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시대 -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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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부터 몽골, 오스만, 영국, 독일제국의 흥망성쇠를, 동아시아 삼국 한미일의 엇갈린 운명을, 현대제국이라 불릴 수 있는 러시아(소련), 미국, 중국의 전망까지 담고 있다. 어리석은 큰 형님(중국) 따라 문 닫고 살다 서구열강에, 일본에 침략 당하고 반쪽되었지만 살아남은, 이만큼 성장한 우리나라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앞으로 미중은, 또다른 제국은, 그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과 반복을 짚어보기 좋은 책이다.

* 역사 싫어하는 나에게 중세는 좀 지루했지만 대영제국 이후 근대, 현대는 흥미로웠고 미중은 다소 반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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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00년 전의 동아시아 삼국: 엇갈린 운명
학창 시절 어느 역사 교수님이 해준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선의에 힘입어시간이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장님과도 같다고 하셨다. 장님은 자신이 건너간 다리의 모양이며 발밑을 흐르는 강물을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그런데 그가 만약 《심청전》속의 심학규 봉사처럼 다시 개안眼하게 되면어떠할까. 자신이 건너온 외나무다리의 실제 모습이 건너가는 도중에 가졌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우리가 배운 역사는 과연 과거의 ‘사실‘ 그대로일까. - P297

정조가 시작한 쇄국이란 늪
조선의 패착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는데, 성리학과 쇄국이 그것이다. 조선 지배층이 오로지 성리학에만 매달렸다는 - P310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누군가 다른 사상과 종교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그를 이단으로 취급해 탄압하였다. 이처럼 안타까운 역사는 정조 때부터 한층 자명한 것이 되었다. - P311

혜성처럼 등장한 신지식인 최한기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아편전쟁이 끝난 다음이었다. 나는 혜강 최한기라는 학자의 등장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개성 출신으로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서 살았다. 가까이 지 - P312

낸 이로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와 실학자 이규경이 있다. 이규경은 청장관 이덕무의 손자로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거질의 백과사전을 편찬한 대학자였다. 이규경이 쓴 글에서도 알수 있듯, 최한기는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을 대거 구입해서 읽었다. 그 가운데는 아편전쟁 이후 번역된 서양 사정에 관한 책자가 많았는데, 그 학식이 실로 방대해 우리의 짐작을 넘어선다.
최한기는 서양의 지리와 천문학에 능통하였다. 1857년에는《지구전요》를 저술하였는데, 서양의 지리와 천문학 및 서구 열강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식자층에 소개하였다. 최한기는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의 이론을 소개하는 《성가운화》라는 책도 지었다. <신기통》과 《기측제의》 등을 저술하여 중국의 번역본을 통해학습한 서양의 물리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최한기는 중세적인형이상학을 배척하고, 실용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산업의 부흥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서양의 뛰어난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최한기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고 서구 열강과의 통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대의 주류 학자들은최한기를 매도하기에 바빴다. 최한기의 견해에 어느 정도 수긍한인사로는 박규수를 비롯하여 오경석과 유대치 등이 있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선진 문물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였다. 오경석과 유대치는 중인으로, 시대의 대세를알고 있었으나 조정에는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 P313

불완전한 신해혁명
마침 쑨원이라는 불굴의 혁명가가 있어, 수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이 성공해 (1911) 공화국 체제의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쑨원은 휘하에 군사력이 없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전체를 하나로 결집할 힘이 부족하였다. 할 수 없이 그는 청나라의 한인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대대적인 양 - P330

보를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혁명에 전혀 가담한 적도 없었고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인물이었으나, 막강한 북양 군벌의 대표라는 이유로 신생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었다. 그는 공화제를 뒤엎고 다시 황제가 될 생각까지 하였으나 갑자기 죽음을 맞이해 중국의 공화제는 가까스로 보존되었다. - P331

그런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소련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이른바 냉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양국은 핵무기를 최대한 비축하며 세계를 둘로 갈라놓았다. 그 덕분에 일본은 미국의 중요한 맹방이되어 자연스럽게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패전으로 돌이킬 수 없이 몰락한 일본 경제는 곧 되살아났다. 일본은 운이 억세게 좋았다.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이 3년간이나 계속되자 일본은 군수물자를 미국 측에 공급하며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6·25전쟁은 미국과 중국 및 소련의 대리전이었는데, 일본의 재건에 결정 - P356

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덕분에 일본은 1960년대부터 다시 경제 강국으로 등장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돌이켜 보면, 19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동맹국으로서 뜻밖의 이익을 얻었다. - P357

7장. 현대의 세계제국들 소련, 미국, 중국
미국의 군부는 언제 어떻게 독립적인 권력이 되었을까? 그들이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우하게 된 것은 냉전 이후의 일이다. 군부의 힘이 비대해지자 미국은 국제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경향을 보인다. 외교보다는 군사개입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 P376

각지에는 군벌이 웅거하여 중국의 통일을 가로막은 채 각자도생을 위하여 외세에 의존하였다.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는 그 자신도 군벌 출신이었으나, 국민당을 이끌며 북정을 단행해 가까스로 군벌을 제압하고 통일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은 공산당의 도전에 맞서싸우느라 오랫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중국을 침략한 외세보다 내부의 적인 공산당 토벌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그로 인해 공산당은 이른바 ‘대장정‘이라는 극한의 생존 투쟁으로 내몰렸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은 끔찍한 피해를 보았으나, 민심을 얻었고, 마오쩌둥 중심의 강력한 지도 체제를 만들었다.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거세졌으므로,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선언하고(1937) 항일 전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지지부진하였으나, 1943년부터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는데 1945년 8월에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던짐으로써 전쟁이 끝나서 중국은 해방의 기쁨을 맞았다. - P383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경제 및 군사 대국으로 최강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때부터 미국은 한 수 아래인 소련을 적으로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1991) 줄곧 ‘냉전‘을 고수하였다. 소련의 현실적 위협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점을 크게 부풀린 것은 미국이었다. 자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이 맞상대가 되지 못하는 중국의역할을 과대하게 포장한 채 전방위적 공격을 벌이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1945년 이후 미국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세계 산업 생산력의절반이 미국에 있었고, 경쟁 상대가 없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전쟁 통에 완전히 망했고, 전쟁의 승자는 패자든 사실상 모두 경제적으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미국 본토는 전쟁의 회오리에서완전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생산 시설이 모두 온전하였다. - P395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는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 군부 지지자들과 함께 정적을 제압하고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1970년대 말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낙후된 중국 경제를 되살리려고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에 잘 나타난다. 고양이의 색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임무에 충실한지만 따지면 된다는 실용주의였다. 경제적으로는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기존 공산주의지배 체제를 고수하였다. 경제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와공산주의를 교묘하게 결합한 것, 이른바 중국식 사회주의를 창안한 것이 덩샤오핑의 업적이었다. - P405

독재자 푸틴의 시대이후 러시아는 부정부패에 시달렸다. 천연가스와 석유를 생산하는 자원 대국이지만, 귀중한 천연자원도 소수의 마피아와 관료의 배만 불릴 뿐이다. 수도 모스크바의 외관은 휘황찬란하지만일반시민의 삶은 비참하다. 이에 구소련 체제에 대한 향수가 더욱 짙어졌고, 블라디미르 푸틴은 2020년 초 그들의 복고적 정서를 이용하여 영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는 2036년까지 권좌를 지킬 수 있다. 그보다 2년 앞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자신을 종신 주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현대의 차르와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평생 집권할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재자의 운명이란 갑자기 종말을 맞을 수가 있다.
시진핑 주석과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도 시민에 대한 통제를더욱 강화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여러 가지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정치·경제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쉽게 호전되지 못하는 이유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러시아에 막대한이익을 제공하고 있으나, 그런 일이 영원히 계속될 리도 없다. 언제라도 푸틴에게는 뜻밖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 P411

《로마제국의 몰락》이란 책에서, 영국 역사가 피터 J. 헤더는 주목할 만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첫째, 로마제국은 끝까지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멸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 그 대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염려된다.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 정치가들은 입만 열면 평화를노래하지만 그들의 손은 언제나 방아쇠를 만지고 있다.
둘째, 인종차별과 계층 간의 갈등이 커져 사회통합이 깨졌다는점이다. 이처럼 우울한 광경은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도 목격한 바다.
셋째,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도덕적인 우위를 잃었다는 사실도심각한 지점이다. 수많은 사람이 미국적 가치가 과연 존재하는지회의한다. 미국은 과연 미래를 앞장서 이끌기에 충분한 나라인가.
미국의 위기를 증명하는 현상은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사건건 미국이 중국과 시비를 벌인다는 점이다. 각종 지표를 보면 그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2020년에 중국은 유럽연합과의교역에서 미국을 추월했는데,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다. 또 중국은 해외직접투자FDI 분야에서 세계 1위 국가로 떠올랐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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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0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햇살과함께 님 정말 열심히 독서하시네요!!

햇살과함께 2023-12-01 11:21   좋아요 0 | URL
이거 몇 달 전에 120페이지 정도까지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역시 역사는 나랑 안 맞아. 재미없어.. 이러면서 묵혔다가..
11월에 끝장내려고 어제 겨우 다 읽었어요. 마지막 부분은 너무 대충 대충 ㅋㅋㅋ
읽을 땐 각 나라별 역사도 자세히 알고 싶다 생각 들지만 막상 역사 책에 손이 잘 안가요.
역사 과학 왜 이렇게 싫죠???

다락방 2023-12-01 11:41   좋아요 1 | URL
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역사 과학 다 싫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장. 대영제국, 지구 끝까지 팽창하다
대영제국이라고 말하였는데, 제국이라면 보통 한 명의군주 또는 지배 집단이 여러 언어를 사용하거나 문화적배경이 다양한 다민족을 다스리는 국가다. 제국의 맨 꼭대기에는 흔히 ‘황제‘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영제국은 황제 국가를 자칭한 적이 없었다. 대영제국은 ‘모국’인영국과 그 통치를 받는 여러 식민지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지구적 차원의 제국으로 부상한 것은1783년부터였다. 그때부터 영국은 서인도 제도를 포함해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 P171

다음 세기에는 백년전쟁(1337~1453)이 일어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장기간 대치했다.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는 프랑스로 건너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지루한 그 전쟁이 끝났을 때는 겨우 칼레 하나만 잉글랜드령으로 유지되었다. 1558년에는 그마저도 프랑스 소유가 되었다. 1500년경의 영국은 그리 대단한 나라가 아니어서, 나라 밖 영토라고는 아일랜드의 해안과더블린 교외뿐이었다. - P175

미국독립전쟁은 영국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식민지로 그들의 독립은 근대적 공화국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명백하였으니, 흑인 노예와 원주민은 아무런 자유를 얻지 못하였고백인 시민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도 못했다. 2020년에 백인 경찰이 무고한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사건과 같은 일이여전히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을 보면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한 것 같다.
그런데 미국이 독립하였다고 해서 대영제국의 성장이 멎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멀리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호주와 뉴질랜드 등 새로운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영국은 미국이라는식민지를 잃은 대신 새로운 식민지 건설에 국력을 쏟았고, 그 성과도 컸다. - P179

대영제국의 전성기는 어떻게 왔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영국의 물리적인 힘이다. 이것은 정치 및 군사 제도와 직결된 것으로, 그 중심에 의회와 해군이있었다. 특히 군사력이 약하면 제국의 위력은 아예 성립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국의 강력한 해군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을 세계 대제국으로 이끈 또 다른 힘은 무형의 자산에서 비롯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혁신 및 산업혁명이 결정적으로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P191

영국에서 의회가 정치적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증명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양원제를 선택하였는데, 고대 로마의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상원은 성직자와 귀족으로 충원하였고, 하원만 시민들 가운데서 뽑았다. 훗날 이 제도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미국으로 전파되어 민주주의의 전형이 되었다. - P194

긴 흐름에서 볼 때 자유주의는 영국 역사에 크게 이바지한 사상이었다. 만약 자유주의가 아니었더라면, 영국의 의회주의는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세계 여러 나라 간의 무역 활동에서 역시 자유주의가 있었기에 보호주의를 차단하거나 지연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는 산업화가 세계 각국으로 확산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 P498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여기서는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① 농업 생산력의 향상, ②인구의 증가, ③ 기술상의 진보, ④ 지리적 이점, ⑤ 사회간접자본의 발달, ⑥ 영국의 세계 지배, ⑦ 정치적 안정이 그 이유로, 각각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 P204

영국의 쇠락을 과학기술과 국가 정책의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과학기술의 부진이었다. 영국은 강철과 전기를 위주로 전개된 제2차 산업혁명 때부터 경쟁국인 미국과 독일 등에 크게 뒤처졌다. 제2차 산업혁명의 총아는 자동차와 전신전화 등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신기술이 폭발적으로 등장해전기, 통신, 자동차 산업 등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에큰 변화를 일으켰다. 미국의 포드와 독일의 폭스바겐 등 거대 기업이 세계경제의 판도를 재편하며, 숨 가쁜 기술혁신으로 경쟁을벌였다. 영국은 이러한 산업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했다. 핵발전소 건설을 주축으로 일어난 제3차 산업혁명과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제4차 산업혁명에서도, 영국은 별로 인상적인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영국의 국가적 위상이 점점 추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는 정책의 실패라고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영국은 이미 중등교육에 실패하였다. 세계의 주요국 중에서도 학생들의 중도 포기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영국이었다. 국가의 통합도 온전하지 못해 조금만 틈이 생겨도스코틀랜드는 분리독립을 꿈꾸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제2차 세 - P218

계대전 이후 영국은 정치적으로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았다. 심지어 영국을 부흥시킨 정치가라고 일반이 호평하는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 노선조차 공적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많았다. 지난수년 동안 세계인의 걱정거리였던 브렉시트 사건도 그와 같은 장기 침체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은 유럽연합의 통합을 반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정을 내린 것인데, 유럽 사회에서는 영국을 비판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영국이 자국의 미래를 스스로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염려한다. 영국은 어떤 이유로 유럽 통합을 끝끝내 반대하고 고립을 선택한 것일까. 역사적 맥락에 답이 있는 듯하다. - P219

5장. 불가사의한 독일제국의 역사
독일의 정치적 비운은 1945년 히틀러가 패망할 때까지 100년가량 이어졌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가 가까스로 독일 통일을 이루었으나, 빌헬름 2세는 유능한 비스마르크를 몰아내고 전쟁 준비에 매달렸다. 그 결과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처절한 패배를 떠안았다. 이후 바이마르공화국을 거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은 또다시 전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다시 위험에 빠뜨렸고, 유대인 게토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수백만 명이나 생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이렇듯 독일의 정치사는 총체적인 파탄을 방불케 하였고, 자국은 물론이고 이웃 나라에, 아니 인류사회에 크나큰 해악을끼쳤다. - P241

루터가 주도한 독일의 종교개혁은 성서 중심의 신앙 운동이었다. 그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복음에 절대적인권위를 부여하였다. 여기서 루터의 종교적 주장을 자세히 소개할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끝내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국제적인 종교전쟁을불러와 유럽 사회가 양분되었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교회 개혁을부르짖은 자신의 주장이 그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전쟁까지 치르고 나서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등한지위를 얻었다. 이에 성경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독점적인 해석도권위를 잃었다. 깊은 충격에 빠진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부 개혁을 서두르는 한편, 신대륙과 아시아를 상대로 선교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먼저들어온 역사적 배경이 그것이다. - P243

프랑스혁명은 1789년에 시작하여 1799년까지 10년 동안이나계속되었다. 이로써 절대주의 국가가 폐지되었고, 계몽사상가들이 강조한 인간의 기본 가치가 실천에 옮겨졌다. 또 그 사상이 국경을 넘어 유럽 각국에 전파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혁명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1789~1791)는 시민의 자유를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시기였다. 2단계(1792~1794)는 급진적인 민주공화국이 출범한 시기였다. 반혁명세력을 과감히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포정치가 시행되었다. 3단계(1795~1799)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반영하면서 혁명이 보수화되는시기였다. 이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해 유럽 각국에서 혁명전쟁을 수행하였다.
프랑스혁명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후세는 이 혁명을 두고 다양한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수정주의적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틀림없는 사실은, 이 혁명을 계기로 민주 공화제가 역사의 대세로차츰 굳어졌다는 점이다. 독일이든 한국이든 현대 세계의 모든 국가는 프랑스혁명의 계승자라 하여도 무방할 정도다. 이처럼 정치이념이란 인류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있다. - P252

우리는 빌리 브란트라는 독일 총리를 기억한다. 그의 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 유명한데, 1970년 12월 7일 초겨울에 찍은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였고, 브란트는 폴란드를방문 중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앞에서 양 무릎을꿇고 사죄하였다. 본래는 화환을 바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 P280

몇 년 전만 하여도 상황은 달랐다. 대공황(1929~1930)이 시작되기 전, 나치당은 이름 없는 극우 정당이었다. 1928년 5월 20일당시 나치당의 득표율은 고작 2.6퍼센트였다. 그보다 4년 전에는3퍼센트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도무지 인기 있는 정당이라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사회는극도로 불안해졌고, 정계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1930년 독일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대공황으로 수백만 명이실직하자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이 겪은 수모와굴욕을 떠올리며, 바이마르 정부의 우유부단한 통치를 비판하고나섰다. 시민들은 자국의 경제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곳곳에서분노가 폭발하였다. - P288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아는 대로 히틀러는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어 총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 정치를 포기한 보수 정치 - P290

가들의 야합 덕분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보수파는 군주제의 회복을 내심 바랐으나, 집권한 지 2년 만에 히틀러와 나치당은 보수파를 모조리 몰아냈다. 히틀러는 전권을 장악하고 나치당 일당독재를 강화하였다. 이것은 비단 독일만의 비극이 아니라, 유럽과 전지구가 파국을 맞는 출발점이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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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읽기는 왜 이리 재미없는지.
두 달만에 다시 잡았더니 읽다 만 앞 부분 다시 읽느라 도돌이표다....



저자의 글. 왜, 제국의 역사를 말하는가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역사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밀물이 있는가 하면 썰물이 있다. 흥망성쇠는 마치 자연현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두 개의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일어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바꿔놓았을까. 혹시 하나의 제국이 성장하고 붕괴하는 것은 생태계의 철칙일까. 우리는 지금 긴 역사의 흐름에서 어떠한 좌표에위치하는 것일까. 교양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무엇일까. 제국의 역사 앞에 서면, 이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바로 그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썼다. - P13

1장. 사상 최초의 초강대국 로마제국
고대 로마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 데는 세 가지 동력이 있었다. 전쟁과 인물 그리고 로마 특유의 사회제도였다. - P31

좋든 싫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황제는 누구일까. 우선 다섯 명의 이름이 떠오른다. 첫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로, 로마에서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브리타니아(영국)를 정복했다. 둘째는악명 높은 네로 황제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굴다가 어머니와 아내까지 살해하였고 수천 명의 기독교 신자를 사자의 먹이로 만들었다. 셋째는 트라야누스 황제로, 그는 탁월한 정복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에 로마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다. 넷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 앞서 말하였듯 통치의 편의를 위해 로마를네 제국으로 나누었다. 다섯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그는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다. 분할된 제국을 재통합하였고, 동쪽의 유서 깊은 소도시 비잔티움을 또 하나의 수도로 선택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다. 이들 황제야말로 로마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 P40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다음에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지중해동부를 호령하였다. 그러다가 7세기부터는 이슬람 제국이 등장해새로운 패자가 되었다(움마야드 왕조). 그렇게 수 세기가 흐른 뒤에는 오스만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그들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고, 그때부터 19세기까지 지중해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 P58

5세기 후반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였다. 그러자 서유럽의 대부분지역에서는 무역량이 줄었고 도시도 크게 위축되었다. 기술의 진보도 멈추었다. 현대 미국의 역사가 이언 모리스는 로마의 몰락을가리켜 인류 문명이 겪은 역사상 최악의 좌절이라고 주장했다. - P61

마지막으로, 로마의 몰락에 관한 또 한 가지 설득력이 있는 이론을 소개한다. 영국 역사가 폴 케네디는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를 연구한 학자로, 제국의 역사에서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국운이 상승할 때 영토를 무리하게 확장하다 보니 경제적 부담이과중해져 끝내는 국운이 하강 곡선을 그렸다는 것이다. 요컨대케네디는 제국의 쇠망을 결정하는 요인이 재정의 고갈이라고 설 - P74

파한 셈이다. 어떤 제국이라도 지나치게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노라면 재정능력이 한계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한 탁견이다. - P75

2장. 몽골제국, 너무도 짧았던 영광
오늘날까지도 많은 한국인은 몽골제국을 야만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역사를 잘못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은 - P92

형편없는 오랑캐요, 고려가 그들에게 무릎 꿇은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배운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애국심과 충정은 이해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몽골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13~14세기를 돌이켜 보라. 세상에 존재한 그 어떤 나라가 몽골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고려가 몽골의침략을 견디고 30년 넘게 항전한 것, 이것이야말로 후세가 높이평가해야 할 점이다. 그 나름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알다시피 몽골은 기병 중심의 전투를 선호하였으며, 원정 사업을 벌일 때마다 이슬람 상인이 병참 등을 제공하였다. 그런데고려는 산악이 많은 지형인 데다 이슬람 상인이든 누구든 외부인이 몽골군을 따라와 지원하기에 너무도 먼 곳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몽골의 침략에 비교적 유리하게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 P93

결국에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모험적인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을 손에 들고 동방무역의 꿈을 키웠다. 크리스토프 콜럼버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 책의 애독자로서 동양으로 가는 직항로를 개척하는 데 사실상 목숨을 걸었다. 만약에 폴로의 책이 없었더라면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스페인 세비야에는 콜럼버스가 애독한 <동방견문록》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 줄도 긋고 메모도 남겼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야말로 15세기 말에 시작된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가져왔다고말해도 좋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 P107

3장. 동서 교차로의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성장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로마 그리고 몽골제국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었다. 뛰어난 전략가 메흐메드 2세뿐 아니라 문예 부흥을 가져온 술레이만 1세도 정복군주였다.
그러나 종교를 너무 중시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슬람화가 깊숙이 진행되자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낙후하였다. 여기에 군주들의 정복욕이 지나쳐 군사 비용을 과도하게 지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지배층의 내분이 겹쳤다. - P131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유럽 각국이 앞다투어 대포를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기사가 지배하던 중세가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 사건은 오스만제국에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 P136

이후 그들은 18세기까지 유럽 남동부의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패권 다툼을 벌이며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역사학계에서는 그 시절을 ‘터키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오스만제국은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타국보다 병력이 많은 데다가 성능이 뛰어난 대포를 가졌다. 그들은 신무기와 새로운 병법 덕분에 당대 제일의 공격적인 군대를 보유한 것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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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만을 읽을 시간
서울중국어교사회 지음 / 민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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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크기의 1/3 밖에 안되는 대만에 무려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이 260여 개나 있다니! 트래킹 가고 싶다! 우리나라 만큼이나 굴곡진 역사의 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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