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요즘 자주 보는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벨 훅스 <페미니즘>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또 만난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이 챕터 제목에 연관된 아마 아타 아이두 <분위기 깨는 우리 자매>
읽고 싶은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반가운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처음 들어본 안드레아 레비 <레몬 열매>
제목만 들어본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또 보고 싶은 영화 [디 아워스]

와, 읽고 싶은 레퍼런스가 많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에서 행복한 미국 가정주부의 이미지 뒤에 숨어 있던 것을 환기함으로써 이름 없는 문제를 찾아낸다(Friedan 1965:19-20). 이 이미지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종기처럼 터져 버리면서 그 환한 미소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감염 부위가 드러난 것이다. 프리단은 이런행복이라는 공적 판타지가 지닌 한계를 폭로하며 논의를 진행한다. 행복한 주부는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노동의 흔적을 지워 버리는 판타지 형상이다. 여성들은 행복하며 이 행복은 그들이 하는 일의 이면에 존재한다는 주장은 젠더화된 노동 형태를 자연이나 법, 의무의 산물이 아니라 집단적 소망과 욕망의 표현으로 정당화한다. - P95

벨 훅스는 ‘페미니즘』에서 행복한 가정주부는 판타지로 간주될 때조차 다음과 같은 배타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프리단이 여성성의 신화』를 썼을 때, 전체 여성들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노동자였다. 많은 여성들이 전업 주부가 되고 싶어 했으나, 여가 시간과돈이 있는 여성들만 여성성의 신화 모델에 맞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hooks 2000: 2[23]). 가정주부들의 불행에 대한 프리단의 해결책 - 그들이 집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ㅡ은 여성성의 신화에 걸맞은 정체성을형성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훅스가 지적하듯이 "프리단은 자신과 같은 여성들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어 백인 남성과 똑같이 전문직에 접근할 기회가 열린다면, 누가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돌보게될 것인지는 논하지 않았다"(1-2[22]). 행복한 가정주부의 판타지가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가사 노동의 흔적을 감춘 것처럼, 가정에서 해방돼 행복해질 가정주부의 판타지도 "거품 가득한 설거지통"을 떠맡아야 할 다른 여성의 노동을 감출 수 있는 것이었다. - P96

이 정서적 힘은 행복한 가정주부 이미지 뒤에 말하지 못한 집단적 불행이 있었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거기 대항하는 주장, 즉 행복은 가정주부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녀가 하는 일 그 자체라는- 가정주부의 의무는 이런 이미지를 수용함으로써 행복을 만들어 데 있다는 주장을 수반한다. - P99

이 장에서 나는 페미니즘과 불행 사이의 관계를 다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행복이 어떻게 젠더화된 노동 분업을 유지하는 주장으로 이용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 볼 텐데, 그 출발점은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교육에 관한 저작이 될 것이다. - P100

행복은 어떤 형태의 정향을 수반한다. 즉, 행복을 희망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특정한 길로 인도한다. - P101

교육은 장차 무언가가 될 주체가 올바른 쪽을 바라봄으로써 올바른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은 단순히 돌려세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쪽으로 돌려세워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다. 마음을 돌리는 것은 잠재적 주체가 부적절하게 정렬돼 있다는 가정하에서만 교육적 명령이 된다. - P102

행복의 조건성 - 한 사람의 행복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에 조건부로 달려 있는가에 대한 진술들은 행복이 지시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 P105

이 현상이 내게 처음으로권력의 교묘한 책략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지배적인 법은 사람을 문제에 빠뜨리겠다고 위협하고, 심지어는 문제에 빠뜨렸는데, 이 모든 게 그 사람을 문제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한 것이었다"(Butler1990: vi[73]). 행복은 문제에 휘말리는 불행을 환기함으로써 당신을 문제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일 수 있다. - P112

상상력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 사이의 연관 관계는강력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에게 행복 의무가 어떤 식으로 지평을 축소시키는지, 익숙한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게 하는지알 수 있다. - P114

상상력은 소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받아들였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 꼭 그들에게도 좋은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다. - P115

매기는 행복의 불의에 대해, 그것이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행복을 위해 자기 삶을 포기하기를 포기한다. - P117

우리는 행복을 아주 단순히 관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다. - P120

행복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기대되는 "기본 자세"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결과, 중립성의 영역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당신에겐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 P123

폭력을 폭로함으로써 폭력의 근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P125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여성 해방 운동을 위해 "꿈꾸는 행동"이 "미소 거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소 거부를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즉각 ‘남을 즐겁게 하는‘ 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로는 자신들이 즐거울 때만 웃으려 할 것이다" (Firestone 1970: 90[132]). 행복의 약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행복의 기호를 보이라는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파이어스톤의 경우 이는 정향의 전환, 즉 자신의 신체 습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 P127

이는 페미니즘이 여성을 행복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단지페미니즘이 행복의 전시에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무언가의 발견을가능케 하는 지평을 넓히는 데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체적 지평들의 확장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페미니즘은 보장해 주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장소들을 열어 줄 뿐이다. - P128

페미니즘을 계승한다는 것은 슬픔을 계승한다는 뜻일 수 있다. 젠더를 가능성의 제약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이런 제약이얼마나 불필요한 것인지 의식하게 되는 것 역시 슬픈 일이다. - P138

"우리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전제로 한 삶이 로라에게는 견딜 수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런 행복은 죽음과 같았다. 그녀는 행복을 위해 그 삶을 떠난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해 이 행복을 떠난것이다. - P141

샬롯 퍼킨스 길먼이 주장하듯이, "편안함과 행복은 장기간에 걸친 적응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Gilman 1903/2002: 8, 강조는 추가). 이런 적응 뒤에는 다른 가능한 삶의 방식의 상실이 있으며, 잘 적응된상태를 유지하려면 이런 상실은 애도하지 않은 채로 둬야 한다. 그런 상실을 인식하는 것조차 애도다. 그래서 인식을 피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페미니스트 주체들은 잘 적응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런 상실들을 애도할 뿐 아니라, 그런 애도 속에서 삶의 다른 가능성들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런 열림들은 세대를 넘어 계승된다. - P145

안드레아 레비의 『레몬 열매』(Levy 1999)는 인종차별을 의식하게 되면 얼마나 다른 세계에 놓이게 되는지를 문학적으로 가장 잘 그려 낸 작품중 하나다. - P155

이는 그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간과되기에 대한 저항으로서 흑인이 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흑인이 된다는 것은 가족 관계를 회복하고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뜻이다. 백인 페미니스트 의식 소설들은 가족-으로부터의-자유, 가족의 의무와 관련된 편협한 대본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흑인 페미니스트 의식 소설들은 가족-으로의-자유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추방과 박탈의 역사를 거치며상실된 것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 의식은 공손한 말들과 사랑의 언어들 아래 감 - P158

춰져 있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의식이다. 단지 가능성을 제한하는 장소로서의 젠더에 대한 의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너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행복의 기호들이 감추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이 뭔가를 알아차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불행이 야기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뭔가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불행이 야기된다면, 당신은 당신이 몸담은 세계가 당신이 생각했던 그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세계로부터의 소외가 되면, 결국 이는 자기소외의 순간들을 수반한다. 우리의 페미니스트 아카이브는 불행의 아카이브다. 비록 불행의 가닥들로만 우리 이야기를 전부 짤수는 없지만 말이다. - P159

행복은 부분적으로는 불행의 원인을 덮어 버림으로써 불행을덮어 버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덮기를 거부하면 불행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의식화 과정은 단순히 불행을 의식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행을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행이 구조화돼 있음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탓이라고 여겨져 온 불행의 원인이 우리가 아닐 뿐만아니라그렇게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져 온 결과물도 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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