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 읽기는 왜 이리 재미없는지.
두 달만에 다시 잡았더니 읽다 만 앞 부분 다시 읽느라 도돌이표다....



저자의 글. 왜, 제국의 역사를 말하는가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역사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밀물이 있는가 하면 썰물이 있다. 흥망성쇠는 마치 자연현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두 개의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일어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바꿔놓았을까. 혹시 하나의 제국이 성장하고 붕괴하는 것은 생태계의 철칙일까. 우리는 지금 긴 역사의 흐름에서 어떠한 좌표에위치하는 것일까. 교양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무엇일까. 제국의 역사 앞에 서면, 이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바로 그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썼다. - P13

1장. 사상 최초의 초강대국 로마제국
고대 로마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 데는 세 가지 동력이 있었다. 전쟁과 인물 그리고 로마 특유의 사회제도였다. - P31

좋든 싫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황제는 누구일까. 우선 다섯 명의 이름이 떠오른다. 첫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로, 로마에서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브리타니아(영국)를 정복했다. 둘째는악명 높은 네로 황제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굴다가 어머니와 아내까지 살해하였고 수천 명의 기독교 신자를 사자의 먹이로 만들었다. 셋째는 트라야누스 황제로, 그는 탁월한 정복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에 로마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다. 넷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 앞서 말하였듯 통치의 편의를 위해 로마를네 제국으로 나누었다. 다섯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그는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다. 분할된 제국을 재통합하였고, 동쪽의 유서 깊은 소도시 비잔티움을 또 하나의 수도로 선택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다. 이들 황제야말로 로마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 P40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다음에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지중해동부를 호령하였다. 그러다가 7세기부터는 이슬람 제국이 등장해새로운 패자가 되었다(움마야드 왕조). 그렇게 수 세기가 흐른 뒤에는 오스만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그들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고, 그때부터 19세기까지 지중해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 P58

5세기 후반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였다. 그러자 서유럽의 대부분지역에서는 무역량이 줄었고 도시도 크게 위축되었다. 기술의 진보도 멈추었다. 현대 미국의 역사가 이언 모리스는 로마의 몰락을가리켜 인류 문명이 겪은 역사상 최악의 좌절이라고 주장했다. - P61

마지막으로, 로마의 몰락에 관한 또 한 가지 설득력이 있는 이론을 소개한다. 영국 역사가 폴 케네디는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를 연구한 학자로, 제국의 역사에서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국운이 상승할 때 영토를 무리하게 확장하다 보니 경제적 부담이과중해져 끝내는 국운이 하강 곡선을 그렸다는 것이다. 요컨대케네디는 제국의 쇠망을 결정하는 요인이 재정의 고갈이라고 설 - P74

파한 셈이다. 어떤 제국이라도 지나치게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노라면 재정능력이 한계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한 탁견이다. - P75

2장. 몽골제국, 너무도 짧았던 영광
오늘날까지도 많은 한국인은 몽골제국을 야만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역사를 잘못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은 - P92

형편없는 오랑캐요, 고려가 그들에게 무릎 꿇은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배운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애국심과 충정은 이해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몽골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13~14세기를 돌이켜 보라. 세상에 존재한 그 어떤 나라가 몽골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고려가 몽골의침략을 견디고 30년 넘게 항전한 것, 이것이야말로 후세가 높이평가해야 할 점이다. 그 나름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알다시피 몽골은 기병 중심의 전투를 선호하였으며, 원정 사업을 벌일 때마다 이슬람 상인이 병참 등을 제공하였다. 그런데고려는 산악이 많은 지형인 데다 이슬람 상인이든 누구든 외부인이 몽골군을 따라와 지원하기에 너무도 먼 곳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몽골의 침략에 비교적 유리하게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 P93

결국에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모험적인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을 손에 들고 동방무역의 꿈을 키웠다. 크리스토프 콜럼버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 책의 애독자로서 동양으로 가는 직항로를 개척하는 데 사실상 목숨을 걸었다. 만약에 폴로의 책이 없었더라면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스페인 세비야에는 콜럼버스가 애독한 <동방견문록》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 줄도 긋고 메모도 남겼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야말로 15세기 말에 시작된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가져왔다고말해도 좋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 P107

3장. 동서 교차로의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성장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로마 그리고 몽골제국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었다. 뛰어난 전략가 메흐메드 2세뿐 아니라 문예 부흥을 가져온 술레이만 1세도 정복군주였다.
그러나 종교를 너무 중시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슬람화가 깊숙이 진행되자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낙후하였다. 여기에 군주들의 정복욕이 지나쳐 군사 비용을 과도하게 지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지배층의 내분이 겹쳤다. - P131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유럽 각국이 앞다투어 대포를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기사가 지배하던 중세가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 사건은 오스만제국에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 P136

이후 그들은 18세기까지 유럽 남동부의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패권 다툼을 벌이며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역사학계에서는 그 시절을 ‘터키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오스만제국은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타국보다 병력이 많은 데다가 성능이 뛰어난 대포를 가졌다. 그들은 신무기와 새로운 병법 덕분에 당대 제일의 공격적인 군대를 보유한 것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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