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단도 어디서나 글을 썼어요. 애들 재우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애들 자고 나면 식탁에서 쓰거나 소파에서 쓰고, 온갖 군데 책을 가져다놓고. 그렇게 5년 걸려서 쓰는 거예요. 그러면서 느끼는 거죠. 내 공간,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도 없고, ‘내가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한가‘ ‘여기서 이렇게 주부로사는 게 행복한가‘를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전에도언제나 어딘가 아픈 느낌, 울적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주부들이 겪고 있는 문제고, 그렇다면 이상하다는 거죠. - P170

베티 프리단은 바로 그런 ‘여성성의 신화‘에 도전해요. ‘애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라는 신화에 ‘엄마만 애를 키우면 애가 아주 불행해진다. 특히 딸이 가장 불행해진다‘라고 맞서죠. 불행한 여성들이 아이를 자기 성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아이들과 아주 이상한 의존관계, 나쁜 방식의 공생관계를 만들어요. 실제로 프리단이 관찰을 해보니까 아이들의 정서적 문제가 이럴 때 많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딸에게 결혼이 여성의 행복이라고 주입을 하고, 딸이 자기 살림을 꾸리게 하려고 빨리 결혼하게 만드는 게 여성성의 신화 하나라는 거예요. - P171

그런데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거죠. ‘우리가 참정권 가져봤자 남성들이 항상 권력을 쥐고 우리가 누구인지 계속 대신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냐. 이제 우리 입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하겠다.‘ 여성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하겠다는 선언이죠. 그런 점에서 남성과 다른 여성의 ‘차이‘를 여성 스스로 말하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2물결 페미니즘의 중요한 성찰인 거예요. 그래서 보통 여성의 운명이라고 여겨져왔던 결혼, 출산이라는 부분에 착목해서 출발하는 거죠. - P174

이 제2물결 페미니즘은 한국에 수용되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도 불렸고요. 그런데 저는 페미니즘 자체가 래디컬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곧 래디컬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래디컬‘이라는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이에요. ‘뿌리‘라는 말에서 왔어요. 페미니즘이 래디컬하다는 것, 즉 뿌리를 건드린다는 건 지금의 질서에 도전적인 이야기를 페미니즘이 다하기 때문이에요. - P175

특히나 이 래디컬함은 여성이 남성 인간과 같지 않다는 그 차이를 아주 중요히 여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요. 제1물결 페미니즘이 동일성, ‘우리가 같은 인간이다’라는 걸 외쳤다면, 제2물결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이 말하지 않는 여성성에 대해서 여성인 내가 이야기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남성이 규정했던 그 여성성이 신화라는 걸 밝히고 그 신화를 깨는 운동들을 해요. - P176

여성성의 신화》가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다. 이 책을 쓰기기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여성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를 모두 수동적으로 만들고 서로 떨어뜨려 놓아 현실에 널려있는 여러 문제와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던 그 신화에 결박되어, 나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부엌 바닥을 왁스칠하면서 희열감을 느끼지 못하는 내게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 P177

그런데 프리단은 ‘사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기 선택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를 물어요. 그리고 우리가 완전한 자유의지로써 그 많은 선택들을 하는 것인지를 묻죠. - P181

즉 시간과 공간의 조건하에 있는 생각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걸 보편화시켜요. 보편화시킨다는 건탈시간적인 것, 탈공간적인 것, 맥락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인간이라면 이래야 한다‘, ‘여자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게 어떤 시기의 발명품일 수 있어요. - P191

저는 이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게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 기존에 본질이라고 했던 내용을 의문시하고, 기존의 규정을 새로 규정하고, 새로운 설명을 마련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누가 나한테 ‘너는 누구다’라고 해서 거기에 ‘왜 그런 건데?‘라고 했더니 ‘원래 그런 거니까’라고 하면요, ‘네가 원래 이거니까 넌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식의 당위가따라오잖아요. 이거 안 하면 이상한 사람이 돼요. 그런데 내가 ‘본질? 나는 그런 거 모르겠고, 내가 나를 설명하고 나를 규명해’ 이러면, 설명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정당성이 필요해지죠. 정당성이라는 건 이유잖아요. 그렇게 나를 설명하는 내가 가진 이유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기 스스로 당위를 만들수 있어요. - P194

본질이 있어야만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나를 설명하는 정당성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의 규칙을 마련할 수있어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규칙의조건에 참여하는 것과 참여하지 않고 규칙을 따라야 하는 곳은 완전 달라요. - P194

이런 걸 주체성이라고 불러요. 자율이라고 하죠. 스스로 자기의 규범을 만드는 존재가 되는 거죠. 제2물결 페미니즘의 중요한 목적이 뭐죠? 여성이 주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거죠. 자기 설명을 통해서 ‘여성이 어떻게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마저도 마련해내는 자율과 주체성의 내용들을 만들어내는 게 제2물결 페미니즘의 큰 관심일 수밖에 없는 거죠. - P195

그리고 나서 내린 결론이 이 여성성의 신화를 만든 주범은 바로 사회라는 거예요. 더 재미있는 건, 사회가 제시한 여성성에는 아내, 엄마만 있다는 거죠. 여자들의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아내, 엄마 이외의 여성적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죠? 여성이 아내, 엄마 외의 다른 경험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경고라는 거예요. - P197

신화라는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게, 제도적으로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고,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누구의 강요 없이 자기 스스로가 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니까요. - P200

그러니까 여기서 신화라는 건 아주 이중적인 것 같아요. 자유의지, 자유 선택의 밑에 깔린 그 기제를 신화라고 표현한 것 같고, 동시에 여성성이라는 게 원래부터 있다고 하는 본질주의, 즉 여성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고 하는 본질주의 자체가 신화적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신화를 말한다는 거죠. - P200

구조와 선택 사이의 매개인 신화의 장치들을 잡아내고 그 속에서 ‘내 몸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그 신화가 작동되는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내 몸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크게 있다고 생각해요. 신화의 작동으로 내가 선택이라고 믿는 상황이 생겨났다는 점을 분석한 것이 프리단의 업적이죠. 이러한 프리단의 분석은 제2물결 페미니즘의 중요한 구호,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와 연관됩니다. 이 구호는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누가 구별하느냐고 묻는 거잖아요. 다시 말해, 한 개인의 선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사적인 영역이 실은 굉장히 정치적인 일이 발생하는 곳임을 밝힐 뿐 아니라, 이영역이 정치적 영역임을 여성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게끔 은폐하는 구조와 기제들을 비판하는 거예요. - P216

그러니까 여성들이 그 구매를 하게끔 하는 소비주의와 연결된다는 거죠. "적당히 조작된 미국 주부들은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정체성과 목표를 찾고, 창조력을 느끼며, 자아를 실현한다고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부족한 성적 희열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가 여성들이 미국 전체 구매력의 7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자랑할 때 나는 갑자기 그 사실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깨달았다. 또 미국 여성들이 상품을 구입하는 데 있어 위력적이라는 것과, 수많은 상품들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P221

여성성의 신화가 결국 여성들을 공허하게 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집안일을 끝내지 않는다는 게 프리단의 아주 중요한 통찰이에요. "여성성의 신화에 따라 산다는 것은 역사의 되돌림이고, 인간의 진보에 대한 가치를저하시키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당연히 그렇다는 거죠.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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