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여버릴 걸.
그렇지만 죽이지 않아 다행이다.

문득 2011년 1심 재판 이후 내 모습이 떠올라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때 나도 ‘생존자‘라는 말이 싫었다. 살아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부유하듯 떠다니는 내가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 같아서,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옹졸해진 내가 부족하고 모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냥 사는 건데, 삶에 무슨 크고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존자라고 하는지. 한때는 그 말이 부담스러웠다. 힘을 내라는 말이, 괜찮냐고 묻는 안부가 더 힘들고 더 괜찮지 않았다. - P5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길은 있다고, 그러니 살라고. - P7

‘법대로‘ 하면 피해를 인정받고 내 삶을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끝은 있는 걸까. 싸움에서 이겼는데 왜 난 여전히 말과 시간,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아득바득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 되어 이 싸움을 하는 걸까. 이 싸움이 가치가 있나.
차라리 죽여버릴 걸. - P19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범죄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호소하자 경찰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내가 ‘당하면 여기 이 자리로 와서 말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기들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더라. - P20

연대자는 어떤 존재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연대자로서의 나를 피해자의 그림자로 표현한다. 그림자는 본체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연대의 기본은 본체인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는 그 길이와 방향을 통해 본체가 시간과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피해자를 위해 때로는 전략을 수립하고, 특정 방향을 선택하도록 권하며, 앞으로 나서기도 한다. - P24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2014년 이후 내가 설정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면 번아웃에 빠져 이미 연대를 중단했을 거다. 그 원칙은 바로 주제 파악과 거리 유지다. - P26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험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앎을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전공자나 관련 자격증이 있는 이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바로
‘주제 파악‘이다. 내가 할 몫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며, 전문가와 협업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해야 피해자에게 도움이 된다. - P27

사법 시스템에서의 연대는 피해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되, 가해자의 입장과 전략 등 상황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게 있어 피해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불완전성과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흠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고 주장이 편향될 수도 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도 인간이며, 인간은 무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가해자가 취할 가능성이 큰 입장과 전략을 분석하며, 결과적으로 사법 시스템에서 어떻게 연대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유용할지 고민한다. 건조하고 냉혹한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피해자가 헛된 희망을 품는 대신 현실을 파악하도록 돕고,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력을 하는 것이 내 역량에 맞는 연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29

첫 만남 이후 나는 H씨와 J씨에게 건네받은 각종 자료를 분석했다. 피해자가 직접 공판검사를 만나 설명하고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검사와 면담하도록 제안했다. 대다수 피해자들은 본인이 검사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피해 회복에만 힘쓰면서 가만히 있으면 검사가 ‘어련히 알아서‘ 최선을 다해 피해 사실을 입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건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는 공판검사도 많다. 그래서 검사와 직접 면담해 설명하도록 권한 것이다. - P33

가해자 지인들의 2차 가해는 허위비방, 사생활 유포, 모욕, 신상정보 공개 등 다양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1차 피해인 성폭력 사건의 고통에 더해 추가 피해의 고통까지 떠안게 되며, 그 추가 피해 때문에 자해와 자살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2차 가해가 피해자들이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다시 구성하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성폭력 2차 가해를 별도로 다루는 법률은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형법상 혹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사실적시/허위사실적시), 모욕, 성폭력처벌법상 비밀준수 위반 등으로 고소·고발한다. 그러나 성폭력 2차 가해를 다루는 법률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수사기관은 그 죄질을 과소평가하고, 신상공개와 같은 2차 가해가 이루어져도 성폭력처벌법 등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항의하면 이미 공론화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며, 형사사법 시스템을 거치려면 외부의 의문이나 비판을 수용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 P43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발과 고소 후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현행 수사·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된 사법적 판단이 이루어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차 가해 사건은 많은 경우 기소까지 가지 않으며, 수사관들은 2차 가해가 피해자의 인격과 삶을 얼마나 갉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일부 변화가 감지되긴 하지만 법원도 여전하다. 입법적 보완은 필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싸움을 진행중인 피해자들을 위한 수사기관과 법원의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P47

피해자는 《디스패치》가 내세웠던 영상분석 전문가를 찾아가 정식으로 영상분석을 의뢰했다.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봐야 구설에 오를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전문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영상을 다시 분석했으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며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디스패치>는 1년 뒤인 2018년에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사를 삭제하면서 정정보도를 내보냈다. 이렇듯 진실을 알리려고 피해자가 애를 썼음에도 언론과 대중은 외면했다. 언론은 조회 수만 높이면 되기 때문에 이후 진실이 드러나도 스스로 정정하려 들지 않으며, 강제로 정정하게 되어도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다. 의심하기를 선택한 대중들은 추후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도 본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허위 기사를 두고 피해자와 사건에 대해 말을 얹으며 추가 가해를 한 이들 또한, 이후 정정보도 등이 나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P52

연대를 하기로 결정한 후, 그에게 폭로 글과는 별개로 그가 오랜시간 당했던 교제폭력에 대해 시간순으로 일람표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만들어도 어차피 다시 작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건과 관련해 정리하도록 권하는 것은, 결국 진술을 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 자신이고, 이런 정리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을 인정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통스럽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난 기다린다. 연대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림, 인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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