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짤막하게 변명하자면, 막상 사고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보니 세상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 밖에 없었기에 오랜 세월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한동안 정말 아슬아슬한 시절을 보냈다. 이제와 이 시절을 회상하면 당시의 나는 연습도 전혀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겁 없는 외줄타기 곡예사였다. - P96

그 조그만 애가 다시 몸을 웅크리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젤리 아니야"라며 울먹였다. 해서 곁에 앉아 "그럼 뭐 줄까?" 물었더니 "안아줘"라는 아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얼음장처럼 차가운 놀이방에서 작은 항아리 단지만 한 아이를 안고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맞다. 아이 말이 맞다. 젤리가 아니다. 사랑이다. - P103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대자의 존재보다 한 중세 철학자의 유명한 주장을 더 신뢰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세상이 이 지경일 리 없고, 세상은 이 지경인데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신이라면 그 신은 무능하거나 절대로 선하지 않은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가고 성당에 가도 번번이 "빛이 있으라"로 시작하는 <창세기>만 읽어도 화가 나, 《성경》을 탁 하고 덮고 뒤도 안 보고 돌아 나올 수 있었겠지.
절은 달랐다. 일단 절에서는 아무도 내 손을 덥석 잡지 않았으며, 누구도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선방에서도 자유로웠다. 보살님들의 대화에 끼고 싶으면 끼고 아니면 한구석에 누워 이불을 쓰고 자면 되었다. 아무도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았다. 또 새벽에 기도도량에 있으면 보살님들께서 따뜻한 핫팩과 홍삼캔디 같은 것을 말없이 건네주시기도 했다. 해서 당시에 교회보다 절에 끌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세상 어디에도 마음 붙일 데가 없으니 나도 모르게 자꾸 영적인 공간을 본능적으로 찾아다녔던 것 같다. - P141

불가에서는 마음과 몸을 절대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마음을 고치기가 어려우면 사람의 습관, 즉 몸에 밴 태도와 행동부터 고친다. 이런 의미에서 출가자들이 항상 유념하는 게 바로 하심下心이다. 하심이란 쉽게 말해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행동이다. 보통 절에 갓 들어온 행자승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수행법이다. 법당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먼저 합장을 하고, 시선은 늘 낮은 데를 향하고, 되도록 말을 아끼고, 누구보다 먼저 궂은일을 찾아 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하심을 단기간에 익히는 데는 단연코 절 수행이 최고다. 해서 다리에 전에 못 보던 근육이 붙을 정도로 절을 열심히 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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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 P4

불행히도 그 시절에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쳐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사랑과 고통은 철저히 별개라는 사실을, 이런 감정은 어느 한쪽이 무거워진다고 다른 한쪽이 가벼워지는 놀이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P26

아니,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불행에 대한 글은 쓰면 쓸수록 아프다. 세상에 아름다운 흉터는 없다. - P27

또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서사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그냥 바람이 불고 비가 오듯, 어떤 일들은 이유 없이 일어나. 우리네 인생도 그래. 이해하려 애쓰지 마. 그냥 받아들여. 깊이 고민하지 마. 그리고 명심해. 네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잊지 마. 시작된 모든 일에는 끝이 있어. - P55

그것은 바로 누구나 아주 편하고 쉽게 타인에게 상처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67

어른들 말씀처럼 살아만 있으면 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생이니까. 굳세게 마음먹고 불행을 맞이해야 한다. - P76

글을 쓰는 동안 어느 날은 잘해보고 싶고 어느 날은 도망치고 싶던 날들이 연속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일관되게 명확했다. 함부로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말라는 것과, 언제나 악한 것이 힘세고 빛나 보이지만 결국 선이 이긴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보기보다 힘이 세다는 것. 이것은 내가 이생에서 얻은 유일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나를 다치게 한 것도 세상이지만, 나를 치유한 것도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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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음식의 절반은 추억이다.
여행의 묘미는 반주지. ㅎㅎ 격하게 공감
스프 하나에 인생이 들어가 있다.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돈까스는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 홀 커틀릿 또는 포크 커틀릿으로 18세기 후반 일본에 전해졌고, 지금의 돈까스가 되었다. 그것이 또 우리나라에서 우리 식으로 바뀌어 경양식, 한식 돈까스가 되었다. - P36

린틴틴 나오는 음식에 비해 가격이 너무 싼 거 같아요.
신창호 우리가 조금 덜 가져가면 돼요. 종업원을 쓰면 이 가격을 유지 못 해요. 둘이서 그냥 하니까 되는 건데, 힘들죠, 이제. 경양식집이 재료비도 많이 들고, 그렇다고 아무거나 써서 할 수 있나. 내 입에 맞아야 손님한테도 내놓는 거지, 제 신조는 그래요. 그렇게 여태까지 해오긴 했죠.
린틴틴 그러니 조금 올리세요..
신창호 알아주는 사람은 아는데, 그거 알아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허허. 그럴거면 음식점 하지 말아야지, 그냥 술을 한 병 더 팔지. - P53

잠시후 따끈한 수프가 나왔고, 우유 맛이 나는 걸 보니 직접 만드는 듯하다. 맛있다. 수프를 직접 만드는 경양식집은 요즘 드물다. 생각보다 고된 일이어서(온종일 저어야 하니까), 손님이 많으면 그나마 양이 줄어드는 재미라도 있지만, 대체로 장사가 그럴 만큼 잘되지는 않으니까. - P56

오랜만에 보는 시금치나물, 몹시 반갑네. 내가 어릴 때는 가니시로 시금치 나오는 곳이 많았는데, 역시 음식은 절반이 추억이다. 그 옆으로 콘 샐러드, 베이크드 빈이 나란히 놓여 있다. - P58

메뉴가 쓰인 검은색 보드를 보는데, 소주도 판다. 돈까스와 함께 주문했다. 여행의 묘미는 반주지. - P63

뭐라도 더 팔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콜라도 주문한다. 좋아하는 마카로니 샐러드를 맛보고, 뜨거운 감자튀김을 살살 불어가며 먹었다. 주방에서 다시고기 두드리는 소리, 할머니의 수고스러움을 생각하니 가격이 너무 저렴하지만, 이 돈까스는 터미널을 오가는 군인들의 든든한 한 끼가 되어주겠지. 노부부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두툼한 돈까스와 샐러드, 튀김을 남김없이 모두 비우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드리며 계산하는데, 콜라 한 캔 값 천 원을 포함해 6천 원. 만 원 한 장 드리고 거슬러 받는 내 손이 부끄럽다. - P87

50년간 요리사라는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평생 주방에서 일하시는 사장님. 눈 감았다 뜨기도 무서울 만큼 빠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 그 50년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도 한가지 일을 해온 그런 시간이 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어쿠스틱 악기들.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은 50년 후에도 존재할까? 그럴 리가 없지. 커피 맛이 좋다. - P92

김희신 공이 들어가는 거라, 밀가루 볶는 게 거의 인생이에요. 맨 처음에 버터를 녹인 다음에 밀가루를 넣잖아요. 이제 그걸 반죽하듯이 약한 불에서 볶는데, 뻑뻑해요. 근데 그게 시간이 점점점점 지나면, 걔가 스스로 융해되듯이 팍, 녹아버려요. 아주 부드럽게….
문상민 그게 상상 초월이래니깐요. 상식적으로는 점점 더 빡빡하게 굳어갈 거같잖아요. 볶으니까. 근데 밀가루하고 버터하고 비등점에서 융해가 돼 버려요. 화합이되는 거지. 갑자기, 어느 순간. 그게 인생하고 똑같아요, 하하하.
김희신 거기서 욕심을 부려서 이제 좀 더 볶죠. 그럼 색깔이 갈색이 나버려요. 못 쓰는 거지. 한순간에, 그게 딱 인생이에요. 기다려야 되고, 참아야 되고, 놓치면 돌아오지 않고, 어떨 땐 지루해서 하기 싫거든요. 그래도 참아야 하니까, 인생이란 게.
문상민 다 치우고 싶지. 허허허허.
린틴틴 오뚜기 수프 쓰고 싶고,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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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배우님 바이크 뽐뿌질 엄청나다! 바이크의 매력에
빨려들듯!

트바움, 트위터를 하고 바이크를 타는 사람 또는 여성. 트바움을 기본형으로 하고 남성임을 강조하고자 하면 트바맨움이라고 부르면 되지. 트바움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그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움‘이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 자연스럽게 ‘움‘이라는 표현에 동의하는 사람들, 페미니스트들이 모이게 되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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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바이크 여행은 내가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매력이 있다는 말. 또 누군가는 바이크 여행은 점에서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지는 여행이라고 했다. - P46

바이크 여행은 달리는 시간이 내내 여행의 과정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열 시간을 견디는것이 아니다. 열 시간 동안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여행지까지의 길,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그것이 바이크 여행의 특별한 매력 그리고 내가 바이크를 사랑하는 이유다. - P46

그래서 내가 바이크를 타고부터 하고 다니는 말이 있다. 100년 전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바이크, 자기만의 차가 필요하다고. - P84

편견과 차별만 문제가 아니다. 바이크를 타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내몰린다. 나 또한 모터바이크 라이더로서, 도로 위에서 얼마나 이륜차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심한지도 생생히 느끼고 있다. 그리고 겪을수록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그 대상이 누구건 근간이 비슷하다는 걸 많이 느낀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친구의 말이 있다.
"근데 도로에서 운전하다 보면 오토바이가 앞에 있으면 거슬리긴 하더라." - P102

꽉 막힌 도로에서 정차한 차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가는 바이크를 보면 짜증이 난다고, 그래서 일부러 틈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얄밉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차간주행을 외국에서는 권장한다고 한다. 레인 스플리팅(lane splitting), 레인 필터링(lane filtering), 레인 셰어링(lane sharing)이라고 하는데 길이 막힐 때 이륜차가 차선을 차지하고 서 있기보다 차들 사이나 갓길로 뚫고 앞으로 나가주는게 교통 체증 해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륜차가 사륜차 사이에서 가려진 채 서 있는 것보다 앞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도 한다. - P106

어디 바이크뿐이겠는가. 휠체어를 타든, 유아차를 끌든, 치마를 입든, 문신을 했든, 가난한 나라에서 왔든 그것을 이유로 누군가로부터 배제되거나 위협받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 배제, 혐오,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사람을 슬프게 하는지 또한 바이크를 타고서 여실히 깨달았다면, 그래서 그걸 타파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졌다면 이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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