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법정화 현상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미 법정화 현상의 외부를 상상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콘텐츠와 관심경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관심경제란 관심에도 비용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 이를 경제적 논리로 파악하는 개념이다. 관심의 산출물은 정보인 만큼 정보와 관련이 큰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발전한 개념이었는데, 누구나 정보 처리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정보 과잉시대가 도래하면서 관심경제의 논리가 대중의 일상에도 침투하게 되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의사 결정에서 개인이 참조할 수 있는 정보량은 이전 시대의 소박한 실천 지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 P115
수입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뒤늦게 상업 출판이 고개를 들었다. 방각본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된 방각본은 최소 500부 이상을 찍었다. 품질은 조악했지만 관원들에게 내리기 위한 국가의 출판물이나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개인 출판물과 달리 서적 보급에 기여했다. 다만 필독서조차 구하기 어려워 베껴 써야 하는 열악한 현실의 대안이었을 뿐 강고한 도덕주의가 여전히 출판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 P131
그러면서 원하는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길을 둘러 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거시적 관점과 부가적 정보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부가적으로 획득하는 정보가 오히려 더 가치 있을 가능성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 P136
한 영화가 특정 장면을 지루하게 묘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 끌기가 아니라 어떤 예술적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상영시간을 온전히 사용할 때 제대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닝 타임은 결코 자의적으로 조절해서는 안 되는 절댓값인 셈이다. 그렇다면 유튜브나넷플릭스는 왜 그런 기능을 굳이 집어넣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예술작품이기 이전에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가속이다. 20세기가 무의식을 발견한 감속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데이터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가속의 시대다. - P155
심지어 자신의 입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긴다. 우리 자신이 특정 콘텐츠의 생산물일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 - P158
영화가 특정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수용된다면 콘텐츠는 모든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수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콘텐츠는 1979년에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79년은 하루키의 첫 소설이 발표된 해이지만 워크맨이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 이후 우리는 음악을 어디서 - P160
든, 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배경 음악이 깔린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하루키 소설이 가진 독특함은 관객이라는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혼자 묵묵히 눈을 치울 뿐이다. 때로는 집중하면서 때로는 분산되면서.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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