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암살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0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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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에 대한 글을 쓰다가 예전에 읽었던 이 책에 대한 촌평을 잠시 옮겨온다..

 

꼬박 이틀에 걸쳐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in>(마거릿 애트우드, 민음사, 2010)을 읽다..
솔직히 <압도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여성의 <회고록>, 그리고 액자소설, 그리고 액자소설 속의 또 다른 액자소설(SF)이라는 세 이야기를 교차시켜가면서, 작가는 20세기 캐나다라는 한 사회가 경험했던 두 <전후>를 너무나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매료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특히 주인공(아이리스)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풀어내는 기억들의 서술은 무엇인가 거대한 힘에 의해 뒤틀려버린, 그리고 그 무력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과거형) 여성의 페이소스가 너무나 강하게 배어 있어, 읽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을 쓸어내리게 하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문체가 주는 마력만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그 느낌은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었을 때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세상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스노우맨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보다는 훨씬 더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는 어찌됐건 그 <지저분한 욕망과 속물들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고, 또 자신과 여동생(로라)을 타락시킨 그들에게 자기 나름의 처절한 <복수>를 감행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그녀의 글쓰기는 단지 좌절과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기념비를 세우는 것, 그리고 <저주받은 가문의 내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손녀에 대한 희망의 전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지금의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니 구태연하고 또 부질 없어서 오늘은 그냥 이 느낌을 그대로 묻어두기로 한다..
아마 무엇인가 글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아니면 <기념비>를 만드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로라는 그늘 속에 가려졌다. 몇 년이 더 흐르면 마치 그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나는 침묵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원했던가?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기념비 같은 것. 그렇지만 결국 생각해 보면 기념비란 견뎌 낸 상처를 기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견뎌 내고 혐오한. 기억이 없다면 복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도록> <나를 기억해다오> <쇠약한 손으로 네게 던진다> 목마른 유령들의 외침.
죽은 자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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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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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찌기 프로이트S. Freud는 <애도와 멜랑콜리>(1917)라는 논문에서, 진정한 애도란 상실해버린 과거의 대상을 타자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프로이드적 의미에서 멜랑콜리는 대상에서 강제로 철회된 리비도가 다른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나르시시즘적 단계로의 퇴행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심적 우울증을 의미한다. 멜랑콜리적 주체는 상실된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극도의 자기비하나 학대로 자아를 소모시키며,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절망감’,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등의 증상을 호소한다. 말 그대로 산 죽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멜랑콜리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는 한 때 존재했던, 하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그 대상에게 부여된 리비도를 거두어들이고, 애착을 위한 새로운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이 과정은 물론 커다란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포기된 대상은 나의 일부로 화하고, 나는 바로 자아의 현존 속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애도론의 핵심이었다.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어차피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독려한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산 자는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는 것, 즉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이 트라우마의 역설(혹은 억압된 자의 귀환)에 충분히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프로이트의 애도론이 트라우마가 일깨우는 환기력을 간과했다는 라캉J. Lacan의 지적은 프로이트 이후의 애도론을 전개했던 논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끌었다. 라캉에게 있어 트라우마는 사라진 타자와 만나는 한 가지 방식이자, 타자의 호소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했음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응답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 즉 근본적인 윤리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었다. 상실의 슬픔을 봉합하고 이를 승화하려는 시도는 환자로서 주체가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처방일 수는 있지만, 성급한 봉합은 결국 그러한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관계성까지 묻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예전에 썼던 어떤 글에서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모리슨의 이 책이  포스트콜로니얼 논자들 사이에서 그토록 주목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같다.. 햄릿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음매가 어긋나버린 시간"The Time is out of joint, 바로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을, 그녀는 너무도 처절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걸작>이라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평은 너무나 적확하다.. 그녀의 <눈 먼 암살자>의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왠지 <빌러비드>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124번지에 출몰하는 유령은 처음엔 "서러운 것일뿐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덴버의 말처럼, 그것은 서러운 것도 아닌 단지 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폴 디의 출현과 기묘하게 맞물려 현신한 <빌러비드>는 사람들의 그런 합리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였다..

여기에는 과거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된 비극적인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스위트홈으로부터) 세서의 탈주, 자신의 아이들, 그리고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와의 극적인 재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스위트홈의 노예주와 노예사냥꾼이 그 집에 들어닥치면서 이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아이의 목에 톱을 들이댄다.. 그것은 모성애일까, 아니면 모성애를 넘어선 광기일까.. 그리고 목에서 피를 쏟아내고 죽어가는 아이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또 언니와 오빠들이 엄마의 손에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았던 막내 덴버는 과연 엄마의 그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모리슨이 <다성성>이라는 수사를 차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도저히 하나의 시점/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뭐, 이에 대해서는 영문학을 전공하시는 훌륭하신 분들께서 여러 번 강조하셨을테니 넘어가기로 한다..

 

내 관심은 여전히 애도와 멜랑콜리, 그리고 억압된 것의 귀환과 유령의 문제다..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라는 존재를 창조해냄으로써 19세기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환기시켰다.. 그것이 바로 멜랑콜리가 갖는 힘이다.. 하지만 빌러비드의 출현에 의해 세서와 덴버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에 덴버를 의지적 주인공으로 재설정하는 것은 글의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더라도 작위적이다.. 그것은 작가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아니, 빌러비드의 출현 이전에, 즉 유령이 출몰하던 124번지의 삶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서는 빌러비드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녀를 죽였다는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출현은 세서의 삶에 있어 파국이 아니라. 기쁨, 충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과연 현실사회에서 빌러비드가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인 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백여 명의 어린 원혼들이 떠다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유민 아빠의 단식이 38일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나는, 우리는, 이 사회는 자신의 목숨을 파괴하면서까지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하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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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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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붙잡혔을 때 닥칠 더 큰 시련을 주지 않기 위해 적들 앞에서 산 아이의 목에 톱질을 하는 어미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죽은 아이가 어느날 자기 집 앞에 나타난다면. 이 작품 앞에서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한 기존의 이론은 진부해진다. 유령과 함께 살기. 또 그로부터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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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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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량을 보았다.. 또 아주 우연히 며칠 전 임진왜란의 전진기지였다는 일본 규슈의 나고야 성터에도 다녀왔고, 또 가고시마에도 다시 다녀왔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예전에 끄적거린 글을 잠시 옮긴다..

 

나는 김훈이라는 작가를 잘 알지 못한다--사실 면식은커녕, 구색을 갖춰놓고 저작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냥, 대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한 번 흉내내고 싶었다.. 어쨌거나-- 항간에 회자되던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은 이미 철이 한참 지난 2009년 이맘때였다.. 가고시마 시절이었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이한 노량해전에 참전한 시마즈(씨)의 고향이자, 7년 전란의 여파로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던--그 때문에 유럽 노예무역시장의 노예가격이 폭락했다고 한다-- 고장에서, 특공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강제연행되어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억을 탐색하는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칼의 노래>의 여운은 꽤나 묵직한 것이었다..

필드를 정하고나서도 얼마 동안은 전혀 몰랐던, 의식한 적도 없었던 역사였다.. 내 주제는 50년 전의 역사였지, 500년 전의 역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파도가 좋아서 지금은 서퍼들이 즐겨 찾는다는 한 해안가는 500년 전에는 한반도에서 납치된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들어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 해안가는 모든 것을 잃고 이 곳으로 밀려온 조선인들이 밟았던 이국의 첫 땅이었다.. 근처에 아직 남아 있는 <고려진자>라는 신사만이 그들의 흔적을 이야기해줄 뿐이다.. 그나마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가고시마에 남아 생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현재까지도 <가고시마의 자랑>이라 불리우는 도공 심수관의 후예들은 아직 이 곳에 터를 이루고, 17대인지 18대인지 가마를 지켜가며 살고 있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나가사키를 거쳐 스페인, 포르투칼로까지 팔려갔다고 한다.. <고려진자>의 석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보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5백년 전과 50년 전이라는 두 시간의 겹쳐짐에 괜한 <비분강개>를 품었다.. 물론 이것을 전문적인 글로 쓰지는 못할 것은 분명했다.. 다만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애써 헛헛한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서, 또 날씨 때문에 <칼의 노래>를 다시 꺼내서 읽고 있다.. 처음 그 책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의아함이었다.. 의심과 회의가 횡행하는 이 간난의 시대에 <성웅 이순신>을 테마로 한 책을 쓴다는 것이 제 정신을 가진 작가가 할 일인가.. 그리고 이런 책이 왜 그렇게 읽혔을까.. 물론 당시 방영된 대하드라마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칼의 노래>는 <성웅>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한 상처입은 인간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군의 살기와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왕의 눈길이 겹쳐지는 남쪽 바다에서 죽을 자리를 찾는 한 사나이의 고독이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래서 연이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모함(왕의 의심)으로 갖은 고문을 당하고, 도합 12척의 배만을 가진, 수군이 없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한 그는 장계를 쓴다..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강력한 <국민교육>의 검은 권력에 오염되어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이 구절을 忠이 아닌 獨으로 읽은 것은 분명 김훈의 비범함이다..

이 책을 끌어당기게 하는, 동시에 불편하게 하는 힘은 분명 문장의 행간행간에 숨어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고독이다.. 그 분노는 (세상에) 주인공(이순신)의 그것과 겹쳐지기도 하고--"영웅이 아닌 나는 속으로 쓸쓸해서 울었다"--, 또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가십을 들추어 볼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하지만 윗 구절은 자신의 분노를 곰삭이며 마치 글자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서 썼을 때 나오는 글이다.. 누군가는 그의 그런 <단문>을 좋아한다고 한다.. 사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오만함>과 <치기>, 혹은 <아집>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영원한 <문학청년>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단문을 잘 쓰는 이도 별로 없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머릿말의 이 대목에서 기형도의 냄새를 맡은 것은 비단 나 혼자뿐일까..--사실, 김훈은 기형도의 "좋은 선배"였다고 한다..-- 글을 쓰기 힘든 가난한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푸념이다--"베고 싶다"--.. 단지 기형도는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고, 김훈은 세 끼 밥을 말없이 꼭꼭 씹어 넘겨가며 꿋꿋이 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나는 김훈을 잘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 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기형도, <시작메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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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GPE 총서 3
지주형 지음 / 책세상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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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연구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0년의 진보정치가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끌어안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대목은 탁월하다. 마침내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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