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루시 스노의 파묻힌 삶

<빌레뜨> 궁금하다. <제인 에어>와는 다른 느낌.

평등한 삶을 요구했던 프랜시스 앙리와 제인 에어를 비롯해 저항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캐럴라인 헬스턴에 이르기까지, 용기와 활력이 점차 쇠퇴해가는 과정은 루시에 이르러 비로소 복종과 침묵으로완성된다. 이것은 마치 샬럿 브론테가 여성들에게 질식할 것 같은 절망감만 안겨주는 늙어가는 과정을 성숙의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사실 소설들이 진전됨에 따라 여성들은 파괴적인가부장 사회의 구속을 내면화하고 이로써 점차 도피가 어려워진다. 여성들은 자신 안에 갇힌 채 출발 시점부터 패배하는 것이다. 루시 스노는 결코 충만하게 존재할 수 없었지만 그 대가로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단조롭고 진지한 위장된모습 뒤로 물러남으로써 고통을 피해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고통받는다.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는 루시는 의미와 목적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힘도 박탈당해왔다. 어떻게 그녀가 현재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 P699

브론테는 이 마지막 소설에서 자아 속으로 물러남으로써 도피할 수도 없고(그런 은둔은 유아론적인 것으로 거부당하기 때문에) 타자를 영적인 대상으로 비인간화함으로써 해결할 수도 없는 여성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삶의 구원이 아니라 파괴적인 결과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어떤 반가운 축하도 없고 풍성한 보상도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브론테는 『빌레트』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살아갈 의지를 빼앗긴 모든 여성을 위한 정직한 비가를 제공했다. 동시에 『빌레트』는 작가의 탈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P703

따라서 해리엇 마르티뉴가 『빌레트』의 등장인물들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빌레트』를 비판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브론테의 요점이기 때문이다. ‘비비드호‘를 타고 가면서 루시는 여성의 핵심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는 여성들 몇 명과 마주친다. 루시는(기름통처럼 생긴 남편과 함께한) 어느 신부를 보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절망의 광기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빌레트로 떠나는 들떠 있는 여학생인 지네브라 팬쇼는 돈 많은 늙은 신사와결혼해야 하는 다섯 자매 중 하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객실승무원의 편지에 등장하는 샬럿이라는 여성은 경솔한 결혼을저지르려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은 외로운 고립의 삶만큼이나고통스러운 복종으로 보이지만 루시는 ‘감옥을 만드는 것은 돌벽이 아니며 / 새장을 만드는 것도 쇠창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갑판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승리의 순간은 즉시 사라진다. 루시도 뱃멀미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루시의 시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감옥에 갇힌 죄수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이 마음이라면,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벽과 창살을 제공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 P710

루시의 존재는 살아 있는 죽음이었다. 루시는 의식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방인이고, 의심하지 않는 손님을 살해하는 가정부이기 때문이다. 폴리이자 루시이고 지네브라이자 마담 베크인 루시는 이런 내적 갈등으로마비된 수녀다. 루시가 자신을 마담 베크의 거미집에 걸린 파리, 달팽이, 혹은 위태로운 거미줄에서 튕겨 나오는 거미로 상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아라는 집 내부의 갈등 속에서 루시안의 서로 대립하는 존재들은 루시의 내면이 파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파편화는 루시를 완전한 신경쇠약으로 내몰고 말 것이다. - P179

루시가 자신의 불만을 늘어놓는 불가해한 방식은 놀라울 정도다. 사실상 이 소설을 좌절 장면부터 거꾸로 해석하지 않는이상, 루시의 고충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루시의 갈등은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 루시는 자신의 갈등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화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인 루시는 자신의 이야기만 아니라면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듯 보인다. 폴리 홈, 미스 마치몬트, 마담 베크, 지네브라는 각각 루시 자신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더 분석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때문에 여러 세대에 걸쳐독자들은 이 작품이 반쯤 끝날 때까지 브론테가 이 소설의 주제를 자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또한 작품의 신화적 요소들을 비록 인식했다 해도, 일반적으로 오해받아왔거나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으로 거부당해왔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째서루시의 정신분열은 모든 여자가 직면하는 일반적인 문제로 간주되는가? 브론테가 『빌레트』의 막간에서 직면한 문제가 (그것이 암시하는 모든 것과 함께) 바로 이 질문이다. - P725

분명 루시의 설명에는 현저하게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공포, 부모의 상실, 존 박사에 대한 짝사랑, 긴 방학 동안 이어진 악몽의 공포는 이상할 정도로 암시적으로만 제시된다. 예를 들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대신 루시는 이런 고통의 순간에 자신이 느낀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물의 이미지를 빈번하게 활용한다. - P726

다가올 구원에 대해 논할 때 루시는 결코 가정이나령, 의문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루시의 욕망은 항상 희망과 기원으로 표현될 뿐 결코 신념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상의 삶은 불평등에 기초하고 있으며, 자신보다더 큰 힘이 불평등을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루시는 냉소적이고 거의 풍자적으로 ‘우리가 자신을 낮추어 순종을 하든안 하든‘ 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인정한다. [38장] - P728

만약 마담 발라펜스가 루시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면, 루시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환영인 다락방의 수녀는 그녀와 어떤관계인가? 기독교에서 계속 나타나 노파-까마귀 여신의 모습은 로스가 주장하듯 자애로운 성자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노파‘를 의미하는 켈트어인 카일리아크cailleach는 ‘수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화려한 색깔의 옷과 반지로 장식한 채, 이 곱사등이가 집 꼭대기에서 내려와 죽은 수녀, 폴의 매장된 사랑인 잃어버린 저스틴 마리의 초상화를 통과해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루시는 그 그림이 슬픔, 나쁜 건강, 순종적인 습관의 우울함을 나타내는 창백한 어린 얼굴에 수녀 복장을 한 성모 마리아같은 모습을 그렸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이미 제인 에어의 순종의 결과로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의 공격성이 나타나는 방식을 보았고, 캐럴라인 헬스턴의 여성적인 수동성 때문에 셜리 킬다의 남성적인 힘이 나타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빌레트』에서 마담 발라펜스의 악의도 저스틴 마리의 자멸적인수동성의 다른 면이다. 디킨슨의 시(「우리 뒤에 숨겨져 있는 우리가 - / 가장 놀라게 한다-」)의 핵심적 진실을 극화하는 양, 브론테는 그 마녀가 바로 수녀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미스 마치몬트의 초기 판단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 - P750

서 마녀나 수녀가 되지 않은 여자들은 루시처럼 마녀와 수녀 모두에게 시달린다. 사랑과 남자에 대한 루시의 양가적 감정은 이제 충분히 설명되었다. 루시는 자신의 세계에서 자아실현이 가능한 유일한 형식으로 감성적 성애적 관계를 추구하지만, 그녀는 그런 관계가 자신을 순종이나 파멸, 자살, 또는 살인으로 이끌고 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 P752

다른 사람의 관찰대상으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는 대신, 루시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본다. 루시는 점점 더 자신을 그녀 자신의 몸과 동일시할 수 있음으로써 자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사람이 자신을 모순적이며 무능력하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정의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루시는 존 박사, 홈 씨, 지네브라, 폴리조차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자신을 보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브론테는 드디어 루시가 ‘진리‘에 대한 상상적인 ‘투사‘와이성적인 ‘이해‘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거울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거울은 실재를 해석함으로써 실재를 창조한다. 그러나 해석의 행위는 지각의 행위로 남아 있을 때만 포학성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작은 방어들이 축적되는 곳에서만 […]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27장] - P760

동시에 브론테는 사랑의 끝은 삶의 끝이 아니라는 점도 말한다. 『빌레트』의 마지막 장은 ‘공포는 가끔 헛된 상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지시키며 시작한다.[42장] 소설의 끝에서 루시는 확실하게 결론 내리기를 거부한다. ‘찬란한 상상력이 희망하게 놔두라.‘ [42장] 브론테는 삶을 떠받치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 이외의 어떤 명확한 메시지도 삼가는 애매하게 열린 결말을 남겼다. - P762

가부장적 예술을 전복하기 위해 브론테가 사용한 것은 수용의 행위다. 최근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브론테가 여자 주인공들 - P763

을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이유로 불편해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 브론테의 작품들은 남성성을 권력과 동일시하고 여성성을 굴종과 동일시하는 폐해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브론테는 순종의 습관이 여성에게 중요한 통찰(여성들이 저항할 때 그들의 주인처럼 되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공감의 상상력)로 이끌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자신을 대상으로서 경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죽음에서 깨어날 필요성과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을 둘 다 이해한다. 여성들은 그 능력과 필요성이 마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마력이며, 박해하는고백적인 참회가 아니라 부활하는 고백적인 예술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탈출했던 장소에 또 다른 타자를 옭아매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예술이다. 시학의 정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브론테는 어떤 의미에서(이성과 상상 사이의 간극을 공격하고, 객관적인 예술 작품의 주관성을 주장하며, 그녀 소설의 주제로 대상화된 희생자들을 선택하고, 그녀와 함께 타자화된 사람의 내면성을 경험하도록 독자를 초대하는) 현상학자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브론테는 끊임없이 고통받았고, 그녀의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예술의 정직성 덕분에 힘을 얻었던 모든 여성들의 강력한 선구자로 남아 있다. - P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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