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빠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았다. 엄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한국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시에 엄마는 한동안 몸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고,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지금은 죽어가기보다는 살아가기를 선택할 때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자신의 조국과 언니에게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갖고 싶어했다.
"서울엔 네가 아직 못 가본 작은 시장들이 있어." 엄마가 말했다. "광장시장 같은데, 거기선 고릿적부터 아주머니들이 빈대떡이랑 갖가지 전을 부쳐서 팔고 있지."
나는 눈을 감고 눈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서울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다. 녹두 반죽이 기름에 지글지글 지져지고, 고기 패티와 물 - P201

기를 쫙 뺀 굴에서 계란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엄마가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볼 시간이 앞으로 더 많다고 생각했던 모든 장소를 내게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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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우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여성성의 신화》(1963)
생각에 대한 욕망

04 인도로 출발하다

이런 움직임은 영국 통치하에서도 여러 사법 개혁으로 이어졌다.
1795년과 1802년 벵골에서는 여아 살해를 법으로 금지했다. 또한 1829년에는 사티를 금하고 1856년에는 과부의 재혼을 허용했다.
마하라시 카르베는 이런 개혁주의 사상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도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 아들 돈도 카르베는 이라바티의 남편이 되었다. 마하라시 카르베는 푸네에 미망인을 위한 학교를, 뭄바이에 인도 최초의 여성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와 함께 당시 세계 최초의 여대였다. - P120

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역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이라바티 카르베와 같은 강한 인도 여성들이나,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가부장적 규범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더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여학생들에게 감명받았다.
소규모 실증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남성 대부분은 자기 경력을위해 독일어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반면 여성 상당수는 어학을 공부하면서 혼담을 미루기 위해 푸네에 왔다.
인도에 처음 체류하는 동안 내게 생긴 의문은 한편으로는 사회 규범,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 여성들의 실제 행동에 대한 것이었고 독일로 돌아와 이를 논문 주제로 삼았다. - P121

푸네 독일문화원에서는 이런 봉기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비정치적이었고, 계급·카스트·가부장제 체계와 그 결과를 목격하고 경험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나중에는 "일단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마르크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같은 일이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스트가 되어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이것도 푸네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사서인 파렉(Parekh)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신이나 내 코앞에 책을 한 권 들어 보였다. 바로 미국에서 여성 운동의 시작을 알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여성성의 신화》(1963)였다. 파렉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이 그녀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었고 인도와 독일에서 관찰한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또한 앞으로 여성해방이 나의 주제가 될 것임을 깨달았다. - P127

05 고향에 돌아오다 - 새로운 연구와 교육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항상 앞으로, 뒤로는 절대(FORWARD EVER-BACKWARD NEVER)‘라는 좌우명에 따라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 신조는1960~1970년대 전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뒤로 가야하나?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뭘 할 수 있을까? - P130

나는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전후 서독의 많은 젊은이처럼 나도 역사에서 이 부분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1960년대 학생 운동으로 이 주제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나는 큰 흥미를 느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Marx and Engels, 1845a)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1845b)를 읽었으며, 후자에서 독일의 이상주의를 비판한 부분이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제11 테제는 주요한주제가 되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Marx, 1845b, pp. 14~15).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제와 《독일 이데올로기> 전체가 새 시대의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전의 관념론적 개념을 버리고 교회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명확한 이론적 토대를 발견했으며, 형이상학적 관점을 역사적·유물론적 관점과 맞바꿨다. 또한 모든 종교가 역사 속에서 발전했다는 것과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주요 종교가 왜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억압하는지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억압과 고통을 겪었지만 전에는 이 경험을 설명할 개념이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제공했다. - P133

우리 여성에게는 신이 없다 - P144

뭄바이에서는 타타사회과학연구소(TISS) 교수인 수마 치트니스(SumaChitnis)가 여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내 논문에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가 자기 계급과 계층의 여성들이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였기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내, 며느리, 어머니 역할과 학생, 노동자, 정치활동을 하는 여성의 역할을 결합했다. 이런 여성의 역할 다양성은 당시 독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델리에서 학생을 비롯한 여성들을인터뷰할 때에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인도의 미혼 여성은 생존 수단도 사회적 지위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부분이 직업을 갖고 싶어했다. 내가 놀란 점은 이 가부장적 국가에 교수와 고위직으로 일하는 여성이 독일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는데, 더욱 놀라운 점은 남성이 여성상사 ‘아래서 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도는 특히 가부장적인 국가로 보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그럴 때면 인도 여성은 ‘강한 여성‘이 - P149

고,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특권층 또는 그런 카스트에 속한다고 답했다. 나는 오늘날 인도 남성들이 인디라 간디와 같은 ‘강한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도 사회의 기본구조가 여전히 모계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중시하는 유산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 P150

우리 교수진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혁신성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학생들에게 집단을 형성해 (처음에는 프로젝트 집단에 남녀가 함께 있었고 여성만의 프로젝트는 없었다), 청년 노동, 성인 교육 및 훈련, 노숙자 관련 분야, 나중에는 여성 및 사회교육 분야에서도 진행할 프로젝트를 선택하도록했다. 기존 기관의 전통적 인턴십과 달리 우리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만들어야 했다. 즉 이들의 활동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만아니라 해방적 특징이 있어야 했다. 또한 이런 프로젝트의 해방적 목표는 대상 집단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적용했다. 내가 이해하기로 집단 작업, 공동의 실천과 성찰, 프로젝트 보고서를 위한 협력은 파울루프레이르가 말한 것처럼 자유의 실천이었다. 이 프로젝트 기반 연구 과정은 대학을 지배하던 개인주의와 경쟁에 대한 압박을 극복하는 효과적 방법이었고, 학생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이는팀워크를 위한 역량과 사회적 창의력을 기르고, 이론적 통찰력을 얻기전에 경험적 지식을 습득하고, 이론 연구에 현장이 필수적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나는 이론을 먼저 배우고 이를 실행하는 기존 순서를 뒤집은 것이었다. 내게는 현장이 이론에 선행한다. - P152

06 여성 운동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은 내게 우리 사회의 실상, 즉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중산층 가족의 허울 뒤에 얼마나 많은 폭력, 특히 우리의 행동 이전에는 언급이 금기이던)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숨어 있는지 눈뜨게 해주었다. 또한 나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과학‘이라고 받아들이는 분야에서 이런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여성임을 가시화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성들은 주로 남성인 사회과학자들에게자신에게 고통을 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수치심 때문인 경우가 많았고 의사나 경찰이 그들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사회과학자로서 밤낮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오는 분노와 걱정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꾸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곧 전통적 • 경험적 • 정량적 사회 연구 방법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과학자이자 이론가로서의 주관성은 ‘객관적 과학‘에서 금기였 - P169

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을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나만의성 연구 방법론을 개발했다. 객관성에 대한 잘못된 주장과 함께 널리퍼진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 연구"(Huizer, 1973)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위한 방법론의 일곱 가지 기본가정을 개발했다. 이는 쾰른 폭력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의 경험에서 발전했다. - P170

쾰른의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은 정치, 과학, 이론, 방법론과 관련해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후 내가 모든 연구, 교육, 정치적 투쟁에서 실천한 실행 연구는 우리가 연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이 아니라 공동연구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방법은 내 평생에 걸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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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금의 채찍질.에도 팔지 못하는 검은호두나무.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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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돌연함. 그 끔찍한 무게. 그리고 필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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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 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는말이다. H마트는 일반 슈퍼마켓 매대 중 달랑 한 칸을 차지하는 ‘세계 전통식품‘ 코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 P9

나의 슬픔은 뜬금없는 순간에 들이닥치기 일쑤다. 나는 욕조에 엄마의 머리카락이 허다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게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는, 5주 동안 날마다 병원에서 밤을지새운 일에 대해서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H마트에서 낯모르는 아이가 뻥튀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드는 모습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원반 모양의 그 앙증맞은 쌀과자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 P12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부아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내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이 한국 노인에게 짜증이 난다. 이 여인은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단사실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마치 생면부지의 이 여인이 살아남은 것이 내가 엄마를 잃은 것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우리 엄마 나이에도 자기 엄마를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골이 난다. 저 노인은 여기서 이렇게 매운 짬뽕을후루룩거리며 먹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은거지?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까. 인생은불공평하고, 때로는 분별없이 남 탓을 해보는 게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까. - P14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H마트에서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는사람이 얼마나 될지, 쟁반에 음식을 올려 가져오면서 가족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이 사람들이 여기서 무언가를먹는 것은 음식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고 축복을 나누 - P18

고 싶어서일까? 이중에 누가 올해 또는 지난 10년 동안 고향에 못 갔을까? 누가 나처럼 죽을 때까지 영영 못 볼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 P19

우리는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에 다쓰여 있다. 저마다 조용히 앉아서 점심을 먹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다 같다. 모두가 고향의 한 조각을, 우리 자신의 한 조각을 찾고 있다. 우리가 주문하는 음식과 우리가 구입하는 재료에서 그걸 맛보고 싶어한다. 허기를 채우고 나면 우리는 각자제 기숙사 방으로, 교외의 부엌으로 흩어져서, 열심히 장 본것을 부려놓는다. 그리고 이 긴 여정 없이는 만들지 못했을 음식을 살뜰히 재현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트레이더 조 매장에는 없다. H마트는, 아무데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여기서는 반드시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인 향기로운 공간이다. - P21

버스는 초저녁에 도착했다. 덩컨은 내게 케이크 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곳은 지하에서 이런저런 공연을 하는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작은 바였다. 나는 주말에 입을 옷가지로 불룩한 배낭을 메고 바를 향해 엘런 스트리트를 걸었다.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내가 유행에 동떨어진 차림을 한 10대 청소년 같다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봄이 여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고 사람들은 윗도리를벗어서 팔에 걸치고 다녔다. 익숙한 근질거림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어떤 야생적인 상태- 낮이 더 길어져 도시를 걷는 일이 아침부터 밤까지 마냥 기분좋기만 한 때, 모든 책임을 저 - P72

길가로 내던진 채 운동화를 신고 텅 빈 거리를 생각 없이 내달리고 싶은 그런 때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충동을 외면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방학이, 유유자적한 나날이 내게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조만간 뭔가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받아들여야 했다. - P73

가끔씩 나는 부모님이 휴일 파티 때 마시다가남겨둔 술을 빼돌렸다. 마치 화학자처럼 조심조심 이 병 저 병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덜어내어, 그걸 탄산음료와 섞어 공원에서 마셨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다니면서 음악을 들었다. 때로는 한 시간 거리를 달려 덱스터저수지나 펀 리지까지 가서, 선창에 앉아 석유처럼 검은 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막막하고 황량한 물을,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우리가 느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한 공명판으로 삼았다. 또 어느날에는 스키너 언덕으로 올라가서 우리를 볼모로 붙들고 있는 따분한 도시를 내려다보거나, 24시간 문을 여는 아이홉 식당에 가서 커피와 해시 브라운 감자를 먹었다. 아니면 언젠가우리가 발견한, 끈이 긴 그네가 있는 남의 땅에 몰래 들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차를 몰고 공항에 가서 멍하니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온 적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여행하고 싶던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야행성 10대 몇몇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과 AOL 채팅 프로그램으로 하나가 됐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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