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이 우리의 역할을 정해줬다. 그동안은 나와 남편의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크게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출산 이후에는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이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결혼했고, 똑같이 아이 둘을 원했고, 똑같이 부모가 되었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도 같았지만, 삶은 달라져야만 했다. - P73

돈 버는 남자는 권위를 갖는다. 친정 엄마는 남편이 돈 버느라 고생하니까 맛있는 요리를 해주라고, 퇴근하면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고, 남편이 무언가를 잘하면 크게 칭찬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라고 수시로 당부했다. 내가 임금노동을 그만두고 돌봄노동을 선택한 이후, 내 성질은 죽이고 남편 기는 살려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것이다. - P75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갑‘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을’은 참고 듣기만 한다. 남편과 내가 ‘갑을’관계같았다. 남편과 내가 서로의 역할을 바라보는 자세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는 통장 잔액 부족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남편 기분이 상할까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하며 하고싶은 말을 꾹꾹 참았지만, 남편은 내 감정이 상하거나 말거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돈을 버는 남편에게는 주체가 되어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날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 P77

나는 스스로 나를 구해야 했다. 남편은 남자들이 하는 흔한말을 하고, 남자들이 받는 흔한 대우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남성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는 현재의 결혼제도는 그 질서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차별을 만들어낸다. 남편은 날 무시하는지도 모른 채 상처를 주었고, 나는 자주 결혼을 후회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되찾지 않고서는 남편눈치나 보며 기죽어 살거나 부부관계가 악화될 위기였다. - P79

남편이 밖에서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신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갖고 불편한 상황들을 참고 있는지 은근히 내비칠 때는 나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려 사는지 말했다. "당신의 책임감이 내 책임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마. 당신과 나는 종류가 다른 부담을 안고 살아갈 뿐이야. 그래도 당신 고생에 대해서는 월급이라는 보상과 사회적인 인정이라도 있지. 내 고생의 대가는 남편이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 된 거잖아. 마음 편하게 커피 사 마실 돈을 벌어다 준 것도 아닌데." - P81

남편이 대단하다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남편이 대단하다니요? 남편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성장할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주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데요! 남편은 스스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수고를 지우지 마세요!" - P88

무언가가 변하면 그것을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서재에서 하는 일들이 새로운 일로 이어졌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책을 고르고 책을 읽는 일이 즐거웠다. 육아를 하며 관리하지 못하던 블로그에 다시 책 후기를 올리고 사람들과 소통했다. 아이를 돌보며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했다가 깊은 밤 서재에 홀로 앉아 글을 썼다. 아이에 대한 글도 쓰고, 세상일에 대한 생각도 기록했다. - P101

집 안에 내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나는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여자인 내가, 엄마인 내가, 아내인 내가 이런 걸 가져도 되는 거야?‘라고 속으로 되뇌던 의심이 사라졌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공간은 지금 내 삶과 내 모습 그 자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이자, 내가 딛고 서서 머무는 곳이다. 나는 서재를 갖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내 삶을 직시하고 있다. - P104

갓 태어난 아기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신생아는 20시간 넘게 잔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 20시간을 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육자에게 찰싹 붙어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아이는 잠이 든 후에도 내게 붙어있었다. 잠시라도 소파나 침대에 걸터앉으면 바로 깨서 울어댔다. 덕분에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아이를 안고 집 안을 배회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안아달라 보채는 아이는 ‘손탔다‘며 욕을 먹었다. 열심히 안아준 엄마의 잘못이라고 했다. - P117

"그 시기에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엄마기‘잖아요."
누군가 ‘엄마기‘라는 말을 꺼냈다.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소년이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엄마는 ‘엄마기‘를 겪는다.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정신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이때 불안이나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시기의 감정 변화를 대변하는 말은 내가 알기로 ‘산후우울증‘뿐이다. 출산 이후 85퍼센트의 여성이 우울감을 느낀다곤 하지만, 나의 복합적인 감정에 ‘산후우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니 납득도 치유도 되지 않았다. 상태만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만난 ‘엄마기‘라는 말은 ‘환자, 비정상‘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 P121

모성의 후광이 엄마를 가호해서 육아체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육아는 단순노동이다. 그저 많이 하다 보면 어떻게든 잘하게 된다. 육아체질이란 없다. - P124

고정된 성역할을 가르치지 말자고 남편과 이야기했고 그도 동의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그 와중에도 얄미운 말을 덧붙였다. "알겠어. 그래도 분홍색으로 된 거 말고!" 분홍색으로 된 간호사 놀이 세트를 아들에게 사주고 싶은 이유는 ‘분홍색‘과 ‘간호사‘를 아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자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고, 간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 P134

여자에게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남자아이에게만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면 충분할까? 남자아이도 자신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자기를 만지려고 할 때 원하지 않는 스킨십을 거부할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나중에 젠더감수성에서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 P135

"엄마 고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이에게 일격을 당했다. 남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고추’는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술술 말하면서, 여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려니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고추‘가 있냐고 묻기에 ‘다른 것‘이 있다고만 답했다. ‘없다‘고 하면 여성을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어릴 때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가르쳐줬는지 떠올랐다. ‘초초‘, 너무 귀여운(?) 단어였다. 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말았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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