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황적 지식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참인 것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한계인식을 포함하는 지식이다. - P105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원론의 미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암시할 수 있다. (…) 나는 여신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

해러웨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책은 1991년에 출판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다. 이 책은 19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써 내려갔던 다양한 주제의 논문 묶음으로, 특히 「사이보그 선언」(1985)이 유명하다. - P110

실해러웨이의 이러한 사이보그 개념은 여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이보그를 통해서 해러웨이는 질문한다. 정말 ‘여성‘이라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 실상 젠더, 인종, 계급 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식민 자본주의의 모순된 사회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강요된 성취다. 이때 ‘우리‘로 묶은 이는 누구이고, 그 ‘우리‘에 속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단일한 우리‘라는 묶음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라고 불리는 강력한 정치적 신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사람들이, 어떤 정체성들을 이용했는가? - P112

오히려 해러웨이는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특히 현대의 문화는 인간의 정상 상황을 고장 나지않은 상태, 즉 건강으로 삼는다. 건강에 대한 찬미는 죽음에 대한 감춤과 질병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장과 질병은 그저 부정적인 것일까? - P115

시몬 베유는 중력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조건을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검토한 인물이다. 그는우리를 중력에 묶어두는 구속력과 이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의 운동에 관해 사유한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두가지 힘이 우주를 통치한다. 빛과 중력. 두 힘은 물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 P121

베유는 공장 노동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뿌리 없는 자들의 문제"라 진단한다. 이들은 소외와 박탈로 일상을 영위하는 노동자 계급이며, 소속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사람들로서 공허한 상실감이나 무료한 권태감 속에 생을 영위한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P133

시몬 베유의 주된 사상은 중력과 은총에 나타나있다. 시몬 베유는 인간을 폭력과 고통으로 이끄는 ‘중력의 삶’에 대해 사유한다. 당대의 과학 지식을 수용했던 베유는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에너지 역시도 중력의 법칙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외부의 에너지에 의탁하여 삶을 영위한다. 인간에게 외부의 에너지는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며,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외부의 에너지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중력의 법칙은 특히 인간이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 P135

고통받는 자는 누구나 자기 고통을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혹은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남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게 된다. 이것은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실제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은 줄어든다. 아주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또 어느 누구도 괴롭힐 힘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기 안에 그대로 남아 그를 독살시키게된다. - P137

시몬 베유를 평생 시달리게 한 것은 자아라는 딱딱한 알맹이였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세계의 심판관처럼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고통만을 울부짖으며 타인을 도구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이들을 그저 바라보기만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칼날을 지닌 검은 때로 사람을 외부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도 하지만, 판단과 결합한 죄책감은 자신이 돕지 못한 사람을 도울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는, 오히려 죄책감은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방어적 행동으로 변질되어 폭력의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기력으로 사람을 침잠시키기도 한다. 시몬 베유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 P140

크리스테바는 존재의 언어를 남성의 것으로 독점하거나, 육체와 무관한 순수한 정신적인 활동으로보는 전통적 언어관에 이의를 제기한다. 말하는 존재는 언제나 추상의 세계와 육체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고,
그 불가사의한 접면에서 말한다. 언어는 육체로부터 흘러나오고, 섹슈얼리티가 침투하면서 작동한다.
크리스테바는 ‘보편적 인간‘의 지위를 갖고 말하기와 글쓰기를 행하는 목소리가 실은 ‘특정 남성’의 목소리임을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남성의 말하기라는 경계를 넘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고 글쓰기‘를 사유한다. 그리고 이 여성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경계를 위반하여, 과잉으로 흐르고 분출하는 것을 목도한다. - P148

크리스테바는 구조의 완결성과 자족성에서 벗어난, 역동적 의미 생산에 대한 탐구를 상호텍스트성이라는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상호텍스트성은 무엇보다도 텍스트의 유일한 소유자이자 창조자로 여겨져온 작가의 위상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의미가 텍스트를 서술한 작가의 독창적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는 우선 기존의 개별적 텍스트들 그리고 서술의 규율과 관습에의존하며,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다. - P155

정신분석적 경험은 말하는 존재와 언어의 야수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나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정신분석이 솔직하게 드러내는욕망과 증오의 배경에 대항하는 정치적 모델들이 내게는 거리가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방식인 것처럼보인다. 공포의 힘과 아브젝시옹처럼 말이다.

아브젝시옹은 비체(卑體)로 번역된다. 이는 언어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 P161

크리스테바는 비체를 통해 사람이 나와 다른 타인, 이방인들에게 매혹되면서 동시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동질적인 소속감 강화를 꾀하는 내집단은 비체와 타인을 소비할 수 있을 때는 받아들인다. 언제나 모호한 경계를 가진 존재에게 끊임없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질문하고, 같은 편이면 포섭하고 다른 편이면 배척한다. 그러나 비체는 언제나 경계 근처에 있고 동질의 내부로 결코 들어올 수 없기에,
이것이 동질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질 경우 격렬한 열광으로 뭉친 내집단에게 곧장 극단적 혐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P164

나는 여성들이 복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단수로 말해질 수 없다. 여성은 복수다. 여성주의운동은 추상적인 단일 여성 서사와의 동일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처지와 위치에 있는 여성이 투쟁의 역사를 거쳐 확인한 가부장제의 분명한 차별에 함께 저항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함께 싸운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고통에 바로 공감하여 연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시에서 비롯된 고통은, 내가 느껴본 고통에만 민감한 데 그쳐버릴 수도 있다.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한다는 말을 내가 느껴본, 혹은 나와가까운 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만 오인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의 서사 일부로 통합하는 근대적 습관에 빠지기 쉽다. 고통의 가치를 규정하는 최종 심급을 ‘나‘라는 자기중심으로 수렴하는 방식을,
여성주의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 P174

자기중심적 서사 구축에서 벗어나, 차이를 사상하지 않으면서, 차이에서 의미 있는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서사의 방법이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은 결코 종결될 수 없는 여성주의의 과제이기도 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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