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의 입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글 뒤에서 페미니즘을 비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완전무결하며 언제나 ‘올바른 길‘만 걸어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게완전무결한 요구를 하며 정의를 가장해 페미니스트의 입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모두의 진정한‘ 평등과 정의를 위해 여성을 열심히 단속하는 그 마음의 진정성이야말로 의구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 P41

페미니즘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종종 지배하고 진압하려 한다. 실제 성차별주의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성차별주의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혐오사회Gegen den Hass》를 쓴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는 이러한 걱정의 실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속에는 혐오와 원한과 경멸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걱정이라는 모습을 땀으로써 용인할 수 있는 한계점의 위치를 옮겨놓는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하는 "이게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은 페미니즘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걱정거리를 찾는다. ‘수구‘ 우파가 북한 인권을 걱정하듯이. "걱정의 대상이 반드시 그 원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걱정의 대상은 때로 걱정하기에 적합한 것처럼 만들어지기도 한다." - P45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 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 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 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 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 P52

가네코는 도쿄에서 식모살이, 노점 일 등을 거치며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나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이것은 하쓰요 상을 알게 되면서 하쓰요 상이 내게 읽게 해준 책들의 감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쓰요 상 그 자신의 성격이나 일상생활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335쪽)
가네코가 자기 인생에 ‘단 한 명의 여성‘이라 말한 니야마 하쓰요는 그의 지적 성장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친구다.

《노동자 세이로프》를 감격에 겨워 나에게 권한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죽음의 전야》를 빌려준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베르그손이나 스펜서나 헤겔 등의 사상 일반을, 혹은 적어도 이름이라도 알게 해준 사람이 하쓰요 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하쓰요 상이 갖고 있던 니힐리스틱한 사상가들의 사상이었다.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331쪽)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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