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 P72
교수들은 지금 내가 처음 교수 생활을 할 때보다 10배 정도 논문을 더 쓴다. 그래서 인문학이 그만큼 발전했는가. 양적으로는 그렇다. 다만이런 말을 덧붙여둘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연구자들이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을 열심히 읽었으며, 누가 어떤 논문을 썼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열심히 읽지 않는다. 논문을 읽는 사람은 쓴 사람 자신과 두세 명의 심사자뿐이라는 말도 있다. - P99
노래로 불러야 할 서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숫자도 그것이 섬의 수와 연결될 때는 시적 환기력을 지닌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 세인트로렌스강과 온타리오호수가 만나는 지역의 1860여 개 섬을 가리키는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샐러드 드레싱의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번뇌와 오욕으로부터 보호된 세계가 바다로 격리된 섬에는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P102
사람은 산업 역군이기 전에 사람이고 국가의 간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에 맞게 사람을 교양하려는 시도는 벌써 사람을 배반한다. 사람이 국가나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진실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기 쉬운 진실이다. 학생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혹시라도 부총리의 마음속에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인성부터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 P113
소포클레스는 이 전설로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만들었다. 내용은 동일하나 이야기하는 방법이 같지는 않다. 물론 비극의 삼단일법칙, 단일한 장소에서, 하루 이내의 단일한 시간에, 단일한 사건을다뤄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연극은 가뭄과 역병에시달리는 나라 테베의 궁정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하며,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결혼‘하여 나라에 재난을 불러온 추악한 범인을 찾아내는 수사 과정을 거쳐, 왕이 바로 저 자신인 범인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 P115
이렇게 말하니 모파상이 전하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나, 두마리 파리나, 두 개의 손이나, 두개의 코가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나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단 몇줄의 문장으로 뚜렷이 개별화하고 다른 모든 인물이나 사물과 구별될 수 있도록 표현하라"고 했다. - P118
예술가는 남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다른 길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저 상투적인 ‘살랑살랑’ 대신 다른 말을 써 넣는다면 당신은 벌써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벌써 예술가다. - P119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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