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아빠, 나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 P9

그곳

그곳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있었다. 누군가는 거기라고 했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짜 거기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뼈 있는 농담이 들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 우리는 만났지, 인사했지, 함께 있었지. 어떤 날에는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지. 죽자사자매달리기도 했지. 죽네 사네 울부짖었을 때, 삶보다 죽음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너나없이 그곳을 찾던 때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너와 나는 선명해졌다. 다름 아닌 다르다는 사실이 같은 취향을 발견하고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는 가까워졌다. 어쩜 잠버릇까지 일치하는지 몰라, 네가 말했을 때 너도 나도 흠칫 놀라고 말았지. 우리 사이에는 고작 그것만 남아 있었다. 내 앞에 네가 있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났다. 내남없이 갔어도 내가 남이 되어 돌아왔다. - P10

여기저기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져도 이냥저냥 살아갔다. 체면은 삶 앞에서 이만저만하게 구겨지기 일쑤였다. 이러저러한 사연은 이럭저럭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쿵저러쿵 뒷말만 많았다. 이심전심은 없고 돌부리 같은 감정만 웅긋중긋 솟아올랐다. 삶의ㅍ곁가지에 울레줄레 매달린 건 애지중지하는 미련이었다.

아무도 그곳을 부르지 않아서
그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P11

그곳

거울이 말한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형광등이 말한다.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

수도꼭지가 말한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치약이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변기가 말한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 P12

그것

아무것도 안 해도
늘어나는 것이 있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면
심장이 뛰었다
살아 있다는 확신이
어느 날
살려고 애쓰는 감각이 되어 있었다

반환점이 없는데
자꾸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식물원에 박물관에 놀이동산에
첫걸음을 했을 때가 있었다
식물의 이름을 몰라도
역사의 흐름을 몰라도
놀이와 게임의 차이를 몰라도
웃음이 절로 났다 - P48

기쁨은 기꺼움이
기꺼움은 다시 메스꺼움이 되었다
결승점처럼 확고하게

학교에 가던 발이
회사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자국이 남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발가락을 잔뜩 오므렸다
골목에서조차 그림자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난생처음 가는 곳이 줄어들지 않았다
백 미터 안 곳곳에 요철이 있어서
픽픽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늘어나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흘러내린 표정을 다시 세웠다 - P49

눈썹과 입꼬리를 추켜올리고
양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백 미터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오래달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웃으면서 발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건은 미결 상태로 남을 것이다

선을 긋지 않으면
하늘에서 번개 같은 빗금이 쏟아졌다

몸을 사리고
마음을 가리고
가까스로
체면을 차리고 있었다 - P50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 누구나 휴대전화를 뒤져보면 한 명쯤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김이 아니라면 확률은 높아지겠지 그는 이룰 성에 참 진을 쓴다 아마도 성진의 대부분은 참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다 이룬것은 없지만 김성진은 오늘 친구들을 만난다 벚꽃 피고 첫 점심 약속이다
만나는 친구 한 명의 성은 성이다 성이 성이다 다른 한명은 진이다 모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김성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만이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우정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 착각이다 애초에 이들 셋 사이에 우정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김성진 모임의 구성원들이 모였다 을지로입구역 6번출구였다

이쪽에 맛집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디서?
블로그에서
그게 들은 거냐? 본거지 - P92

먹고 이야기하자
뭐 먹을까?
먹고 이야기하자
뭐 먹을지를?
아니, 뭐 먹지?
근데 여기 명동인데?
을지로 아니고?
을지로 입구가 명동인가 보지
그래서 맛집이 많나 보다
그럼 을지로가 명동보다 큰 거야?
골목이 더 많네
이러다 점심 먹겠어?
그나저나 점심 먹고 우리 뭐 해?

그의 이름은 김성진이다 참을 이뤄야 하는데 골목 어귀에서 점점 진실과 멀어지고 있었다 모임의 이름 또한 김성진이다 김이 새고 성이 나고 진이 빠지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고 있었다 - P93



그는 웃음의 대명사로 불렸다 잘 웃어서였을까, 잘 웃겨서였을까 어느 순간, 그는 웃음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서글서글한 얼굴의 모공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흘러나올 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은 삽시간에 좌중을 압도해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웃다 보면 때가 아니었다 장소가 빗나갔다 경우에 맞지 않았다 장례식장이 일순 축제 현장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웃음의 대명사로 입장했지만, 번번이 민폐의 대명사로 퇴장했다

사람은 명사다 너는 대명사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큰 명사가 아니라 그저 대신하는 명사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질투하고 질타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웃는다는 이유로, 똥오줌 못 가리고 웃는다는 이유로 그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아무 데서나 물색없이 웃는 이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즉각 그를 소환했다 평소와 같이 그가 웃을 때 - P97

면 이런 말이 날아들었다 좋아? 살 만해? 만족스러워? 그가 웃길 때면 이런 말이 메다꽂혔다 우스워? 웃음이나? 만족스러워? 평소와 다르게 물속에서도 만족은 녹지 않았다 불 속에서도 만족은 타지 않았다 오줌 앞에서도 똥 앞에서도 만족은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사람은 고유명사로 태어나 보통명사로 살아간다
제 이름을 대신하는 명사로 분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해서 허허 웃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눈치 없이 실실 웃는 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햇반처럼, 대일밴드처럼, 초코파이처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중에 넣을수 있었다 서울처럼, 지프처럼, 스크루지처럼 친하지 않아도 친근하게 들렸다 갈 수 없어도, 가지거나 만나지 못해도 섭섭지 않았다 그저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되었다 명사는 대체되지 않았기에 그의 이름은 하염없이 낡아만 갔다 그는 보통명사에서 추상명사가 되었다 사랑처럼 흔하고 희망처럼 귀하지만 삶처럼 끝끝내 막연 - P98

했다 없음의 대명사처럼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그는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똥오줌을 못 가렸기에 아기처럼 자연히 의연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때 그는 웃음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웃느라 한 말에 감히 초상이 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 P99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 갔다

혼자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었다가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부끄러운 것이었다가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마침내
혼자여서 편한 것이 되었다

화장실 거울은 잘 닦여 있었다
손때가 묻는 것도 아닌데
쳐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 P134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볼꼴이 사나운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웃지 못할 이야기처럼
웃다가 그만 우스꽝스러워지는 표정처럼
웃기는 세상의
제일가는 코미디언처럼

혼자인데
화장실인데

내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었다 -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7편, 이 시들은 녹평시선 1
김명수 지음 / 녹색평론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녹색평론사의 첫 시집. 김명수 시인의 시 중 가장 좋았던 시는 <강6>. ‘모든 사물들은 다 말을 하고 있단다. 그 말을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지.’ 시인은 뒷냇물이, 살구꽃이, 보리밭이, 종달새가 걸어오는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구나. 나는 그 말을 언제 들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1
에밀리 디킨슨 지음, 강은교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독과 허무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시. 길 위의 돌멩이의 삶을 부러워하는 시인. 그녀 시의 그많은 대시(-)는 어떤 의미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1-12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예요. 어찌나 대시가 많은지.... ㅎㅎ 그래서 뭔가 에밀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얘기처럼 읽히기도 하더라구요.

햇살과함께 2022-11-12 22:37   좋아요 1 | URL
저는 뭔가 할 말이 더 있는데 생략하는 듯? 말줄임표 같은 느낌도 들더라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