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한때는 싫어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미국이 아니면 어디? 라고 베른하르트는 생각했고 계속해서 쾌적한 진창 속에 발을 디미는 것 같은 요즘의 기분이 캘리포니아의 날씨와 겹쳐지는 순간에는 미래가 실현될 것 같은 기분, 우주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 P10

그러나 생각해보시오, 베른하르트, 당신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의 편집자와 조판 디자이너와 영업자와 유통업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책이 나오기위해 기능하는 물질적, 인적 기반들에 대해 아주 사소한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작은 힘들이 모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결부되어 있는 관계에 대해 아무런 인식없이 넘어가고 그러한 인식을 하지 않는 것이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발전되어온 추상화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하고 망각하고 가르고 나누지 않고는 아무것도 흡수할 수 없고 점점 더 그러한 방향으로 모든것을 정리하고 흡수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현실인 양 행동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렇게 신경 구조가 생겨먹었거나 그러지 않으면 폭발하는 기억과 감각으로 인해 돌아버릴 거라는 공포감 때문인지, 인지 스스로 인지 고유의 편협성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라고 하인츠 폰 푀르스터는 말하며 자신이 직접 땅을 일구고 집을 세운 래틀스네이크 힐의 쉽게 바스라지는 갈색 흙을 으깨듯 밟았다. - P12

니체의 뒤통수를 친 헬레네 드루스코비츠의 책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며 세상을 위해서는 욕된 존재인 남성』을 퍼뜨리고 다니며 여자들은 분석을 싫어해, 여자가 공부를 하면 대머리가 되지, 여자가 공부하면 손이 자라서 나무꾼처럼 된단다 따위의 말에 저항했지만 정작 유행한 건 오토 바이닝거나 크리스티안 에렌펠스 같은 이들의 사상이었고 곧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그다음엔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우리는 인종 문제에 모든 걸 집중해야 했거든. 나는 검은 머리를 가진 독일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싫은데 이런 생각 역시 너무나 역겹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해. 루스 베네딕트는 커다란 손으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며 기분 전환을 했는데 그건 그녀가 공부를 너무 했기 때문일까. 나는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되고 외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돼. 그녀는 자전거를 좋아했는데 자전거가 여성해방을 앞당겼다, 자전거가 가져온 빠른 발놀림이 여성의 한계를 돌파하는 반여성적이고 반남성적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겼다고 한 로자 마이레더의 말을 믿었고 자전거에 크뇌들을 싣고 다니는 걸 예순 살 넘을 때까지 멈추지 않아 많은 분들을 걱정시켰어. - P20

베르사유조약을 그때 처음 알았고 메이시회의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도록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뭔지, 이것은 하나 마나 한 얘기가 아닌가, 우리는 어디를 맴돌고 있는 걸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하인츠가 말한 대로일지도 모른다. 저는 당연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당신과 그레고리, 마거릿 같은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고 그전까지 존재했던 생각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어요, 저는 얼마 전에 이혼했고 이제 다시는 전남편 같은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며 어릴 때는 플로이드 델과 젤다 피츠제럴드의 책을 즐겨 읽었지만 그것도 다시 읽을 일이 없습니다, 플래퍼들을 동경했지만 그들에게 흥미를 잃었고 얼마 전에는 마거릿 미드와 논쟁을 벌였어요. 그녀는 은인 같은 사람이지만 처음 만난 건 전쟁 때였어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모두가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정보다 일이었고 그게 가정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알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나요. - P21

memex 8. 자전거
이란이 여성의 자전거 탑승을 금지하는 파트와(이슬람 율법해석)를 발표했다. 20일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실은 지난 18일 웹사이트를 통해 이런 파트와를 발표했다. 하메네이는 이슬람 시아파의 최고위 율법학자 자격으로 신도의 질문에답하는 형식으로 발표한 파트와에서 여성이 공적인 장소에서자전거를 타면 가족 이외 남성의 눈에 띄게 되기 때문에‘하람(Harām)‘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슬람 율법에는 ‘의무’, ‘장려’, ‘허가’, ‘기피‘, ‘금지‘의 다섯 단계 의무 규정이 있으며 하람은 이 중 ‘금지‘의 범주에 들어간다. - P23

memex 11. 유토피아
유토피아란 말은 now-here(지금 여기)가 아니라, no-where(없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토피아적 사고의 가치는 폄하되고 있다. 유토피아적 사고의 가치는 당대의 경험과 정치적 욕구들 사이에 공간을 창조하고, 그러한 욕구들을 새로운 형태의 정치 건설에 낙관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페미니즘의 기획이었고, 페미니즘이 결정론적 사회 이론을 혐오하는 이유들 중 하나였다. - P31

memex 14. 타자기
김훈은 인터뷰에서 소설을 원고지에 쓴다는 이야기와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여고생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다운 존재로구나, 생명이 있는 여자는 찬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일했던 회사에는 고은 시인의 원고를 전담해서 타이핑하는 여자 직원이 있었는데 고은의 악필이 너무 심해서 그녀 말고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고 그녀가 옮기는 과정에서 단어나 조사를 조금 틀린다고 한들 그걸 알아낼 사람도 없었다. 육필 원고는 권위주의이자 - P32

가부장,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상징이다. 타자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 신기술은 편리하지만 하찮아 보였고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아직 투표권을 획득하지 못한 여성들이 타이피스트가 되어 사회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체스터턴은 집 안에서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여성들이 밖에 나가서 남의 말을 받아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아냥댔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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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14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체스터튼 말 웃픕니다~

햇살과함께 2022-12-15 00:09   좋아요 1 | URL
그죠~ 아니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 남성 아닌가요? 그리고 밖에 나가 남의 말을 받아쓰는 일은 돈을 받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