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중독자가 한심한 의지박약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중독자는 중독의 대상을 향해 확고한 의지를 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평일의 시간 동안은 내 마음대로 마음껏 고주망태가 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주말이었다. 온 가족이 하루 종일 함께 있으니 술을 마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집에서는 마시기 힘드니 외식을 하자! 그럼 자연스럽게 술을 주문할 수 있으니까. 대낮에도 갈비나 삼겹살을 먹자고 주장하고 치맥을 시키자고 졸랐다. 남편의 불만스러운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한 척 술을 주문했다. - P23

단지 시각적인 단서만 트리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잠들기 직전이나 해가 지고 난 후 등 매번 특정한 시간에 술을 마셨다면그 시간 자체가 술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자극, 즉 트리거가 된다. 잠들기 전 몇 시간 동안의 익숙한 무료함이 습관적으로 음주를 하도록 만든다. - P43

"처음에는 우울감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셨을 거예요.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그러다 보니 언제든 우울감을 느낄 때마다. 술을 갈망하게 되는 식으로 뇌가 적응을 한 거예요.
그런데 알코올의존이 심해지면 신경의 알코올 민감도가 떨어져서 예전처럼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아요. 그래도 일단 우울하니까 술은 계속 당겨요. 우울이라는 감정, 그 자체가 트리거가 되어서 그런 거예요." - P47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술의 맛에는 그 향과 산미, 쓴맛, 단맛 외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바로 ‘취기‘이다. 우리 뇌에 작용해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것, 또는 마시기도 전부터 취기에 대한 기대로 이미 술을 마신 것처럼 반응하게 만드는 것. 이런 뇌 신경상의 변화가 ‘맛‘에도 반영되는 거다. 일곱 살 아이가 마시기에는 그저 씁쓸한 맥주가 30대 후반의 샐러리맨에게는 다디단 감로수처럼 느껴진 것은 그 음료가 가져다줄 만족감, 느긋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맛이라는 주관적인 감각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 P61

맥주를 갓 따서 꿀떡꿀떡 마신 후 나른하게 늘어지며 온 세상을 향해 관대해지는 그 느낌! 그것이 없다면 도대체 왜 술을 먹겠느냔 말이다! 결국 치맥을 한 캔으로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학 시절 학교 앞 치킨집에서 친구와 각 3000시시를 마셔 해치우던 패기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오르가슴을 잃어버린 「섹스 앤 더 시티」의 서맨사가 외친 유명한 대사처럼 속으로 울부짖었다. "다 사라졌어! (IT‘S GONE!)" - P63

세상사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다. 정상적인 삶, 멀쩡한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취하는 즐거움은 미뤄두어야한다.(내심 언젠가 중독이 완전히 치료되면 술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겠지 하는 기대도 있다.) - P67

술의 힘은 강력하다. 인력이 있는 것처럼 나를 끌어당겼고, 난 의지가 박탈당한 느낌으로 술병에 손을 댔다. 나는 일방적으로 차인 전 여친이 된 기분이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옛 애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듯 술에 대한 생각을, 그 미친 듯한 집착을 멈출 수가 없었다. - P69

가끔은 내가 힘든 일상을 견딘 보상으로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을 마시기 위해 힘겨운 일상을 견디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돈을 받기 위해 갖은 고통을 감내하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뭔가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다. - P76

하지만 이런 생각들조차 내가 계속 술을 마시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단주할 수 없다고 이미 결론 내린 사람은 음주 외의 생활방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 혹시 술을 절제하겠다면서 계속 조금씩 마셔대는 건 헤어진 애인과 친구 사이로 남겠다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 다들 알다시피 그런 관계는 결코 좋게 끝나질 않는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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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2-02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뽑아 올리신 글 다 읽었는데 흥미롭네요. 지루함이 없는 글이에요.
글을 맛있게 읽고 갑니다.

햇살과함께 2021-12-02 15:56   좋아요 0 | URL
혼술 좋아하는 저로써는 너무 뜨끔한 문장들이 많아서 다 밑줄긋게 되네요~ 페크님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