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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얼마 전 명량을 보았다.. 또 아주 우연히 며칠 전 임진왜란의 전진기지였다는 일본 규슈의 나고야 성터에도 다녀왔고, 또 가고시마에도 다시 다녀왔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예전에 끄적거린 글을 잠시 옮긴다..
나는 김훈이라는 작가를 잘 알지 못한다--사실 면식은커녕, 구색을
갖춰놓고 저작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냥, 대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한 번 흉내내고 싶었다.. 어쨌거나-- 항간에 회자되던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은 이미 철이 한참 지난 2009년 이맘때였다.. 가고시마 시절이었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이한 노량해전에 참전한
시마즈(씨)의 고향이자, 7년 전란의 여파로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던--그 때문에 유럽 노예무역시장의 노예가격이 폭락했다고
한다-- 고장에서, 특공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강제연행되어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억을 탐색하는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칼의
노래>의 여운은 꽤나 묵직한 것이었다..
필드를 정하고나서도 얼마 동안은 전혀 몰랐던, 의식한 적도 없었던 역사였다.. 내 주제는
50년 전의 역사였지, 500년 전의 역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파도가 좋아서 지금은 서퍼들이 즐겨 찾는다는 한 해안가는 500년 전에는
한반도에서 납치된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들어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 해안가는 모든 것을 잃고 이 곳으로 밀려온 조선인들이 밟았던 이국의 첫
땅이었다.. 근처에 아직 남아 있는 <고려진자>라는 신사만이 그들의 흔적을 이야기해줄 뿐이다.. 그나마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가고시마에 남아 생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현재까지도 <가고시마의 자랑>이라 불리우는 도공 심수관의 후예들은 아직 이
곳에 터를 이루고, 17대인지 18대인지 가마를 지켜가며 살고 있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나가사키를 거쳐 스페인, 포르투칼로까지 팔려갔다고
한다.. <고려진자>의 석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보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5백년 전과 50년 전이라는 두 시간의
겹쳐짐에 괜한 <비분강개>를 품었다.. 물론 이것을 전문적인 글로 쓰지는 못할 것은 분명했다.. 다만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애써
헛헛한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서, 또 날씨 때문에 <칼의 노래>를 다시 꺼내서 읽고 있다..
처음 그 책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의아함이었다.. 의심과 회의가 횡행하는 이 간난의 시대에 <성웅 이순신>을 테마로 한 책을
쓴다는 것이 제 정신을 가진 작가가 할 일인가.. 그리고 이런 책이 왜 그렇게 읽혔을까.. 물론 당시 방영된 대하드라마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칼의 노래>는 <성웅>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한 상처입은 인간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군의 살기와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왕의 눈길이 겹쳐지는 남쪽 바다에서 죽을 자리를 찾는 한
사나이의 고독이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래서 연이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모함(왕의
의심)으로 갖은 고문을 당하고, 도합 12척의 배만을 가진, 수군이 없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한 그는 장계를 쓴다..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강력한 <국민교육>의 검은 권력에 오염되어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이
구절을 忠이 아닌 獨으로 읽은 것은 분명 김훈의 비범함이다..
이 책을 끌어당기게 하는, 동시에 불편하게 하는 힘은 분명 문장의
행간행간에 숨어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고독이다.. 그 분노는 (세상에) 주인공(이순신)의 그것과 겹쳐지기도 하고--"영웅이 아닌 나는 속으로
쓸쓸해서 울었다"--, 또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가십을 들추어 볼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하지만 윗 구절은 자신의 분노를 곰삭이며 마치 글자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서 썼을 때 나오는 글이다.. 누군가는 그의 그런
<단문>을 좋아한다고 한다.. 사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오만함>과 <치기>, 혹은
<아집>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영원한 <문학청년>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단문을 잘 쓰는
이도 별로 없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머릿말의 이 대목에서 기형도의 냄새를 맡은 것은 비단 나 혼자뿐일까..--사실,
김훈은 기형도의 "좋은 선배"였다고 한다..-- 글을 쓰기 힘든 가난한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푸념이다--"베고 싶다"--.. 단지 기형도는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고, 김훈은 세 끼 밥을 말없이 꼭꼭 씹어 넘겨가며 꿋꿋이 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나는 김훈을 잘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 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기형도, <시작메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