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외주가 앗아가는 것들

이 변화는 단순히 AI라는 도구를 써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도구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도구가 대신 지나가버린 ‘인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AI에게 번거로운 ‘일‘을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이 자라나야 할 가장 고통스럽고도 귀중한 구간을 조금씩 밖으로 넘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료를 찾는 수고, 상충하는 정보를 비교하는 지루함,
숫자를 직접 계산하며 느껴보는 불편함, 문장을 수차례 고치며 논리를 다듬는 고독한 시간. 겉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버려지는 시간 같지만 인간을 자라게 하는 거의 모든 것은 대개 이런 비효율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 P17

직접 통과한 경험에서 오는 감각, 틀린 뒤에 다시 고쳐 세우는 복원력,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내 이름으로내놓는 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적 확신입니다.
그때 AI는 누구에게는 성장의 폭발력을 더해주는 ‘근육‘이 되지만 누구에게는 평생 스스로 걷지 못하게 만드는‘목발‘이 되고 맙니다. 진짜 격차는 AI를 쓰는 사람과 쓰지않는 사람 사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차이는 AI를 통해자기 사유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사람과 AI에게 사유의 주도권을 조금씩 양도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 P22

니다. 이 과정이 반복될 때 우리의 ‘안쪽‘은 비로소 단단하게 확장됩니다. 기술이 인간의 바깥을 확장하며 효율을 극대화할 때 철학과 인문학은 ‘왜 확장해야 하는가‘와 ‘어디로가야 하는가‘라는 내부의 엔진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보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 무엇을 원하는지(욕망), 그리고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윤리)를 끊임없이 묻고 언어화할 때우리는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기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로 설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손에 쥐고 있어도 우리는 기술이 설계한 세계를 관성적으로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기술이 바깥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내면의 깊이를 응시하며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를 찾는 일입니다. - P67

AI 시대에 판단의 장치를 만드는 것은 속도를 늦추는연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미 답이 너무 빨리 도출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질문을 던지면 몇 초만에 구조화된 결론이 돌아옵니다. 흠 없이 정렬되어 있으며, 반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판단은 그 매끄러움 위에서 곧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멈춤은 고도의 인지 에너지를 소모하는 뇌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멈춤의 시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 Negative Capability, 부정적 수용 능력입니다. 영국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확실한 근거나 이유를 찾으려 서두르지 않고,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심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가, 내가 놓치고 있는 변수는 없는가, 지금의 선택이 어떤 파장을 만들 것인가. 이 짧은 멈춤의 시간이 판단의 출발점이 됩니다. - P69

판단의 장치를 구축하는 두 번째 단계는 선택의 이유를 언어로 설명하는 훈련입니다.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결정은 쉽게 흐려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순간, 비어 있던 전제가 드러나고 감정과 욕망이 섞여 있던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왜 이 선택에 끌렸는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했는가. 이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나는무엇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짧게라도 정리해보는 과정이 판단의 회로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은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설명을 통과한 선택은 비로소 나의 기준을 형성합니다.
세 번째는 결과를 감당하는 경험을 피하지 않는 일입니다. 판단은 이론 속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실제 결과와만나야 비로소 정교해집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그 실패를 구조적으로 복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 P70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불편함을 견디는 힘입니다. 우리는 흔히 빠르게 답을 찾는 능력을 실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태를 잠시 유지할 수 있는능력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모르겠다‘는 상태를견디지 못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제시된 그럴듯한 답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나 판단은 확실성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AI는 이 불확실성의 시간을 압축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장치를 유지하려면 의도적으로 여지를 남겨두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즉각적인 결론을 유보하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고, 반대 근거를 일부러 탐색하는 태도 말입니다. - P71

반대로 경험이 제한된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재료 자체가 적습니다. 뇌가 재조합할 기억과 감정의 조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틀 밖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이때 AI가 제시하는 결과는 매우 그럴듯한 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AI가 학습한 과거의 평균값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험이 필요할까요.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있습니다. 뇌가 불편해지는 경험, 예측이 어긋나는 경험,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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