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사실과 신화
제1부 운명
생물학적 조건, 정신분석의 관점, 유물사관의 관점
초월, 객체, 타자, 소외, 초자아, 자아

이와 같이 난자는 본질적 원소인 핵에서 능동적이지만 표면적으로 수동적이다. 그 자체로 폐쇄되고 옹골진난자의 덩어리는 존재의 칠흑 같은 어둠과 휴식을 연상시킨다.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닫힌 세계와 불투명한 원자도 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 P55

생명은 자신을 초월함으로서만 자기를 유지할 수 있고, 자기를 유지시킨다는 조건에서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 P56

흰개미의 경우, 거대한 여왕개미는 자양분을 억지로 몸속에 채워 넣고, 불임으로 무자비하게 학살당할 때까지 매초 알을 낳는다. 그러므로 자기 배 위에 달라붙어 계속해서 배출되는 알을 수정시켜야만 하는 왜소한 수컷과 마찬가지로 노예가 아닐 수 없다. - P60

여왕벌은 사실 벌집의 노예다. 여왕벌은 쉼 없이 알을 낳는다. 늙은 여왕벌이 죽을 때를 대비해 몇 마리의 유충이 그 여왕벌의 뒤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양육된다. 그러다가 최초로 부화한 유충이 요람에서 다른 유충들을 죽여 버린다. 왕거미의 경우, 암컷은 알이 성숙해질 때까지 주머니 속에 알을 품고 다닌다. 암거미는 수컷보다훨씬 더 크고 튼튼해서, 교미 후에 수컷을 잡아먹는 일도 일어난다. 사마귀에서도 같은 습성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의 신화가 생겨났다.
즉, 사마귀는 난자가 정자를 거세하고 제 짝을 살해하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거세에 대한 여성의 동경을 예시하는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마귀가 그토록 잔인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로잡혔을 때지, 먹을 것이 충분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수컷을 먹이로 삼는 일이 아주 드물다. 암사마귀가 수컷을 먹는다면, 그것은 홀로 있는 개미가 종종 자기 자신의 알 가운데 몇 개를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알을 낳고 종을 영속시킬 힘을 갖기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개체끼리 편을 갈라 서로 싸우는 ‘양성 투쟁‘의 전조를 보는 것은 터무니없다. 개미나 꿀벌, 흰개미나 거미 혹은 사마귀 그 어느 것에서도 암컷이 수컷을 노예로 삼고 잡아먹는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다른 경로로 암수를 둘 다 집어삼키는 것은 종셈이다. 암컷이 더 오래 살고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전혀 자율적이지 못하다. - P61

순간의 교미 외에 수컷의 삶은 무용하고 무의미하다. 일벌의 근면함에 비교하면 수벌의 무위無爲는뚜렷한 특권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치욕적인 것이고, 독립의 징후가 보이는 무위의 생활에 대한 벌로서 흔히 수컷은 생명을 빼앗긴다. 암컷을 노예로 삼는 종은 종에서 벗어나려는 수컷을 벌한다. 즉, 좋은 수컷을 잔인하게 제거해 버린다. - P62

이러한 생물학적 조건은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자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여자가 처한 상황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차후의 모든 서술에서 이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이고, 세계는 파악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그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P74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인류의 남녀를 비교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매우 정확하게 말했듯이,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이다. 여자는 고정불변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이다. - P75

주체가 자기에 대해 의식하고 자기를 실현해 가는 것은 단순히 신체 그 자체 만으로서가 아니라, 금기와 법률에 예속된 신체로서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어떤 가치들의 이름을 통해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치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생리학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생물학적 조건이 실존자가 부여하는 가치들의 옷을 걸치고 있다. - P78

프로이트는 그 이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인정되지 않았던 사실 하나를 밝혀냈다. 즉, 남성의 색色情은결정적으로 페니스 안에 국한되지만, 여성에게는 두 개의 구분되는 색 계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유아기에 발달하는 클리토리스(음핵)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사춘기 이후에나 개화하는 질 계통이다. - P81

남자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기 단계가 있는 반면에 여자에게는 두 가지 성기단계가 있다. 여자는 자기의 성적 진화의 최종 단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유아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그 결과 신경증을 일으킬 위험이 더 많은 것이다. - P81

아들러 Alfred Adler(1870-1937) 2‘는 인간 생활의 발전을 유일하게 섹슈얼리티에만근거를 두고 설명하려는 체계의 불충분함을 이해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즉, 그는 인간 생활을 인격 전체에 재통합시키고자 했다. - P86

여자를 암컷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충분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갖는 의식으로 여자를 정의할 수 없다. 여자는 자기가 속한 사회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는무의식과 전체 정신생활을 내면화함으로써 개인적 사건이 개인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콤플렉스, 경향 등등의 단어가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세계와의 관계다. 개인은 세계를 통해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세계 쪽으로 돌려야만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특히여자가 왜 타자인지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자신이 페니스의 권위가 아버지의 절대적 권력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자의 패권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자신은 모른다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 P92

정신분석학자들이 이해하는 의미로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동일시하기‘는 하나의 모델 안에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고, 자기 실존의 자발적 움직임보다 다른 이미지를 택하는 것이며, 결국 존재하는 체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형태의 소외 사이에서 헤매는 여자를 보여준다. 남자인 체하는 것이 여자에게 실패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인 체하는 것 또한 환상이다. 왜냐하면 여자인 것은 객체, 타자가 된다는것이기 때문이고, 타자는 자기 포기 한가운데에서도 주체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진정한 문제는 이러한 도피를 거부하면서 초월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 P94

남자만이 인간이고 여자는 암컷이라는주장은 특히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여자가 인간으로 행동할 때마다 남자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자는 여아와 소녀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켜 ‘남성적‘ 경향과 ‘여성적‘ 경향 사이에서 양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우리는 여아와 소녀가 여자에게 제시된 객체의 역할, 즉 타자의 역할과 자기 자유의 주장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 P95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자의 역사를 되짚고 있다. 즉, 이 역사는 무엇보다도 기술의 역사에 좌우될 거라는 것이다. 토지가 씨족 전원의 공동소유였던 석기시대에는 원시적인 삽과 괭이의 초보적 성격이 농경의 가능성을 제한했다. 여자의 힘은 채소밭정도의 경작에 필요한 노동에 알맞았다. 노동의 원시적 분화에서 남녀 양성은 이미 두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계급의 관계는 평등했다. 남자가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는 동안 여자는 가정에 머물렀다. 가정의 임무에는 생산적인 노동, 즉 토기 제조, 직조, 원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여자는 경제적 생활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구리, 주석, 청동, 철의 발견으로 쟁기의 출현과 함께 농업은 그 영역이 넓어졌다. 삼림을 개간하고 들판을 경작하기위해 집약적인 노동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다른 남자들을 노예로 삼아이용하였다. 사유재산이 생겨났다. 노예와 토지의 주인인 남자는 또한 여자의 소유자가 되었다. ‘여성의 역사적 대패‘가 바로 그것이다. 여성의 패배는 새로운 도구가 발명됨에 따라 노동 분화 속에 발생한 대혼란으로 설명된다. - P97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사회적으로 대규모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그녀에게 대수롭지 않은 정도로 요구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성 노동을 대규모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필요로 하는 대규모 근대 산업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처럼 여자의 운명과 사회주의의 운명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점은여자에게 할애한 베벨의 방대한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둘 다 피억압자다"라고 말한다. 양자를 해방하는 것은 기계화로 인한 커다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경제적 발전이므로 여성 문제는 여성의 노동력 문제로 귀결된다. 기술이 여자의 능력에 적합했던 시대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활용하기가 불가능해지자 추락해 버린 여자는 근대 사회에서 남자와의 평등성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이러한 평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 남아 있는낡은 가부장주의의 저항이다. 이 저항이 무너지는 날이 오면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소련에서는 이미 평등이 실현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가 전 세계에서 실현된다면 더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오직 평등한 노동자들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P98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실존하는 인간은 오직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만 자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고 말했다. - P100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에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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