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초기, 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었다. 몇 달 주기로 유서를 고쳐 고정된 장소에 두고 다닐 정도로 ‘끝‘을 생각하며 살았다. 출소한 가해자와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복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해도 수사기관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혼자서 나를 지켜야 했고, 혼자서 죽음을 대비해야 했다. 언제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찾지도 못하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그저 외부 요인으로 삶이 끊기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활동했다. ‘성범죄자알림e‘에 올라와 있는 가해자의 출소 후 주소지는 서울 강남이었는데, 본업도 연대도 초기에는 모두 서울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이동할 때 언제나 예민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등 피해 회복의 과정을 밟지 않은 채 바로 일을 시작하고 연대 활동을 이어나갔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던 거다. - P312

한국은 판사의 재량에 대한 인정 범위가 매우 넓다. 그러니 판사의 판단에 대한 외부 평가도 그만큼 감수할 필요가 있다. 책임은 외부로 돌리면서 권위는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법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우선 판사들부터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말하기를 해야 한다. 청중을 고려하지 않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시민들도 정보 공개의 범위가 넓어지는 만큼 판사의 ‘말‘을 왜곡하지 않고 경청하면서 해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법감시운동으로서 방청연대, 재판 모니터링과 연계해 판결문 분석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잘 듣기 위한 것에 있다. - P366

활동가들의 번아웃(소진) 현상은 기존의 반성폭력 활동에서도 지적되어왔다. 전업 활동가의 경우 불완전한 고용 상태와 낮은 임금, 공사 구분이 불명확한 일처리 등에서 오는 여러 문제뿐 아니라,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심리적인 문제, 외부 공격에 대응하면서 발생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연대든 신념만으로,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P379

연대 초기에는 ‘잊히기 위해‘ 연대한다고 했다. 물론 이는 내가 연대한 피해자들이 나와의 연대마저 잊고 일상을 만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연대 활동의 중단을 염두에 둔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대자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공적 활동과 책임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피해자가 편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그리고 시스템 감시와 변화를 위해 연대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 동시에 내가 없어도 이런 활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자로서의 나는 잊혀도, 내가 한 활동이 피해자를 위해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가능한 연대자가 되기를 원한다. - P384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자신들은 의뢰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피해자가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태도를 보인다. 윤리와 공적 책임을 팽개치는 것이다. 천씨의 변호인 역시 그런 ‘나쁜 변호사‘로 평가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결심 공판에서 사람들에게 왜 나쁜 사람을 변호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며 고뇌하는 척했다. 피해자의 정보유출은 피고인의 방어권과 관련이 없다. 사람들은 실수와 고의를 구분할 수 있다. 욕먹을 짓을 해놓고 욕먹는 것을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 P3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