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왕 지금 당신 말한 대로 생각한다 믿지마는
우리들이 작심한 바 우린 자주 깨뜨리오.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그 힘이란 미약하오.
그 열매가 시퍼럴 땐 나무 위에 달렸지만,
익게 되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법이라오.
부대우리들이 자신에게 빚진 것을 잊어버려
못 갚는 건 정말이지 피할 수가 없는 거요.
격정 속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제안한 건
그 걱정이 사라지면 결심조차 없어지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격렬하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자체가 소멸되오.
기쁜 마음 광분하면 슬픈 마음 통탄하고,
별것 아닌 사건으로 슬픔 기쁨 엇갈리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아니하며, 사랑조차
운에 따라 바뀌는 건 이상할 것 하나 없소. - P111

햄릿 마마, 극이 마음에 드시옵니까?

왕비 내 생각엔 왕비의 맹세가 너무 과하구나.

햄릿 허나 약속을 지킬 겁니다.

왕 줄거리를 들어봤느냐? 거기에 무슨 악의는 없더냐?

햄릿 예, 예. 농담일 뿐입니다――농담 속의 독이랄까.
절대 악행은 없습니다.

왕 극의 제목은 무엇이냐?

햄릿 「쥐덫」이오. 거 참, 기막힌 비유지요! 이 극은 비
엔나에서 있었던 살인을 본뜬 겁니다―공작의 이름
은 곤자고, 그의 부인은 밥티스타이며—곧 보시게
될 겁니다. 악랄한 작품이지만, 그게 뭔 상관입니
까? 그것이 전하와, 죄없는 영혼을 가진 저희들은
건드리지 못한다구요. 찔리는 게 있는 놈이 움츠리
지, 우린 떳떳합니다. - P113

길든스턴 허나 그것들을 구사하여 어떤 화음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기술이 없습니다.

햄릿 그래, 이 보라고. 자네가 날 얼마나 형편없는 물
건으로 생각하나. 자넨 날 연주하고 싶지. 내게서
소리나는 구멍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자넨 내
신비의 핵심을 뽑아내고 싶어해. 나의 최저음에서
내 음역의 최고까지 울려보고 싶어. 그렇다면, 여기
이 조그만 악기 속엔 많은 음악이, 빼어난 소리가
길 들어 있어. 그런데도 자넨 그걸 노래 부르게 못해.
빌어먹을, 자넨 날 피리보다 더 쉽게 연주할 수 있
다고 생각해? 나를 무슨 악기로 불러도 좋아. 허나,
나를 만지작거릴 순 있어도 연주할 순 없어. - P119

왕 자 햄릿, 폴로니어스는 어딨느냐?

햄릿 야식중이오.

왕 야식중? 어디서?

햄릿 그가 먹는 곳이 아니라,먹히는 곳에서. 정치꾼
같은 버러지 한 무리가 회동, 이 순간에도 그를 차
지하고 있지요. 먹는 데에는 구더기가 유일한 황제
랍니다. 우린 우리가 살찌려고 다른 모든 짐승들을
살찌우며, 우리 자신은 구더기를 위해 살찌웁니다.
뚱보 왕과 마른 거지란 다양한 식사에 불과한데——
음식은 둘이나, 한상에 오르지요. 그렇게 끝난답
니다. - P144

레어티즈 왜 그걸 물으시죠?

왕 부친을 사랑하지 않았다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발단은 시간임을 알며,
레어 그 불꽃과 열기도 시간 가면 줄어듦을
실제 증거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제풀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우리를 해치니까. 허나 궤양의 뿌리로.
햄릿이 돌아온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버지의 아들임을 보여주기 위해
넌 뭘 하겠느냐? - P168

햄릿 여보게, 날 용서하게.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자네는 신사이니, 용서하게.
내가 정신이상으로 어떻게 벌받는지
여러분이 알고 자네도 필시 들었겠지.
내가 했던 일,
자네의 효성,명예심, 그리고 반감을
거칠게 일깨웠을 그 일은 광기였음을
여기서 공언하네.
햄릿이 레어티즈에게 잘못해? 햄릿은 절대 아냐.
햄릿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자기가 아닐 때 레어티즈에게 잘못하면,
그건 햄릿 짓이 아니라고.
햄릿은 그걸 부인하네. 그럼 누가 했지?
그의 광기야. 그렇다면
햄릿은 피해를 입은 쪽에 속한 거지.
그의 광기가 불쌍한 햄릿의 적이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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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셀러스 그게 선왕 같지 않던가?

호레이쇼 자네가 자네인 것처럼.
바로 그런 갑옷을 선왕께서 입으셨지,
저 야심 많은 노르웨이 왕과 싸웠을 때.
그런 인상 쓰셨지, 담판중 노하여 썰매 탄
폴란드 놈들을 얼음 위에 때려눕혔을 때.
이건 이상해. - P13

왕 좋은 때를 즐겨라 레어티즈, 네 시간을.
네 훌륭한 자질을 마음대로 발휘해라.
그런데, 내 조카이자 아들인 햄릿———

햄릿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 - P21

햄릿 보이다뇨, 마마? 아뇨, 유별납니다.
전 〈보이는 건〉 모릅니다. 어머니,
저를 진실로 나타낼 수 있는 건 검정 외투,
관습적인 엄숙한 상복, 힘줘 뱉는 헛바람
한숨만도 아니고, 또 강물 같은 눈물과
낙담한 얼굴 표정, 거기에다 비애의
모든 격식과 상태와 모습을
합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보이지요,
누구나 연기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허나 제겐 겉모습 이상의 무엇이 있으며,
그런 건 비통의 옷이요 치장일 뿐입니다. - P22

햄릿 제발 놀리지 말게, 학우여.내 어머니의
결혼식을 보려고 온 것으로 생각되네.

호레이쇼 정말이지 왕자님, 연달아 있었지요.

햄릿 절약이야 절약, 호레이쇼.
장례식 때 구운 고기, 혼례상에 차갑게 내놓았지.
호레이쇼, 그런 날을 맞느니 차라리
내 철천지 원수를 천국에서 만났으면
아버님―내 아버님을 보는 것 같아— - P27

레어티즈 햄릿 왕자와 그의 하찮은 호의란 건
유행이요 젊음의 객기이며 청춘기의 꽃송이라,
빨리 피나 영원하진 못하고
달콤하나 오래가진 못하니,
한순간의 향기요 시간 때우기 이상은 아니다
생각해라. - P31

오필리아 이 훌륭한 교훈의 골자를 제 마음의
파수꾼 삼을게요. 그러나 오라버님,
은총 잃은 어떤 목사들처럼 나에게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 보여주고,
자기는 허풍선이 무모한 탕아처럼
환락의 꽃길을 밟으며, 자신의 설교를
저버리진 마세요. - P33

폴로니어스 이 일은 잘 끝났습니다.
전하, 마마, 왕의 지위는 무엇이고
임무는 무엇이며, 왜 낮은 낮, 밤은 밤,
시간은 시간인지를 규명해 보는 것은
밤과 낮과 시간 낭비일 뿐이옵니다.
그러므로 기지의 핵심은 간결함이요
장황함은 팔다리와 겉치레인지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자님은
미쳤습니다. 미쳤다고요, 왜냐하면
진짜 광기를 정의함에 있어 그런 상태를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왕비 말재주보다는 요점을. - P65

폴로니어스 정말, 그게 바람 없는 곳이지요. ——(방백) 때론 얼
마나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지——이런 재치 있는 응
답은 광기에 빠진 사람이 종종 하는 거라고. 이성이
나 맑은 정신 가지고는 이렇게 꼭 들어맞는 말을 할
순 없지. 그를 떠나 곧장 그와 내 딸이 만날 방법을
주선해야겠다. ―저하, 소신이 물러가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 P71

폴로니어스 이 세상에 으뜸가는 배우들입니다. 비극, 희극,
사극, 목가극, 희극적 목가극, 목가극적 사극, 사극
적 비극, 목가극적 사극적 희극적 비극과, 무슨 극
인지 알 수 없거나, 끝없이 긴 연극도 좋습니다. 세
네카의 비극이 아무리 무거워도, 플로터스의 희극이
아무리 가벼워도 좋습니다. 극작법을 따른 극이든
무시한 극이든, 이들이 유일한 배우들입니다. - P79

폴로니어스 저하, 그들의 값어치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겠나
이다.

햄릿 나 원 참, 봐요, 훨씬 더 낫게 해야지. 모든 사람
을 각자의 값어치대로만 대접하면, 태형을 피할 사
람 있어요? 당신의 명예와 가치에 버금가게 그들을
대접하시오, 그들의 자격이 모자랄수록 당신의 선심
은 더욱 값질 테니까. 안으로 데려가시오. - P85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P94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ㅡ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 P94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가만있자, 고운 오필리아!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를 잊지 말아주소서. - P96

왕 그리 할 것이오.
높은 자들의 광기는 방관하면 아니되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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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
D 지음, 김수정 외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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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세상에 살지 않아 이런 대단한 분이 있는지 몰랐다. ‘주제 파악과 거리 유지라는 원칙에 입각해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작가님의 냉철함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예상을 깨는 냉철한 현실 감각에 더 신뢰가 간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법의 문제이므로. 끝까지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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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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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환대를 받아보지 못한 소년들이 환대를 주고 받는 경험을 통해, 한 번도 누군가가 책을 읽어줬던 경험이 없는 소년들이 서로 책을 읽어주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미약하나마 풍성한 마음을 가졌기를. 김현경의 멋진 책 <사람, 장소, 환대>를 생각나게 하는 감동적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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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여버릴 걸.
그렇지만 죽이지 않아 다행이다.

문득 2011년 1심 재판 이후 내 모습이 떠올라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때 나도 ‘생존자‘라는 말이 싫었다. 살아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부유하듯 떠다니는 내가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 같아서,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옹졸해진 내가 부족하고 모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냥 사는 건데, 삶에 무슨 크고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존자라고 하는지. 한때는 그 말이 부담스러웠다. 힘을 내라는 말이, 괜찮냐고 묻는 안부가 더 힘들고 더 괜찮지 않았다. - P5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길은 있다고, 그러니 살라고. - P7

‘법대로‘ 하면 피해를 인정받고 내 삶을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끝은 있는 걸까. 싸움에서 이겼는데 왜 난 여전히 말과 시간,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아득바득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 되어 이 싸움을 하는 걸까. 이 싸움이 가치가 있나.
차라리 죽여버릴 걸. - P19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범죄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호소하자 경찰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내가 ‘당하면 여기 이 자리로 와서 말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기들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더라. - P20

연대자는 어떤 존재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연대자로서의 나를 피해자의 그림자로 표현한다. 그림자는 본체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연대의 기본은 본체인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는 그 길이와 방향을 통해 본체가 시간과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피해자를 위해 때로는 전략을 수립하고, 특정 방향을 선택하도록 권하며, 앞으로 나서기도 한다. - P24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2014년 이후 내가 설정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면 번아웃에 빠져 이미 연대를 중단했을 거다. 그 원칙은 바로 주제 파악과 거리 유지다. - P26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험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앎을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전공자나 관련 자격증이 있는 이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바로
‘주제 파악‘이다. 내가 할 몫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며, 전문가와 협업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해야 피해자에게 도움이 된다. - P27

사법 시스템에서의 연대는 피해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되, 가해자의 입장과 전략 등 상황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게 있어 피해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불완전성과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흠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고 주장이 편향될 수도 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도 인간이며, 인간은 무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가해자가 취할 가능성이 큰 입장과 전략을 분석하며, 결과적으로 사법 시스템에서 어떻게 연대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유용할지 고민한다. 건조하고 냉혹한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피해자가 헛된 희망을 품는 대신 현실을 파악하도록 돕고,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력을 하는 것이 내 역량에 맞는 연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29

첫 만남 이후 나는 H씨와 J씨에게 건네받은 각종 자료를 분석했다. 피해자가 직접 공판검사를 만나 설명하고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검사와 면담하도록 제안했다. 대다수 피해자들은 본인이 검사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피해 회복에만 힘쓰면서 가만히 있으면 검사가 ‘어련히 알아서‘ 최선을 다해 피해 사실을 입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건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는 공판검사도 많다. 그래서 검사와 직접 면담해 설명하도록 권한 것이다. - P33

가해자 지인들의 2차 가해는 허위비방, 사생활 유포, 모욕, 신상정보 공개 등 다양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1차 피해인 성폭력 사건의 고통에 더해 추가 피해의 고통까지 떠안게 되며, 그 추가 피해 때문에 자해와 자살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2차 가해가 피해자들이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다시 구성하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성폭력 2차 가해를 별도로 다루는 법률은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형법상 혹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사실적시/허위사실적시), 모욕, 성폭력처벌법상 비밀준수 위반 등으로 고소·고발한다. 그러나 성폭력 2차 가해를 다루는 법률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수사기관은 그 죄질을 과소평가하고, 신상공개와 같은 2차 가해가 이루어져도 성폭력처벌법 등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항의하면 이미 공론화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며, 형사사법 시스템을 거치려면 외부의 의문이나 비판을 수용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 P43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발과 고소 후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현행 수사·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된 사법적 판단이 이루어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차 가해 사건은 많은 경우 기소까지 가지 않으며, 수사관들은 2차 가해가 피해자의 인격과 삶을 얼마나 갉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일부 변화가 감지되긴 하지만 법원도 여전하다. 입법적 보완은 필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싸움을 진행중인 피해자들을 위한 수사기관과 법원의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P47

피해자는 《디스패치》가 내세웠던 영상분석 전문가를 찾아가 정식으로 영상분석을 의뢰했다.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봐야 구설에 오를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전문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영상을 다시 분석했으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며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디스패치>는 1년 뒤인 2018년에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사를 삭제하면서 정정보도를 내보냈다. 이렇듯 진실을 알리려고 피해자가 애를 썼음에도 언론과 대중은 외면했다. 언론은 조회 수만 높이면 되기 때문에 이후 진실이 드러나도 스스로 정정하려 들지 않으며, 강제로 정정하게 되어도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다. 의심하기를 선택한 대중들은 추후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도 본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허위 기사를 두고 피해자와 사건에 대해 말을 얹으며 추가 가해를 한 이들 또한, 이후 정정보도 등이 나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P52

연대를 하기로 결정한 후, 그에게 폭로 글과는 별개로 그가 오랜시간 당했던 교제폭력에 대해 시간순으로 일람표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만들어도 어차피 다시 작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건과 관련해 정리하도록 권하는 것은, 결국 진술을 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 자신이고, 이런 정리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을 인정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통스럽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난 기다린다. 연대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림, 인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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