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조용한 혁명

피임약
글로리아 스타이넘, 잡지 <미즈>
잡단4는 커리어 지향적인 직종에 대거 진출
직종의 변화와 커리어 지향에서의 변화

<메리 타일러 무어 쇼The Mary Tyler Moore Show>의 주인공 메리 리처즈는 ‘조용한 혁명‘의 전위라 할 만하다. 극 중에서 메리는 1970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미니애폴리스로 가서 지역 TV방송국 저녁뉴스의 보조 프로듀서로 꿈꾸던 일자리를 얻는다. 메리는 30세의 미혼 대졸 여성이고 싱글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메리의 목표는 연애도활발하게 하면서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일구는 것이다. 메리는 두 영역 모두에서 훨훨 난다. 메리는 재능과 의지와 매력이 있다. 여기에 더해 비밀 무기까지 있는데, 바로 피임약이다. - P183

그 화 방송에서 메리의 부모가 메리가 사는 아파트에 들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메리의 엄마가 문을 나서며 [아빠와 메리가 있는] 거실 쪽을 보고 말한다. "약[pill] 먹는 거 잊지 마!" 그러자 메리와아빠가 동시에 대답한다. "알았어." 메리는 당황하고 아빠는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메리를 바라본다. 피임약이 처음으로 시트콤에서 언급된 이때는 1972년이었다[영어에서 일반적인 알약을 뜻하는 pill에서 p를대문자로 표기한 Pill이 피임약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옮긴이]. - P184

‘피임약의 어머니‘는 두 명을, ‘피임약의 아버지‘는 적어도 네 명을 꼽을 수 있지만 오랫동안 피임약은 고아 신세였다. 어느 업체도생산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생산되고 나자 모두가 피임약을 원했고, 일단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고 나자 제약회사들이 수익을 노리고 앞다투어 피임약 시장에 들어왔다.
먹는 알약으로 임신을 막는다는 개념은 산아제한 운동의 개척자이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미래주의적 개혁가 마거릿 생어 Margaret Sanger의 꿈이었다. 1916년에 생어는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을 돕기 위한 진료소를 열었다가 체포되었다. 피임 제품을 널리 전파시키지 못하게 한 주 법을 직접적으로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어는 위축되지 않았고 길었던 평생에 걸쳐 모든 인종의 여성들이 피임을 할 수 있게 하는 데 헌신했다(생어의 삶이 온전히 고결하지만은 않았다). - P185

1949년에 생어는 캐서린 덱스터 매코믹Katharine Dexter McCormick을 설득해 꿈의 알약 개발에 연구 자금을 대도록 했다. 매코믹이 피임약의 두 번째 어머니다. 1904년에 MIT에서 생물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농기계 업계의 거물인 매코믹 집안 사람과 결혼했다.
1947년에 남편의 사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매코믹은 그중 일부를 그레고리 핀쿠스Gregory Pincus 의 피임약 연구에 후원했다. - P186

‘조용한 혁명‘은 행복의 공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피임약은 더 시끄러운 종류의 혁명에서 여성들이 목청 높여 요구했던 여성 해방의 한 부분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집단4의 여성들이 법조계, 의학계, 학계, 금융계, 경영계 등 경력 초기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먼저 투자해야 하는 종류의 커리어에 진입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 P187

집단4의 젊은 여성들인 우리는 훨씬 더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새로운 비전이 있었다. 우리는 커리어를 가정보다 앞 순서에 둠으로써 자아실현을 하고 소득도 많이올리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전문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릴 참이었다. 우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높은 소득을 가질 수 있는직종, 늘 남성들이 가졌던 직종에 이전 어느 세대 집단보다도 많이 진출할 것이었다. 이 말은, 학부 졸업 직후의 시기에 맹렬한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다시 이는 결혼을, 더 중요하게는 출산을미뤄야 한다는 의미였다. 집단인 우리는 이것이 가능했다. 집단의여성들에게는 없었던 것, 바로 경구피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우리는 피임약을 젊은 미혼 시절에 구할 수 있었고, [결혼과 출산을 미뤄서] 전문직 진출을 위한 교육과 학위 과정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 P189

피임약이 가져다준 여러 이득 중 하나는 결혼 연령을 높임으로써 이혼 가능성을 낮춘 것이다. 또 다른 이득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연기하면서 엄마가 되기 전에 석박사 학위나 전문 학위를 받고 커리어의 토대를 다질 수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여성들에게 일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새로이 주어지면서 여성들의 역량도 강화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집단4의 여성들에게 그 시간에 기한이 있다고 경고해 주지 않았다. 아직 의학계에서는 35세가 넘으면 임신 가능성이 급감한다는 우려가 나오지 않았다. 노산으로 선천성장애아 출산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누구의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단4의 여성들은 임신을 막는게 문제였지 임신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엄마가 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93

이혼율의 증가, 특히 이른 나이대 이혼의 증가와 첫 결혼 연령의 상승이 결합해, 여성의 일생 중 결혼 상태가 아닌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집단3 세대의 여성들[대졸, 비대졸 포함]은 25-50세 사이의 기간 중 80%를 결혼한 상태로 보냈는데, 집단4의 후기가 되면 그 25년 기간 중 65%만 결혼한 상태로 보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성의 정체성이 가정과 가족 중심으로 형성되던 데서 직업 세계와 훨씬 더 밀접하게 관련되는 쪽으로 달라지게 했다. - P198

‘미즈Ms.‘라는 호칭이 받아들여지고 널리 쓰이게 되면서 1970년대 초의 여성들은 자신의 원래 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미즈‘의 사용은 1952년으로도 거슬러 올라가지만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1972년에 잡지 <미즈>를 펴내면서였다. - P199

이들의 경로는 역사적 진전의 논리적인 전개를 보여 준다. 미래의 고용에 대한 예상, 여성에 대한 사회적 규범, 여성의 삶의 만족을 결정하는 요인, 이 각각이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폭풍의 끝을 알리는 무지개처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용한 혁명‘의 일원인 집단의 여성들은 역사의 긴 행진에서 새로운 목표를 형성했다. 그런데 그 목표를성취하기 위해서는 결혼과 출산을 미룰 필요가 있었다. 연애와 성생활을 활발히 하면서도, 또 여전히 결혼의 전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결혼과 출산을 미룰 수 있게 해 준 결정적인 한 가지가 딱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용한 혁명‘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P200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시끄러운 혁명은 어떤 방식으로 조용한 혁명에 영향을 미쳤을까? 시끄러운 혁명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아니었을지라도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여성들의 공동의 의식을 확장함으로써 조용한 혁명을 촉진했을 것이다. 석유지질학자로 뒤늦게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집단4의 일원 베티 클라크Betty Clark 는 이렇게 언급했다.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 P203

일하고 싶다는 열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효과적인 피임 수단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 P204

하지만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진 것 자체는 조용한 혁명의 주된 결과가 아니었다. 직종의 변화와 커리어 지향에서의 변화가 여기에서 진정한 변화였다. 사실 고용률 자체의 추세에서는 커다란 단절이 없었다. 한 가지 예외는 영아가 있는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급증한 것이다. 어린아이가 있는, 심지어 영아가 있는 여성들도 바깥일을 하게 되었다. 여성들이보수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런 종류의 직업은 단절 없이장기간 일할 때 보상이 컸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용한 혁명의 본질이었다. - P206

1955년에는 대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크게 뒤처져 있었다. 여성들은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이 듣는 수학 과목의 70%만 들었다. 하지만 1970년 무렵이면 80%를 들었고 1990년 근처가 되면 남학생과 동일한 수학 과목을 들었다. 과학 수업에서도 남학생과의 격차가 좁혀졌다.
수업만 더 들은 것이 아니라 수학과 읽기에서 남학생 점수 대비 여학생 점수의 비율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1990년 무렵이면 고등학교 졸업반 여학생들은 남학생과의 수학 점수 격차를 크게 줄인 상태였고 읽기에서는 상당히 앞서 있었다. 경쟁력 있는 수학 점수, 전보다 더 다양하게 이수한 과학 과목, 더 월등한 읽기 점수로 무장했으니 여학생들은 대학 진학률과 졸업률에서도 남학생과의 격차를크게 줄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1940년대 말경 출생자부터 시작해서(집단4의 시작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 변화는 너무나 대대적이어서, 이전까지 압도적으로 존재했던 대학 진학 및 졸업에서의 남녀 격차가 빠르게 사라졌고 1980년대 초면 남녀가 역전되었다. - P211

커다란 변화 하나는 집단4의 여성들이 커리어 지향에 맞게 전공과 수업을 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집단4 여성들이 막 대학을 졸업하기 시작한 1970년에는 여성 졸업자의 3분의 2가량이 교육학과 자유교양(각각 40%와 22%) 분야를 전공했다. 남성의 경우에는 둘 - P212

을 합쳐서 24%였다. 하지만 1982년이 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 교육학과 자유교양을 벗어나 경영 쪽으로 이동했다. 1967년에는 여성 졸업자의 5%만 경영을 전공했는데 1982년에는 이 숫자가 21%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매우 빠르게 일어난 변화였음에는 틀림없다.
여성들은 ‘일자리‘ 위주이고 ‘소비‘ 위주인 전공을 벗어나 ‘커리어‘ 지향적이고 ‘투자‘ 위주인 전공 쪽으로 옮겨갔다. 집단4의 여성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나중에라도 읽을 수 있지만 회계학은 시기를 놓치면 공부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교사 자격증은 나중에도 딸 수 있지만 과학자가 되거나 공인회계사가 될 기회는 다시 갖기 어려울 수 있었다. - P213

이러한 변화의 타이밍과 관련해, 교육 영역에서 차별 금지 관련법이 제정되고 그러한 법을 정부가 실제로 집행하게 된 것이 주된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요인이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는 탄탄한 실증 근거는 얻기 어려웠다. - P214

집단4의 젊은 여성들에게 지평이 넓어지고 정체성이 달라지면서, 일의 세계와 커리어에 대해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되었다. 커리어 지향적인 전공과 석박사 학위는 소득에도 반영되었다. 1950년대부터 내내 정체되어 있었던 남성 대비 여성의 소득 비율이 1980년 정도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 직무경력을 쌓게 된 것과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종류의 역량을 획득한 것 덕분이었다. 매년 직무 경력이 늘어갈 때마다 그들은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여성들이 직무 경력을 통해 역량을 쌓을 수 있고 승진 기회가 있는 종류의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노동시장 경험은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 P217

출산을 미뤘던 많은 이들에게 생물학적 시간이 다하고 말았다.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커리어를 더 많이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정을 꾸리는 일이 나중으로 밀려났다는 의미였다. 집단4의 여성들은 가정을 꾸리는 것(그들의 또 다른 꿈)을 ‘미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들은 (그리고 다음 세대 여성들도) 뒤늦게야 이것을 깨달았다. "믿을 수가 없어. 아이 갖는 걸 까먹다니!"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유명한 그림에 나오는 여성은 이렇게 한탄한다. 1964년에 완성된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는 집단4의 여성들을 상징하는 포스터가 되었다. 집단4의 우리들은 집단3의 여성들보다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리고 많은 면에서 실제로 그렇게 해 나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이 갖는 걸 까먹고‘ 있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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