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여왕의 거울

괴짜에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홉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으로서 핵심 개념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신이 세상을 만든 아버지이듯 작가는 자기 텍스트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사고는 서구 문학 세계 전반에 퍼져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이 은유는 작가, 신, 가부장이라는 말과 동일시되는 ‘저자‘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다. ‘저자‘라는 단어에 대한 사이드의 세심한 고찰은 이 논의와 관련해 상당히 많은 내용을 요약하고 있기에 여기에 전부 인용할 가치가 있다. - P74

이 단어에는 또한 저자authour, 즉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사람, 낳는 사람, 개시자, 아버지 또는 조상, 문서화된 성명서를 발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 P75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목적에서 문학적 부권 은유를 사용하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문학작품은 문자 그대로 언어의 표현일 뿐 아니라 육체로 신비롭게 구현된 권력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 같다. 따라서 가부장적 서구 문화에서 텍스트의 저자는 아버지이자 창시자이며 낳는 자, 펜을 음경처럼 생산의 도구로 쓰는 미학적 가장이다. - P78

마지막으로, ‘소유권‘이나 소유 개념이 부권 은유 안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이 복잡한 은유의 또 다른 의미를 밝혀준다. 저자/아버지가 작품과 독자의 관심을 소유한 자라면, 그는 (자기 머리에서 나온 자식들, 종이에 잉크로 구체화시키고 천과 가죽으로 ‘장정한‘) 작품의 백성이라고 할 인물, 장면, 사건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문인‘은 저자이기에, 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이자 주인 또는 지배자이며 소유자다. 서구 사회가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르자면 그는 정신적 유형의 가부장이다. - P79

‘펜을 드는 여자’는 건방지고 ‘주제넘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구제 불능인 존재다. 어떤 미덕도 그녀의 건방진 ‘결함‘을 메울 수 없다. 그녀는 자연이 내리그은 경계선을 괴물처럼 횡단해버렸기 때문이다. - P80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문학 권력과 끈끈하게 연관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19세기 사상가 오토 바이닝어의 표현에 의하면) ‘여성은 문학 권력이 없기에 ‘존재론적 실재를 [남성과]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이어진다. - P81

앤 핀치는 자신의 시집 『서시』의 결론에서 여자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고 말하면서 그런 기대를 물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신랄하게 빈정대는 투로 자기 자신에게 멍청해지라고 충고한다. - P84

그러니 나의 뮤즈여 조심스럽게 물러나라.
칭찬받으려다 경멸받지 말고.
욕망을 의식할지언정, 앞으로도 쭉 날개를 움츠린 채
몇몇 친구에게, 그리고 너의 슬픔에게 노래하라.
그대는 태생상 결코 로렐의 숲에 어울리지 않으며,
그대의 그늘은 충분히 어두우니, 그대는 거기 만족하라.

생성의 에너지와 동떨어진 채 어두운 겨울 세계에 있는 핀치는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통찰력을 상실한 과부‘로 정의하고 있는 것만 같다. - P85

동시에 남성의 텍스트는 계속해서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를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여성의 미덕은 남성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발자크의 애매모호한 말을 내내 옹호했다. - P88

여성은 남성의 ‘펜‘에 의한 창조물로서 ‘감금되었다.‘ 여성은 남성이 내뱉은 ‘문장‘으로 (사형이든 징역형이든) 형을 선고받았다.‘ 남성은 여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기소했다.‘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사고에 따라 남성의 텍스트, 그림, 그래픽 속에 ‘갇혀‘ 있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우주론 속에서(죄 많은 결함투성이로) ‘날조되었다.‘ - P89

시몬 드 보부아르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남성의 ‘초월성‘은 사냥하고 죽이는 능력으로 상징된다. 여성의 자연 동일시, 그리고 내재성을 상징하는 역할은 인간 종을 영속시키는 무의식적 출산 과정과 핵심적으로 엮여 표현된다. 인간의 우월성 혹은 권위는 ‘생명을 낳는 성이 아니라 죽이는 성이 소유해왔다.’ D. H. 로런스의 말을 빌리자면 ‘생명의 주인이 죽음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가부장적 시학은 가부장이 바로 예술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 P90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 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 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가 만들어놓은 ‘천사‘와 ‘괴물‘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를 특별히 더 읽어내고 적응하고 초월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쓸 수 있으려면 먼저 ‘집 안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여성은 자기를 ‘살해해‘ 예술에 가두어놓았던 미학적 이상을 죽여야 한다. 모든 여성 작가는 천사와 정반대쪽에 있는 대립쌍인 집 안의 ‘괴물‘도 죽여야 한다. 메두사의 얼굴을 한 이 괴물도 여성의 창조력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비평가인 우리에게 천사와 괴물 둘 다 ‘죽이는’ 울프적인 행위의 시작은 이런 이미지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학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살해하기 위해 우선 분석해야 한다. 특히 여성이 쓴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천사‘와 ‘괴물‘ 이미지는 남성이 쓴 문학 전반에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두 이미지 중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게 죽인 여성은 거의 없을 정도로 여성문학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상상력은 거울을 통해 그 이미지를 어렴풋이 인식했을 뿐이다. 최근까지 여성 작가는 자신을 (무의식적이지만) 메리 엘리자베스 콜리지가 말했던 ‘수정 유리 표면‘에 살고 있는 천사나 괴물, 또는 천사/괴물의 이미지 뒤에 거주하는 신비한 존재로 정의해야 했다. - P95

빅토리아 시대의 천사 같은 여자는 가정 안에 갇힌 채 남편의 ‘의미 있는 행위의 삶‘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피와 땀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신성한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명상적인 순수함‘으로 신 같은 타자성을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06

이 모든 화신 (에러‘에서 ‘우둔함의 여신‘까지, 고너릴과 리건에서 클로이와 실리아까지) 중 여성 괴물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본보기다. 남성이 자신의 육체적 실존, 즉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능감에 대한 모든 양가적인 감정을 바로 여성이 대변하도록 만들어왔다는 주장 말이다. 타자인 여자는 삶(파괴되도록 만들어진 삶)의 우발성을 나타낸다. ‘남자가 여성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육체적 우발성에 대한 남성 자신의 공포‘라고 보부아르는 말한다. - P121

우리는 오로라 리나 메리 엘리자베스 콜리지 같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 텍스트의 감옥에서 여성의 펜으로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 출발점에서 자신을 ‘천사-여자‘와 ‘괴물-여자‘로 번갈아가며 정의하는 모습을 목도할 것이다. 우리는 또 백설 공주나 사악한 여왕처럼, 이들의 초기 욕망이 양가적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유리 관 속에서 숨 막히게 꼭 - P136

끼는 코르셋으로 자기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조이거나, 거울밖으로 나와 불같은 죽음의 춤을 추어 스스로를 파괴하라고 유혹받는다. 그러나 천사와 괴물이라는 한 쌍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었어도,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과 불모성에 대한 공포로 고통을 받았어도, 여성 작가들은 작품을 산출했다. 18세기 말까지 여성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책 전반에서 우리가 보게 될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 가부장적인 이미지와 인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허구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텍스트라는 유리 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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