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1956년 10월 7일
나의 사랑 테디에게
찬란하게 흐린 아침・・・・・・ 지난밤 한 시간대가 주는 달콤한 선물. 매일 이럴 수는 없을까? 자닌, 디나, 제스, 다리까지 여자 신입생들은 모두 아침을 먹은 뒤 성경책으로 단단히 무장하고는 예배가 마치 버스라도 되듯 놓치면 안 된다고 재잘거리면서 교회로 몰려갔어. 나는 무신론자의 커피를 석 잔째 마시며 친구들을 향해 자애로이 웃어 보이고는 실존주의자의 달걀을 먹었지. 다들 착하지만, 아, 맙소사, 너무 어려. 너무어리다고 스무 날만 지나면 스물네 해도 끝나고 스물다섯 해를 맞이하겠지. 이렇게 말하면 잔인할 수도 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사반세기가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이야. 오, 주님, 나머지 칠십오 년은 해가 뜨건달이 뜨건 폭풍우가 불건 피바람이 휘몰아치건 주님의 영광으로 복되게 해주시옵소서. - P17
저 너머 강가에 앉아 소를 그리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그랜체스터로 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어. 이 이질감, 참 낯설어서 움츠러들게 돼. 당신이 경찰이나 여학생을 볼 때 그런 것처럼 말이야. 오롯이 나만의 열정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세상 사람들이 온통 손가락질하는 괴물 석상이 되는 기분이야. 난, 그저 혼자 있는 게 좋아. 독약 피하듯 사람들을 피하게 돼.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게 그저 싫어. 그런데도 난 책상에 앉아서 갓 입학한 여학생들이 끝없이 묻는 질문에 일일이 대꾸를 해주고 있어. 이상한 사실은 그러다 보면 어느덧 내가 꽤나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사람들을 웃기고 있다는 거야. 아무렇지도않은 듯 이렇게 사무적으로 일도 잘 처리하고, 감쪽같이 정체까지 숨긴채 성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내가 경탄스러울 따름이야. 착한 친구들도꽤 있어. 친절하고 예쁘고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지.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난 마치 빙하기와 노아의 홍수를 이겨낸 억겁을 살아온 여자 족장이 되는 기분이야. - P19
1957년 8월 21일 일기
푹푹 찌는 울적한 날. 하늘은 백광으로 찬연하다. 이달 생리는 꼼짝없이 엿새나 한다. 멈췄다가도 다시 나온다. 엘리 제임스와 사랑에 빠졌다. 『정글의 야수Beast in the Jungle]를 읽다 보내 강의에 대한 두려움이싹 가셨다.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글을 향한 사랑이 다시 뜨거워졌으므로 첫 주가 최악이겠지만 구월 초하룻날부터 한 달 계획을대략 짠 뒤 차근차근 강의 준비를 하면 다시 도서관에서 책 읽을 여유가 생기겠지. 그러니 이제 그만! 강의의 구체성에 기분 좋게 익숙해지면내 삶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거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경험도 쌓고 다양한 학생들도 만나고 구체적인 문제에도 맞닥뜨리고. 현실과 실제에 뿌리내린 삶의 복된 이면과 윤회. - P79
옮긴이의 말
흑백의 선이 주는 울림
치열하지만 따듯하다. 온 삶을 바쳐 시를 지었듯 플라스는 열정적인펜 놀림으로 찰나적으로 빛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겨 담는다. 시 「아빠」에서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고 피 끓는절규를 토해내는 플라스의 모습을 그림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세상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플라스를느낄 따름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때론 아련한 향수로, 때론 깜찍한 웃음으로, 때론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날 선 시어를 자아내는 고통의 제의가 끝나면 플라스에게도 지친 영혼을 위무할 그 무엇이 필요했으리라. 플라스는 그림을 통해 글쓰기의 고뇌는 물론이고 삶의 분노와 절망, 비애를 잊고 몰아의 순간을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들레 꽃잎에서도, 모래 한 알에서도 ‘영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랑스러운 플라스가 그의 그림에는 오롯이 담겨 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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