD 배치 과정에서 진짜 성주 사람과 외부인, 진짜 페미니스트와 메갈(‘꼴페미‘, ‘페미나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호남 사람과 아닌 사람, 백인과 비백인……. 이렇게 커다란 집단으로 나누어 구별하는 데 익숙해진 사고는 개개인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거리가 멀다. 구별을 빙자한 차별의 대표적 예는 ‘성역할‘이다. 엄마가 맡은 ‘밥 하는 사람‘의 역할을 성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 P22

정말로 여자가 ‘같은 여자라서‘ 여자를 돕는다면 사회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의 제도와 문화를 결코 유지할 수 없다. 노예제 폐지보다 가부장제 폐지가 더 어려운 이유는 여성 억압의 역사가 250년의 노예제보다 길어서만은 아니다. - P34

가정은 부계 중심, 사회는 강한 남성연대의 인정으로 구축되어 있어 여성이 여성과의 관계를 위해 가족관계부터 배반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제 속에서 ‘흑인 노예‘와 달리, 여자는 모두 ‘같은 계층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편 여자라는 이유로 계층과 지역을 막론하고 겪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문제’는 이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에 난감하게 걸쳐 있다. 그러나 여성이 정치세력화될 때는 개별성을 강조해 연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여성이 하나의 주체적 인간이 되려 할 때는 ‘같은 여자‘로 묶어놓는다. - P35

여성은 여성을 비판하기도, 지지하기도 쉽지 않다. 남성 사회의 평가 기준에 맞춰 비판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선택해야 안전하다. 남성 집단의 욕을 먹는 여자에게는 여자도 같이 욕을 해야 하며, 남성집단의 칭찬을 듣는 여자에게는 여자도 같이 칭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의 적인 여자‘가 되거나, 여자라서 단순히 여자를 지지하는 평평한 상황이 된다. 남성 사회에서 찍힌 여성은 사라진다. 반면 남성은 여성들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삶을 위협받는 일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모두가 남성 사회의 인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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