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일본과 인류학자 (1884-1952) 민속원 아르케북스 11
사카노 토오루 지음, 박호원 옮김 / 민속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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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건 <제국>을 경영한 역사가 있는 일본의 학계에서 나올 수 있는, 또 학문적으로도 의미 있는 연구임에는 분명. 문제는 책의 가격을 꽤 높게 책정했음에도, 책을 만드는데 <무신경한> 출판사에 있다. 번역의 전문성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오탈자 정도는 편집부에서 잡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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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분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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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책. 퀜틴섹션의 몽환적 서사는 포크너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캐디의, 캐디에 의한 캐디를 위한 작품. 포크너의 4부작을 압살롬부터 읽을 것인가, 아니면 이책으로부터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난 이책에서 시작했다. 다음은 내가죽어누워있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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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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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베스트가 될 수 있을 작품. <라임오렌지>가 연상되는 것은 공통감각인가 보다. 모모가 제제보다 더 사연이 기구하지만, 어린 시절 빠져 읽었던 탓인지, 난 여전히 제제에 더 끌린다. 후반부를 조금 압축시켰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롤라 아줌마라는 인물 설정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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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0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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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에 대한 글을 쓰다가 예전에 읽었던 이 책에 대한 촌평을 잠시 옮겨온다..

 

꼬박 이틀에 걸쳐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in>(마거릿 애트우드, 민음사, 2010)을 읽다..
솔직히 <압도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여성의 <회고록>, 그리고 액자소설, 그리고 액자소설 속의 또 다른 액자소설(SF)이라는 세 이야기를 교차시켜가면서, 작가는 20세기 캐나다라는 한 사회가 경험했던 두 <전후>를 너무나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매료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특히 주인공(아이리스)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풀어내는 기억들의 서술은 무엇인가 거대한 힘에 의해 뒤틀려버린, 그리고 그 무력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과거형) 여성의 페이소스가 너무나 강하게 배어 있어, 읽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을 쓸어내리게 하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문체가 주는 마력만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그 느낌은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었을 때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세상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스노우맨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보다는 훨씬 더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는 어찌됐건 그 <지저분한 욕망과 속물들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고, 또 자신과 여동생(로라)을 타락시킨 그들에게 자기 나름의 처절한 <복수>를 감행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그녀의 글쓰기는 단지 좌절과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기념비를 세우는 것, 그리고 <저주받은 가문의 내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손녀에 대한 희망의 전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지금의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니 구태연하고 또 부질 없어서 오늘은 그냥 이 느낌을 그대로 묻어두기로 한다..
아마 무엇인가 글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아니면 <기념비>를 만드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로라는 그늘 속에 가려졌다. 몇 년이 더 흐르면 마치 그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나는 침묵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원했던가?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기념비 같은 것. 그렇지만 결국 생각해 보면 기념비란 견뎌 낸 상처를 기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견뎌 내고 혐오한. 기억이 없다면 복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도록> <나를 기억해다오> <쇠약한 손으로 네게 던진다> 목마른 유령들의 외침.
죽은 자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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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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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프로이트S. Freud는 <애도와 멜랑콜리>(1917)라는 논문에서, 진정한 애도란 상실해버린 과거의 대상을 타자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프로이드적 의미에서 멜랑콜리는 대상에서 강제로 철회된 리비도가 다른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나르시시즘적 단계로의 퇴행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심적 우울증을 의미한다. 멜랑콜리적 주체는 상실된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극도의 자기비하나 학대로 자아를 소모시키며,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절망감’,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등의 증상을 호소한다. 말 그대로 산 죽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멜랑콜리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는 한 때 존재했던, 하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그 대상에게 부여된 리비도를 거두어들이고, 애착을 위한 새로운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이 과정은 물론 커다란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포기된 대상은 나의 일부로 화하고, 나는 바로 자아의 현존 속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애도론의 핵심이었다.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어차피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독려한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산 자는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는 것, 즉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이 트라우마의 역설(혹은 억압된 자의 귀환)에 충분히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프로이트의 애도론이 트라우마가 일깨우는 환기력을 간과했다는 라캉J. Lacan의 지적은 프로이트 이후의 애도론을 전개했던 논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끌었다. 라캉에게 있어 트라우마는 사라진 타자와 만나는 한 가지 방식이자, 타자의 호소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했음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응답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 즉 근본적인 윤리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었다. 상실의 슬픔을 봉합하고 이를 승화하려는 시도는 환자로서 주체가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처방일 수는 있지만, 성급한 봉합은 결국 그러한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관계성까지 묻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예전에 썼던 어떤 글에서 애도와 멜랑콜리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모리슨의 이 책이  포스트콜로니얼 논자들 사이에서 그토록 주목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같다.. 햄릿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음매가 어긋나버린 시간"The Time is out of joint, 바로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을, 그녀는 너무도 처절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걸작>이라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평은 너무나 적확하다.. 그녀의 <눈 먼 암살자>의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왠지 <빌러비드>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124번지에 출몰하는 유령은 처음엔 "서러운 것일뿐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덴버의 말처럼, 그것은 서러운 것도 아닌 단지 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폴 디의 출현과 기묘하게 맞물려 현신한 <빌러비드>는 사람들의 그런 합리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였다..

여기에는 과거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된 비극적인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스위트홈으로부터) 세서의 탈주, 자신의 아이들, 그리고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와의 극적인 재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스위트홈의 노예주와 노예사냥꾼이 그 집에 들어닥치면서 이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아이의 목에 톱을 들이댄다.. 그것은 모성애일까, 아니면 모성애를 넘어선 광기일까.. 그리고 목에서 피를 쏟아내고 죽어가는 아이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또 언니와 오빠들이 엄마의 손에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았던 막내 덴버는 과연 엄마의 그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모리슨이 <다성성>이라는 수사를 차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도저히 하나의 시점/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뭐, 이에 대해서는 영문학을 전공하시는 훌륭하신 분들께서 여러 번 강조하셨을테니 넘어가기로 한다..

 

내 관심은 여전히 애도와 멜랑콜리, 그리고 억압된 것의 귀환과 유령의 문제다..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라는 존재를 창조해냄으로써 19세기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환기시켰다.. 그것이 바로 멜랑콜리가 갖는 힘이다.. 하지만 빌러비드의 출현에 의해 세서와 덴버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에 덴버를 의지적 주인공으로 재설정하는 것은 글의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더라도 작위적이다.. 그것은 작가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아니, 빌러비드의 출현 이전에, 즉 유령이 출몰하던 124번지의 삶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서는 빌러비드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녀를 죽였다는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출현은 세서의 삶에 있어 파국이 아니라. 기쁨, 충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과연 현실사회에서 빌러비드가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인 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백여 명의 어린 원혼들이 떠다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유민 아빠의 단식이 38일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나는, 우리는, 이 사회는 자신의 목숨을 파괴하면서까지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하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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