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무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성폭력 피해자가 극소수라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즉, 성폭력 현실 자체를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 무지다. 두 번째는 성폭력 피해가 직접 발생했을 때만 여성의 건강권이 손상받는다는 인식이다. 이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 그리고 건강권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발생한다. - P158

말하기는 그 자체로 치유와 회복의 효과가 있다. 심리적 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객관화하는 데 중요한 과정이며, 심리적 외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텍사스 대학교의 한 연구에 따르면, 심리적 외상을 말하지 않았을 때 더 높은 수준의 불안증, 우울증, 불면증을 겪게 된다고 한다. 이 연구는 심리적 외상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 신체건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심리적 외상 경험을 털어놓은 집단은 혈압, 심장박동률 등이 더욱 안정되었고 신체의 면역체계도 향상되었다. - P162

성폭력과 건강권 문제를 제기하면, 피해자에 대한 의료적·정서적 지원이 중요하다는 흐름으로 모아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건강 문제에서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을 빼놓고 논의되는 치료는 무력하다.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부수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젠더 불평등, 이분법적 성역할, 폭력을 머금은 이성 연애 각본의 해체와 재구성 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성폭력이 발생시키는 여러 질병에 대한 적극적 예방이다. 성폭력 현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성평등한 건강권은 없다.
WHO에 따르면 건강 불평등은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건강 차이 중 불필요하고 피할 수 있으며 부당하고 불공정한 부분이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부분이다. 성폭력이 바로 성별 건강 불평등을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자기 몸에 대한 폭력을 통제할 권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건강권을 말하기 어렵다.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여성 건강권은 없다. - P167

그런데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남성의 해고에만 주목하며 ‘고개 숙인 아버지’를 위로하기 바빴다. 일상에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들에게는 그 남성들을 위로하라는 사회적 의무가 주어졌다. 수많은 언론은 남편 기죽지 않게 잘 - P173

보살피라고 주문하면서, 남편이 실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내의 잘못으로 돌리기도 했다. "IMF 한파를 뛰어넘는 데는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고, "남편들이 실직 사실을 알릴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는 아내들의 잘못도 크다"면서 "남편을 왕처럼 최고라고 추어올려주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취업하면 실업자 남편이 기죽을까 봐 걱정했고, 취업을 못하면 무능한 아내로 취급받기도 했다. 직장을 잃은 남편들은 그 고통을 아내에게 퍼부어, IMF 시기에 남편의 아내 폭력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있다.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은 우선 해고를 통해 경제적 위험을 흡수하는 안전판으로 동원되었다. 가족 안에서는 남편 기를 살리는 아내 역할, 알뜰한 살림과 취업으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능력 있는 엄마 역할을 할당받았다. 절대적 희생을 통해 가정붕괴의 위험을 막는 에어백 역할을 요구받은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현재에도 계속되는 일상이지만, 당시 상황은 이를 더 극단화했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