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은 여성스럽지 않잖아요. 그런데 자기한테 나타난 출혈이나 갑상선암 같은 병들은 다 여성스러워. 현기증이나 빈혈도 영화 속 여자 주인공 병이잖아. 나는 병에 걸려도 꼭 폐암 같은 남자병에 걸려.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여성스럽기 힘든데 말이야."
질병에도 여성스럽다는 말이 붙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자궁이나 전립선 질환이 아니라 폐암, 간암, 위암 같은 질환을 여성스러운 질병과 남성스러운 질병으로 구분하는 상상력이 당혹스러웠다. - P110

질병보다 위험한 질병 이미지

사실 나도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llness as Metaphor》에 따르면 19세기에는 결핵이 ‘천재들의 병‘, ‘예술가들이 걸리는 병’으로 낭만화되었다. 손택은 한 프랑스 시인이 45킬로그램이 넘는 사람에 대해 서정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하며, 결핵으로 인한 창백함, 쇠약함, 무기력, 저체중 등이 숭상되었던 문화를 보여준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창백한 혈색과 가냘픈 몸을 여성의 이상적 용모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19세기 결핵 문화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 P113

이미 질병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데심지어 병명에 따라 여성스러움을 구분하고 집착하는 현실이라니, 어디서부터 변화를 말해야 할지 아득하다. 알다시피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것은 없다. 여성과 나약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 논리적 필연적 개연성은 없다는 뜻이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그리고 잔인하게 머물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질병 앞에서조차 여성스러움을 고민하게 되는 현실이 먹먹하다. 여성성에 의해 포획된 혹은 조각난 우리 몸들은 어디서부터 복원을 시작할 수 있을까. - P114

‘여성이 몸‘으로 환원되는 현실과 ‘동물이 고기‘로 환원되는 현실의 연결고리를 발견했을 때 마주한 감정, 더 많은 새끼를 생산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임신하고 그 임신한 새끼를 평생 빼앗기는 암소, 암퇘지, 암탉의 현실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여성을 ‘소유‘하는 행위에 대해 ‘먹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의 직접성과,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암컷 고기 덩어리로 묘사한다"고 지적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의 말도 머리를 맴돌았다. 그 말이 잊힐 때쯤에는 캐럴 애덤스Carol Adams가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에서 "고기는 포르노와 유사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기 이전에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애덤스는 이 책에서 남성 지배와 육식 문화의 상관성을 밝혔다). - P118

우리는 모두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추구하며 산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여러 의미 중 하나는 낯선 것에서 오는 어색함이나 불편한 느낌을 섣불리 상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낯설고 불편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실체를 조물락거려보는 일이다. - P121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타인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돌봄은 감정노동을 동반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영역이다. 요즘에는 돌봄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덕목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돌봄노동은 여전히 성별화되어 여성에게만 갇힌 채 순환되지 못하고 있다. - P125

어떤 이들은 생활동반자 관계법이 의미 있지만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제가 적합한 시기일까? 1990년대에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당시 거리로 호주제 폐지서명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일부 시민들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심지어 한국의 가족제도를 흔든다며 우리에게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 운동이 열정적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폐지되자, 바로 그 시기를 즈음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여아 성 감별 낙태가 한국에서 꾸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족 내 여성의 지위와 관련한 직간접 변화도 일어났다. 사회 변화가 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제도 변화가 사회변화를 추동하기도 한다. - P137

비혼과 1인 가구의 증가는 기존의 가족 안에 묶어둔 돌봄노동을 사회화하는 좋은 촉진제다. 특히 1인 가구를 전제로 보건의료 관련 제도가 만들어지고 시행될 경우, 이는 1인 가구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1인 가구를 전제로 한 정책은 가족을 1차적 복지 담당자로 놓던 문화를 해체시킨다. 비로소 사회의 구성단위가 가족이 아닌 개인으로 ‘현대화’된다는 의미다. 이로써 혈연가족이나 다인 가구 안에서 ‘복지 담당자’이기만 했던 여성들도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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