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로 부르기 꺼렸던 이유 중 하나는 그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여성들을 까다롭고 여성스럽지 못한 남성 혐오자로 깎아내리는 데 쓰였다. 게다가 세이어스의 글은 영국 여성이 남성과 같은 조건으로 투표할 권리를 얻은 직후에 나온 것이었다. 참정권을 얻은 이후의 세대에게 페미니즘은 구식인 데다 무의미하고 아무런 효용이 없다고 인식되었다. - P8

○ 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 마리 시어가 말했듯, 페미니즘은 "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 집단적 정치 활동으로서의 페미니즘: 벨 훅스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 지적 체계로서의 페미니즘: 철학자 낸시 하트삭에게 페미니즘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방법이자 (…) 분석 모형"이다. - P9

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정치적 운동보다 그 역사가 훨씬 길다. 유럽에서 정치적 페미니즘은 보통 18세기 후반에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이 부당한 비방에 맞서 자기 성을 변호하는 글쓰기 전통은 그보다 몇 세기나 앞선 시대부터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열어젖힌 글은 15세기 초, 박학다식한 일반인 프랑스 여성 크리스틴 드피상이 쓴 『여성들의 도시』다. - P9

역사학자들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목적이 다양한 신념이나 관심사와 양립할수 있을 때만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 P11

19세기에 시작해 20세기 초 정점에 달했던 여성참정권 운동이 그 대표 사례다. 당시 활동가들이 내세운 두 가지 핵심적인 주장은 여성의 본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서로 다르면서 이론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관점에 기대고 있었다. 첫 번째 관점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마땅히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남녀의 유사성을 강조했고, 두 번째 관점은 여성만의 독특한 관심사는 남성 유권자가 적절히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남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 P11

‘물결’ 모델은 널리 쓰이지만, 수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과거의 유산이 현재에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새로 등장하는 각 물결은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고 느끼게 하여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이다. - P13

서문 앞머리에 열거한 페미니즘의 의미 중, 지적 체계라는 세번째 뜻으로 페미니즘을 이해한다면, 그 역사의 흐름을 그리기란 훨씬 더 복잡해진다. 페미니즘은 철학 사조나 이론 흐름의 전형(‘실존주의’나 ‘후기 구조주의‘ 등)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위대한 사상가의 정전에 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1792)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처럼 현대 페미니스트 사상사의 토대로 널리 알려진 이론적 문헌이 몇 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이외의 저작으로 모든 페미니스트가 동의할 목록을 만들기란 무척 까다로울 것이다. - P15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여러 신념과 관심사 들은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 한데 모인다(물론 그 신념의 일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추구하기도 한다). 이 신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칙, 즉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모두가 동의할 만한 기본 원칙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수많은 작가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단수 ‘페미니즘‘이 아니라 복수 ‘페미니즘들‘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 P16

1. 현재 여성은 사회에서 예속 상태에 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겪고 체계적 불이익을 받는다.
2. 여성의 예속은 불가피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 P17

비록 여기서 ‘여성‘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렇다고 ‘여성‘이 모두 똑같은 불의와 불이익을 겪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이해해선 안 된다. - P17

현대 페미니즘의 흐름은 대부분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교차성 intersectionality‘이라고 이름붙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교차성이란 여성의 경험은 그들의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 사회 계급 같은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 등 다른 측면의 영향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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