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공감과 소통을 원합니다. 그런데 간절히 이해받고 싶고, 타인과 대화를 원하고, 자기 삶을 해명해야하는 쪽은 대개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삶과 기존의 언어가 일치하지만,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는 그 두가지가 불일치한다는 것. 그렇다면 사회구조적 약자든 인간관계에서의 약자든(예를 들어 사랑하는 관계에서) 누가 더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까요? 어려움을겪을수록 소통에 대해 고민하고 할 말이 많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이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약자는 말에 예민합니다. 소통과 새로운 언어 만들기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 P12
차이를 드러내고 다르게 말하는 것,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말하기, 새로운 언어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 소통의 실마리도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 같은 것은 없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고, 목소리들이 있었겠죠. 모든 책은 다시 쓰여야 합니다. - P17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개념들은 모두 백인 남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를 자각하고 일상에서 억울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사실과함께 "언어의 본질은 권력관계"라는 사실은 평생 각성해야 할유일한 두가지 진실이지요. - P17
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화가 평화라면, 그것은 조용한평화가 아니라 격렬한 평화입니다. 서로의 전압이 충돌하고, 말 - P36
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 상대를 회피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견디는 상태. 다름을 지탱하는 대화. 저는 그런 의미의 대화만이평등에 가깝고 윤리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P37
혐오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외칩니다. 혐오 표현을 금지하려고 하면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반박하죠. 이들을 설득할 방법도 필요도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과정의 산물입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비해 약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비판하고 말할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는 국가와 개인 혹은 사회적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등장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표현의 자유는 역전된 방식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P44
거듭 말씀드리지만 페미니즘의 목적은 가부장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모순을 극대화하고 틈새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와 공존합니다. 물론 가부장제도 여성주의와 공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죠. 그렇지 않은 사회를 우리는 파시즘, 전체주의체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 일부의 여성주의에 대한 적대와 여성 혐오는 여성의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 P81
페미니즘은 자신이 어떤 여성인지 사회적위치성을 드러내고 그 인식의 부분성을 인정하는,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몇몇 여성이남성의 세계에 진입할 수는 있어도, 페미니즘은 주류 사상이 될수 없습니다. 페미니즘은 아무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 ‘가장 느‘린 정의‘를 지향합니다. - P83
소통이 ‘자기알기‘에 대한 공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과정을 ‘성찰省察)‘이라고 부릅니다. 영어reflexive의 우리말 번역어가 성찰인데 재귀(再歸)라는 뜻도 있지요. 재귀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성찰보다 재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요. 여기서 재귀는 우리가 -self라고 부르는 재귀대명사의 그 재귀입니다. 재귀에는 성찰의 의미도 있지만, 자기만의 세계, 자기충족적(self-fulfillment) 삶을 뜻하기도 합니다. - P90
그러므로 보편의 상대어는 특수가 아니라 차이이고, 예술과 사회운동은 기존의 차이를 문제 삼으면서 보편을 해체하고 경계를 재구획하는 행위입니다. 한때"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슬로건이 유행했지만, 이는 곧바로 비판받았습니다.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은 누가 나누는가? 서구는 글로벌이고 비서구는 로컬인가? 그래서 ‘글로컬‘이라는 협상어가 등장했지만, 이 역시 글로벌과 로컬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지요. - P97
가족 안에서도 돌봄의 비중, 경제력의차이, 나이와 젠더, 심지어 건강 상태에 따라 힘의 저울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인간관계, 연애관계는말할 것도 없습니다(‘친밀성‘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intimacy는 ‘위협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intimidate의 명사형입니다. 교제폭력이 친밀성의 이중적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상하 위계와 이해관계에따라 우리의 언어는 상대 앞에서 시시각각 그 모양을 바꿉니다. - P132
탈식민주의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라는 질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탕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는 지금의 나로서는 끝내‘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 서늘한 이해불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이 소통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단단한 보호막이 될 수 있습니다. - P183
우리는 흔히 대화의 목적을 소통이나 합의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도 아니고 바람직한 현상도 아닙니다. 대화의 목적은합의도 맞대응도 아닌 제3의 목소리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언어도단과 교착 상태에 있던 언설의 자장(場)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모색하는 것이 대화죠. 모든 대화는 기존의 논리를 뛰어넘는 변증(辨證)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대화, 즉 서로의 차이와 적대를 확인하고 증폭시키는대화는 무의미합니다. - P203
극우는 설득 대상이거나 투쟁의 대상도, 더구나 이 세상에서사라져야 할 이들도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은 비판해도 존재를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맑스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배제 없는사회라면, 공존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죠.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갈등 상황을 견디는 힘입니다. 새로운말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희망하면서말입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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