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어른이 전하는 이야기

돌이켜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른이 되고 싶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는 왜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어른스럽다는 것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일까. 어른이 되었다면 모두 다 어른다운 것일까.

내가 아이였을 때 해보았던 고민을 다시 어른이 된 후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된 작품이다. 아이였을 때의 뜻밖의 상처와 어른이 되고난 후의 씁쓸한 후회등이 고르면서도 치열하게 공격해오던 이유로 두 배로 허탈해지는 소설이었다. 기실 사람을 겪고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 살면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만이 유난떨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만 입술을 꼭 깨물고 미늘이 달린 ‘바늘’을 힘껏 뽑아야 할뿐인 것이 인생이라는 ‘낚시’임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일 테다. 여기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제거 할 수 없었던 소년의 몸에 자란 ‘바늘’에 관한 이야기가 일본의 어느 해안마을에서 소름돋아나듯 내 가슴을 찬찬히 박음질하였음이다. 많이 ‘아프다’고 말하기에 나는 어른이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어른처럼 뒤돌아 그런대로 ‘아프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어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곤 하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아픈 것도 괜찮다 말하는 것이니까.

그곳은 어디일까. 달빛은 유난히 빛나고 소라게는 그 빛을 받아 더욱 생생한 곳일까. 일본에선 유명한 지역이었다. 가마쿠라(鎌倉,겸창)시, 한때 무사들의 도시로 알려진 중세 일본의 고도 가마쿠라엔 유난히도 신사와 절이 많다. 쇼조 할아버지는 가마쿠라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변마을에서 멸치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선장이었다.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퍼뜩,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 인근 해역에 방사능 오염수가 방출되었고 그로인해 이바라키 현에는 멸치잡이 조업이 중단되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쓰나미로 폐허가 되버린 미야기현의 처참한 해안마을도 오버랩되었다. 마을의 생존자로 보였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의연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마치 늘 이런 일을 겪고 살아 온 것처럼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읊조리던 할아버지. 만약 쇼조가 같은 인터뷰를 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얄궂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같은 자조적인 말씀으로 무언가 참회하는 식의 묘한 웃음을 보였을까. 아니면 손자에게 타이르듯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의 말씀을 하셨을까. 예전 같았으면 이 책에서 신이치의 할아버지로 의미심장한 역할을 주도했던 쇼조는 나같은 반일 감정을 가진 독자의 눈엔 탐탁치 않았던 인물로 여겨졌을 터이다. 개인적인 일에는 습관적인 ‘사과’를 입에 달고 살지만 국가적인 일에는 절대 강박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제국주의 일본 전쟁세대를 표상한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일본 지진의 여파때문인지 나는 아이들 못지않게 쇼조라는 조연도 어쩐지 아프고 짠하게 다가왔다. 뇌에서 핏덩어리가 뭉치는 병에 걸려 生을 마감했기에 느껴지는 인간으로서의 연민도 없지 않았지만 그 핏덩어리를 뭉치게 한 生의 이력이 새삼 같은 인간임을 깨우치게 했달까. 그를 보면서 사람은 암이든 무엇이든 결국 평생 동안 뭉쳐진 것들이 불치의 병인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체를 좀먹는 암도 결국은 비정상적으로 자라나 뭉쳐진 덩어리(종양)의 결과가 아닌가. 알려졌듯이 덩어리의 세포가 퍼져나가는 모습이 게의 다리와 닮았다고 하여 암은 게의 이름인 ‘cancer’가 되었고 별자리로서 게자리 ‘cancer’와 동음이의어가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발에 밟혀 한쪽 발이 부러진 채 죽은 게가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는 신화를 생각하니 의족으로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가 쓸쓸히 그곳에 계시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게자리의 수호성은 방위와 여행을 관장하는 달이다. 이때 달은 사생활을 관장하기 때문에 강한 생활력을 지닌다고 한다. 어딘가 모르게 이 책에서 할아버지를 중심으로한 달과 게의 역학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카니(게)는 먹어도 가니(독)는 먹지 말라’는 쇼조의 첫 대사와 ‘뱃속에다가 너무 묘한 걸 기르지 말’라는 후반부의 대사는 신이치의 生에 뭉쳐질 수 있는 위험적 존재에 대한 간곡한 부탁이자 경고는 아니었을까. 게자리를 지키는 것이 달이라 보았을 때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두운 심연을 비추는 수호신으로서의 달, 손자의 집과 인간관계의 길목을 지키는 도조신(道祖神, 일본에서 마을의 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달은 아니었을까. 달빛이 그윽한 어느 봄날, 달에 비추인 카니(게)의 그림자는 맹독을 품어 맨몸으로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 있는 열두 살 아이의 가니(독)라는 덩어리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변사辯士처럼 느껴진)할아버지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달과 게’의 신비스런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더욱 정당해보였다.

그렇다면 (비밀을 알고 있는)쇼조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소설 전반부에 쇼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장기 체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 가마쿠라 막부시대때 지어진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 겐초사의 종소리를 비롯, 주오암의 전설, 가마쿠라 축제, 왕권을 둘러싼 미나모토 가문의 이야기, 정권싸움에 희생된 비련의 무희 시즈카의 춤등에 관해 (역사적인)가이드 역할을 맡게 된다. 자국의 역사와 자기가 태어난 고장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할아버지가 하치만궁에서 신이치와 나누는 대화는 흡사 일본 역사교육의 현장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은 이 책에서 학교 외에 유일하게 하치만궁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신이치와 하루야는 할아버지와 함께, 나루미는 아버지와 함께, 반에서 적대감을 갖고 있던 마키오카까지.(마치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려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처럼) 시즈카의 춤을 볼 수 있었던 하치만궁은 일본 각지에서 무인의 수호신인 하치만신(八幡神)을 모시는 곳이며 하치만신은 곧 천황을 상징한다. 쇼조는 이 하치만신에게 봉납했다는 가마쿠라 지역의 가다랑어와 새우에 유달리 자부심을 느끼는 지역 어업자이기도 했다. 쇼조가 운행하던 시라스선에서 사고로 죽은 나루미의 엄마는 어류를 연구하는(어류생태학이나 해양생물학으로 추정) 연구원이었고 신이치의 엄마 스미에는 어협의 사무원이었다. 이들 두 여성은 암으로 죽은 신이치의 아버지와 함께 이 소설에서 죽음과 파행의 상징이 된 ‘게’자리에 속한 어두운 인물들로 여겨졌다. 특히 신이치의 엄마 스미에는 온갖 생선으로 다양한 요리를 해내는 현모양처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극중에서 기계적으로 보인 주부역할과 수동적, 소극적인 인간관계로 존재감은 미약해보였다. 바닷가와 다소 이질적으로 보였던 나루미의 아버지 정도만이 파괴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과 스미에를 붙들어 주는 구원의 ‘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그의 직업이 유리회사 부장인 것이 흥미로왔는데 딸에게 자신이 사귀는 여성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역시 충격에 깨어지기 쉽고 인공적인 속성을 가진 유리세공품처럼 그는 ‘게’의 실체를 인위적으로 반사하는 일시적인 기념품에 지나지 않았다. 어쩐지 할아버지를 제외한 이 책의 어른들은 모두 한계가 느껴졌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나는 할아버지가 이야기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어른들은 어른답지 못했거나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이 작품은 할아버지의 ‘충고’에서 시작해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끝나는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달과 게’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독처럼 간직해온 ‘게‘와 같은 평생의 죄의식을 아이들과 세상살이에 다각도로 투영하며 ’달‘과 같은 구원을 받기위해 여생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이치와 하루야, 나루미를 끝까지 결속시키던 ‘달과 게’라는 이야기는 결국 할아버지 세대에서 시작된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발생한 개인의 역사와 집단의 믿음으로부터 전수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편의 오래된 서늘하고도 서글픈 이야기, 달빛처럼 아름답고 묘하면서 그림자처럼 알 수 없어 자꾸 마음이 젖어드는 이야기. 지금은 어른이 되었기로 돌아볼수록 애틋하고 지켜볼수록 안타까운. 나는 신이치가 마을을 떠날 때 그의 귓전에 울려오던 겐초사의 종소리는 틀림없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라 믿었다. 이야기를 전해준 어른의 마지막, 그것은 한 인간의 어른된 안녕, 그래서 미어지는 이별의 눈물이었을 것이기에.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어른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이제부터 어른이다 생각한 그 시절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어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닐지 모른다. 어른이란, 어른이 된다는 건 혹 죽는 날까지 진행되어야 할 평생의 숙제는 아닐까.

아이들은 모두 ‘분노’의 씨앗을 품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각자가 공평한 씨앗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로부터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게 된다. 물론, 할아버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겐 자신들이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가 무의식적인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말했다. ‘아이들은 기성의 神을 믿을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만의 神을 창조할 수 밖에 없’다고. 작가는 아이들의 무능력을 새로운 창의력으로 본 것이다. 신이치에게 자라난 상처는 엄마로부터의 ‘배신’이었고 하루야에게 남겨진 상처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 나루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엄마의 ‘상실’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부모로부터의 ‘분노’가 상처의 시발점이 되어 열매를 형성했다는 것이 흥미로왔다. 부모는 이들 소년들이 아직 자신들로부터 분리하지 못한 자기 生의 수호神이었다. 5학년이면 점차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한창 높아질 시기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그 분리과정이 긍정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해 수호神과 원치 않는 충격의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모두 자신들의 첫번째 수호神으로부터 발생한 거대한 상처를 품게된 이들은 서로의 상흔을 위무해줄 비밀의 장소를 발견한다. 상처의 연대와 공감이 이들을 특별한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종종 ‘평범한 소리가 달리 들릴 때가’ 있다고 했다. 어제까지 떠오른 태양이 오늘 달라 보일 때는 상처를 피해 내가 세상을 향해 귀기울일 때가 아닐까. 바로 사찰과 불상에서 불어오던 서슬퍼런 바람소리, 바위의 기괴한 신음소리, 울음소리로 느껴지던 종소리...하나같이 사연을 안고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의 메시지는 어느새 자신들의 상처와 동일시되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새로운 추억의 연대를 구축하게 된다. 세상 모든 은밀한 소리가 블랙홀처럼 집합된 장소에서 이들은 불안의 공감으로 안정을 찾게된 것. 아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세심한 문장들이 꼭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마냥 고요하고도 은밀했다. 특이했던 건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 ‘형장에서 사형당한 죄인들의 울음소리’에 이들이 크게 동요하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인데 이는 할아버지가 깊숙이 간직한 (무의식적인)죄의식마저 내러티브의 모티브로 전수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밀하고)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죄의식은 선장으로서 사망사고를 유발했다는 공적인 책임의식과 어린 시절 산에서 추락한 친구를 내버려 두고 제일 먼저 도망쳐 왔다는 사적인 윤리의식이 굳건하게 시너지를 일으켜 평생토록 단련된 有의식이었다. 그것이 곧 할아버지의 뇌에 뭉쳐진 컨텐츠, 핏덩어리라는 병인이 된 것은 아닐까.

구성원의 분노 에너지(동기), 장소적 비밀성(무대), 이야기의 내러티브(컨셉)가 최적화된 상황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유희에서 벗어난 체계적인 사고과정이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에 따르면 신이치의 나이(11-12세)에 논리적 사고과정의 증가로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논리적 형식을 조작할 수 있다 하여 이 시기를 ‘형식적 조작기’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창조한 논리형식은 ‘분노’ 에너지를 ‘소원’에 대한 기대로 치환한 것이었다. 분노가 일상이라면 소원은 일탈에 해당된다. 이는 곧 일상의 수호신(부모)에서 벗어나 일탈의 수호신(소라게)을 조작하는 체계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아이들이 일상의 수호신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창조한 신은 아주 새롭고 혁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이들은 바위나 바람의 주술적인 힘을 빌려 소라게를 소라검으로 격상시킨 후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삼고 소라검의 바위를 신사처럼 사당으로 완성짓는다. 이들이 신성한 비밀의 사당에서 소원을 비는 방법은 소라게를 불에 지지거나 태우는 것이었는데 이는 ‘돈도야끼(どんど焼き)’라는 일본의 새해 액막이 행사를 연상시킨다. ‘돈도야끼’는 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마을의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물건(일본의 설날 장식품)들을 태우는 놀이이다. 물건을 태우면서 액운을 날려버리는 것이므로 우리의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쥐불놀이와도 유사한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불을 놓는 것이 잡귀를 쫓고 액을 달아나게 한다는 민간신앙에서 기원된 것은 같으나 일본의 아이들은 이때 ‘도소신(道祖神)’이라는 마을신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다.(일본은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신을 자랑한다) 자신들이 모아온 물건과 나뭇가지를 쌓아 ‘도소진고야(道祖神小屋)’를 만들어 불에 태운 것이다. 즉, 자신들의 神을 직접 선택해 그 神의 오두막집(小屋)을 만들고 그것을 태움으로써 소원을 비는 것이 아이들이 형식적으로 조작한 논리의 모태인 것이다. 작가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이렇듯 신이치와 하루야는 (지역상 쉽게 눈에 띄는)소라게를 수호神으로 삼은 것이었다. 다만, 풍습에선 무생물을 태웠다면(소멸의식) 소설에선 생물을 태움으로써(희생의식) 잔혹성을 보다 미학적으로 가공했다고 할까. 이 소설에서 소라게의 살을 찢거나 태워버리는 행위가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쾌감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神이라는 대상에 부여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것이 나는 다행스러웠다. 즉 순수를 앞세운 도덕성의 결여를 장애로 보지 않고 2차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단계적 행위, 성장에의 과정으로 보고 싶었다. 잔혹행위에 대한 선악판단이 무의미했던 것은 행위가 상징하는 메타포가 소원으로서 정당한가의 여부에도 있었다. 잔혹한 행위에 이어지는 더 잔혹한 소원, 이 때 우리는 소원에 대한 충격으로 행위를 잊게 된다. 소라게가 희생한만큼 더 큰 소원을 빌게 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희생을 지불하고 이루어지는 소원이기에 소원이 정당할 수 있다고 까지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이어지는 단계를 살펴보면 결국 (자신들과는 상관없던) 죄의식이 부모라는 수호신을 버렸다는 죄의식과 결합하면서 (우발적인)죄에 선행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제된 죄의식은 죄를 더욱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 할아버지의 죄의식까지 이야기로 잘 연결되어 완벽하게 흡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직, 수평적으로 잘 구성된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높았기에 이 책이 청소년소설이나 장르문학 혹은 대중소설의 특정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순수문학으로서 수준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닐까.

또 하나 비인간적 '행위'보다 아이들이 소라게에 빌었던 비윤리적 ‘소원’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원이 ‘상처’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신이치의 시점에서)소라게에 투사된 상처는 할아버지의 의족,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엄마의 밀회, 친구 하루야의 멍, 나루미에 대한 열등감, 하루야로부터의 소외감, 배신감등이었고 소라게를 희생시키면서 기대하던 소원은 이러한 상처에의 보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상은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소원이 100엔짜리 동전이 생기는 것에서 점점 사람이 사라지는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보상이라는 욕망이 더 커져가는 단계로 이해되었다. 신이치와 하루야는 소원행위를 유지하기 위해 소원의식에 참여한 구성원으로서 각자 친구의 소원에 조력하는 것으로 공범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소원성취가 이루어져야 다음의 소원의식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상처가 치유되는 방법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치유는 서로가 바라는 소원 그 너머, 소원을 가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헤아리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일 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아이들이 소원을 빌고 그것을 바라는 과정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였다. 소원을 안다는 것은 곧 친구의 상처를 안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연습과정을 의미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명징한 증거가 아닐까. 대부분의 (순수한)아이가 잔혹할 수 있는 건 상대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들수록 내가 겪은 고통만큼이나 남의 고통을 헤아리는 능력도 많아진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책에서 아이들이 소라게를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소라게의 아픔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천진난만함이 무조건 이해되었던 건 아니다. 상대의 고통을 알면서도 가혹행위를 반복한다는 건 개인적 쾌감이 윤리에 우선하기 때문인데 다행히도 아이들은 자칫 행위자체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 댓가로 상대의 아픔을 얻었던 것. 내가 가진 고통만큼이나 친구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소라게가 촉매역할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테리나 스릴러장르와 다르다 느꼈는지도 모른다. 소라게를 공격장치나 환상기제로 더 이상 확장하지 않고 인간내면의 성장과 연결시켰다는 점이 결국 ‘달과 게’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아닐까. 만약 이 소설이 내면을 끌어안지 않고 외면으로 아픔을 가시화했다면 필히 장르소설로서 꽤 흥미진진한 자극을 제공했을 듯하다.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의 과거를 추적해보면 어린 시절 동물을 학대한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고 이들 대부분은 잔혹행위에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눈물흘릴 수 있는 타자의 고통에 그들은 둔감하다. 공감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필히 정신적 장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가장 떨어져 보였던 건 누구일까.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신이치에게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같이 소원을 빌었던 하루야였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하루야는 장르와 순수의 경계에서 사실상의 방향키를 쥐고 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된 하루야의 대사는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독서의 기쁨이기도 했다. 신이치와 나루미에 비해 입체적인 캐릭터로 표현된 하루야는 자신의 상처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투사하는 잔혹한 우정의 소유자였다. 하루야는 ‘ね(네)’ 라는 글자를 여기저기 사인처럼 남겨두었는데 나는 이것을 일종의 자학을 표상하는 낙서로 이해했다. 글자의 뜻보다는 단순히 ‘도망가는 놈을 밧줄로 붙잡는 모양’을 가진 그림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내가 글자를 연속해서 써보니 누군가의 목을 밧줄로 묶어버린다는 느낌, 묘한 쾌감이 들긴 했다. 마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노트에 ‘바보’라고 반복해서 칸을 메우는 심리와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에 빈번하게 노출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조롱하는 행위. 그러면서 같은 행위를 누군가에게 갚아주고 싶다는 복수심의 기록. 자존감이 없었던 하루야가 신이치의 분노와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보낸 편지들은 혹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부러움의 투정은 아니었을까. 하루야의 편지엔 자신은 따로 만나보지 못한 나루미와 친해보이는 신이치를 놀리는 글, 자신에겐 없었던 할아버지가 의족인 것을 허수아비에 빗대는 글, 신이치 외엔 친구가 없는 자신이 한심해 친구가 없는 녀석들끼리 잘 논다는 글등이 주 내용이었다. 가만 보면 나(하루야)는 아버지에게 매일 맞아 이렇게 아픈데 너(신이치)는 친구의 아픔조차 모르고 있으니(안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테니) 이렇게라도 내 고통을 당해(느껴) 보아라, 하는 공감호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네 고통을 알고 있으니 너도 알아야 한다는 혼자만의 서약서일 수도 있다. 다만 공감하고 약속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하는 어른다운 방법을 몰랐을 뿐.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그 시절 내가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던 순간이 생각나기도 했다. 대체로 중학생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엔 신이치가 엄마를 사고로 잃은 나루미를 대할 때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괜찮은 것이겠지, 생각하듯 그들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을 한참 건너 뛰어 이제는 내가 겪었던 종류의 고통을 똑같이 누가 당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눈물이 앞서는 것은 아마도 세월의 누적만큼이나 공감대가 넓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터이다. 작가는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가 어떻게 서로 꼭꼭 숨겨둔 상처를 알게 되어 그것에 대응하고 변화하는지를 심도있게 그려내면서 어른이라는 성장이 진행되고 있는 풍경을 서정적으로 완성해 내었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어른보다 어린이의 과정을 그리는 것은 더 어렵다. 지나왔기 때문에 뻔히 아는 것이 아니고 지나왔기 때문에 잊은 것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바로 어렵기 때문에 어린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다시 어른을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명의 어린이와 그가 자라 지금의 어른이 된 나를 천천히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치 은은하게 빛나기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반딧불처럼, 이 책은 누구든 성장해온 자신을 기특하게도 격려해내는 매력이 있었다.


어른이 슬퍼지는 이야기

아쉽게도,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만 마음에 바람이 부는 걸까. 마음 깊은 어느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혹시 어른이 된 것이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니 어른이 더 이상 목표가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이 삼총사는 얼마나 더 있어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들도 어른이 되고나면 나처럼 슬퍼지게 될까.

이 책에서 가장 큰 어른은 할아버지였고 그는 어른을 마치고 돌아갔다. 어찌보면 소설에서 희생되며 신이치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니 그가 소설의 소라신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허나 그가 아이들에게 훌륭한 답을 주고 떠난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 어른이라고 정답을 말해줄 수는 없다. 생각해보니 그건 참 슬픈 이야기였다. 작가가 치밀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신이치의 시선으로 던져진 어른에 대한 의문들에서였다. 신이치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질문으로 남겨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빠는 죽는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왜 글러브를 사러 가자고 ‘약속’한 것인지, 나루미의 아빠를 만나고 들어오는 엄마를 보고는 왜 어른이 초등학생인 자신에게 (엄마가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 한다. 나루미 역시 사고로 죽은 엄마를 떠올리면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하필 내가 ‘엄마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애꿎은 허공에다 질문한다. 신이치는 어른이면서도 아이들에게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모르는 일이면서 모두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신이치가 종합해본 어른들의 세계란 ‘이렇게 싫은데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어른들의 태도란 ‘감정에 이끼가 몇 겹으로 들어붙은 듯이 멍한’ 감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대체로 어른들이라 함은 무엇도 모르지만 당당하고 무엇을 못 느끼도록 무감각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신이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아플 수가 없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제일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은 어른들은 대체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늘 모임이 많았는데 친척들은 대부분 어린 나와 한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나는 그러한 어른이 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나 역시도 아이와 한 약속을 아이의 기대만큼 잘 지켜주고 있는 것인지는 자신이 없다. 왜 어른이 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 이유가 많아지는 것인지 애석하게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였을 때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였지만 어른이 된 나는 부러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화가 날만큼 슬퍼진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그 많던 이유가 없어지기에 슬퍼지는 일이 아닐까. 나도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었으니 아이도 그럴 것이라 믿는 이 마음이 서글프다.

어른은 이미 자기 자신의 심판관이다. 그것만으로 어른은 충분히 슬픈 존재인 것인다. 신이치는 하루야를 꾸짖는 선생님이 죽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런 자신도 죽어버리고 싶어한다. 친구를 불행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난 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졌다고 했다. 나루미 역시 신이치가 처음엔 엄마를 죽게 한 자의 가족인 것이 싫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싫어했다고 말한다.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은 어른의 태도가 아니라는 심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가 중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 유명한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 말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매순간 ‘검증’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타인이 아니고 자신이다. 타인이라는 지옥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라는 천국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그런데 누구나 자기 자신이 천국이 되는 행운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 전부에 분명히 이유가 있어. 내 다리가 잘린 것도, 그때 그 녀석을 제대로 찾지도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야. 제일 먼저 도망쳤기 때문이지. 뭐든지 결국은 말이다...“ 189p

할아버지가 과거나 전생의 인연에 따라 훗날 길흉화복이 결정되어 진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를 주장하는 건 아이들에게 윤회사상을 강조했다기 보다는 언제나 현세에 ‘선행’을 하라는 일본 특유의 가정교육이라고 본다. 지금 세상에서 선행을 해야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고 조상에도 면목이 서고 환생하더라도 인간으로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일본인의 정서와도 연결되었다는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또 옛날분이다보니 어른됨의 정도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등을 두신 듯하다.

“여자는 여자아이일 때부터 여자지만 말이다, 너는 지금밖에 남자아이가 아니란다. 여러 가지를 해보렴.” 168p

나는 이 말이 남자아이는 어른이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로 들렸다. 그런데 그 말은 역으로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동안 무엇이든 이해해줄 수 있다는 의미로도 느껴졌다. 또 그 대신 남자는 그렇게 어려운 어른이 되고 나면 더욱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말씀으로도 들렸다. 소라게의 껍질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여기기(여성적 시각)보다는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할(남성적 시각) 짐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의식에서도 이제 소년의 시절을 지나온 어른된 묵직한 책임이 느껴졌달까. 그래서인지 작가는 남자아이인 신이치와 하루야보다 여자아이인 나루미를 더 어른스럽게 위치시켰던 것은 아닐까. 모든 걸 다 알고서도 아무말 하지 않은 나루미는 ‘그러는 편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고 하지만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하루야는 칼을 들고 덤벼든 자신에게 쫄아버린 아버지를 보고 ‘어른도 약’하다고 말한다. 어른을 말하는 여자와 남자친구를 둔 신이치만이 어떤 이유에선지 변화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꼭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이다. 어른이 되는 건 어렵고 그렇게 된 어른도 약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아팠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어른들도 아픈 것이 아닐까, 내심 나는 이렇게 기대를 한다. 그래, 어른이기 이전에 인간은 모두 약한 것이다. 더 키가 크고 더 아는 게 많아져도 완벽한 인간은 되지 않듯 어른은 완성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덮고서 씁쓸하게 깨우친 어른된 진리이기도 할 것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이야기

그렇다면 이미 한 번 어른이 된 내가 어른답게 어른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시 어른도 자꾸 갱신하고 새로운 자격을 얻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다행히도 이 책은 인문서적이 아니면서도 내게 소라게라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소라게는 어떤 생물이 죽고서 남긴 딱딱한 껍질을 자신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편리한 공생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껍질은 자랄 때마다 바꾼다고 한다. 성장이 바로 외피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피가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해서 껍질속에서 바닷가로 홀로이 빠져나왔을 때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언제나 껍질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할 뿐인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인간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닮았다. 우리는 어른을 성인(成人)이라 하는데 일본은 어른을 대인(大人)이라 하고 중국은 장자(長者)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成人)’에 대한 기대가치가 높아 지혜와 덕이 뛰어나 존경받을 만한 ‘성인(聖人)’을 ‘어른’이라 여기는 듯하다. 어른이 된다하는 것에 이미 어른 노릇이나 어른 값을 포함시켜 어른답다는 평가를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경험많고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은 나같이 나이든 사람에 불과하다. 저 유명한 니체는 다행히도 사람을 ‘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동물(Das noch nicht Festgestellte Tier)'이라 말했다. 사람은 고정적인 형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완전한 모습도 불분명하기에 그저 일생동안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그의 말은 어쩐지 우리 어른에게 희망으로 느껴진다. 이 말에 (허락없이)사람을 어른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 ’어른은 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사람‘,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보지 못하는 존재가 어른인 것, 그러므로 사람으로 완성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하는 존재. 어른은 아이의 완성형이 아니고 인간의 진행형인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신이치의 나이를 몇 번이나 지났으면서 아직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가슴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잔혹의 덩어리만 남몰래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는 것이 종착점이 없는 여행이라면 우리는 매순간 어른답고 더 오래 어른값을 하기 위해 얼마든지 미쳐 놓쳐버린 미늘을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라이터 불로 내 안온한 게 껍질을 지지더라도 당당히 뾰족한 집게발을 들고 맨몸으로 꿋꿋하게 자극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피로 얼룩진 집게발을 들고서도 비바람 몰아치는 바닷가를 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튀어나온 내 몸뚱아리가 어스름한 달빛에 비쳐진 기괴한 형체로 드러난 어느 날, 밤하늘 보다 더 뚜렷하고 짙은 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 그 날 우린 할아버지의 구원과도 같은 유언이 생각나지 않을까. 어른이라는 완성을 위해 우린 그렇게 소년처럼 울어야 하지 않을까.

“달밤의 게는 글렀어. 달빛이 말이다, 위에서 내리 비쳐서.... 바다 속에 게의 그림자가 생기거든. 자신의 그 그림자가 너무나 추해서...게는 무서운 나머지 몸을 움츠리지...그러니까 달밤의 게는 말이야.”   391p



<덧붙임>

아름답고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 책을 덮고서 나도 모르게 한명의 일본작가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알고 보니 소설을 홍보하는 메인카피에도 ‘제 2의 하루키’라는 문구가 있었다. 작년에 방대한 분량의 1Q84 전권을 몰아서 읽은 후 비로소 하루키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 뇌리에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1Q84는 그가 작가생활 30주년이 다되어 발표한 소설이었다. 문학인으로서는 성인에 해당되는 경력이므로 ‘어른’의 수준에 오른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미치오 슈스케는 지금 삼십대 중반이다. 작가경력을 보니 아직 십년도 채 되지 않았다. 슈스케가 사람의 인생에서는 벌써 ‘어른’이 되었겠지만 문학인생에서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많은 시기가 남아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그의 유소년기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퍽이나 놀랍고 일본문단에서 흥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이가 먹었다고 무조건 어른이 다 되는 것이 아니듯 문단의 경력이 쌓였다고 모두다 어른된 작품을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은 분명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어른스러운 작품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어른의 수준에 이르러 어른다운 작품을 보여줄 날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아직은 열 살도 되지 않은 문학적 자아가 무궁무진하게 성장하여 하루키처럼 독특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응시할 날도 얼마남지 않은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신이치가 호된 성장통을 겪었듯 똑같이 문학의 성장통을 앓고 있을 터이다. 세계무대에서 발견한 일본인의 위치발견 및 재인식이 하루키의 ‘원더랜드’였다면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이라는 독을 헤쳐나와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되는지 그 완성된 ‘미치오 매직’을 설레게 기다려본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열두 살짜리 아이의 눈과 귀로 나는 미치오의 바위같은 신음과 울음같은 종소리에 귀기울 일 것이다. 이 책의 수익금과 리뷰대회 상금의 일부를 일본 지진복구를 위한 성금으로 기부할 것이라는 출판사측의 주최의도가 이 책을 사고 리뷰를 쓰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비록 수상하지 못해도 순수한 선의에 참여하고 싶었다. 나로서는 일본문학을 읽고 글로써 그들을 사유해보았다는 것이 문화적 기부라 생각한다. 이 책은 하루키 문학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서가 녹아든 보편적인 인간성을 아이들 시선으로 잘 전달하는 작품이다.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슈스케처럼 젊은 작가의 약진이 부러운 시점이다. 슈스케가 문학의 어른이 되어갈 때 우리도 마냥 아이처럼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같은 문화적 기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가장 한국적인 문학이 가장 세계적인 문학’을 이끌 그날을 위해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힘을 실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2011년 나오키상 수상작 <달과 게>를 읽었기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른된 독자로서의 예의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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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4-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작품인가 보군요.
우리나라에선 최진영이란 작가가 난린가 본데,
저의 지인 한 분은 이 사람이 다음 작품으로 뭘 내놓을지,
과연 내놓고 전작만 할 건지 의문을 갖더군요.
그러니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는 건 어느만큼의 부담을 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읽을까 하다 포기했는데, 그냥 읽을 걸 그랬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도록 하죠.
저는 1큐84를 1권만 읽고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
예전에 가졌던 하루키에 대한 부담인 건지,
다른 책에 치인건지 아무튼 그렇습니다.ㅠ

한사람 2011-04-16 22:54   좋아요 0 | URL

한겨례문학상 받은 작가 말하는 건가요?
그정도는 아니던데 ㅋㅋ

이 책은 의외로 건진 책이어요^^
몇가지 반복되는 지루함이 없지않지만,
이야기 흡입력이 높이 살만하구요..무엇보다 주제전달이 미학적인게 전 좋더라구요

일큐팔사를 능가하지 싶어요, 나중엔...
그런데 처음에 너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후속작이 늘 부담될거 같아요
모든 문학상은 다 휩쓸었던데..

네오 2011-04-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좋게보셨군요~ 솔직히 저도 리뷰는 썼지만 (신중하게 말해야 겠지만) 나스메 소세키나 미시마 유키오만큼 좋은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반면에 최진영은 지지할만한 소설이었습니다~ 그녀의 파멸적인 세계관이 저에게는 매우 감미로워 거든요 ㅋ

한사람 2011-04-24 07:26   좋아요 0 | URL

기대를 전혀 안하고 보았어요, 일본작가들 글을 거의 읽지 않아서 솔직히 제가 비교할수 있는 글은
하루키밖에 없었구요 ㅋㅋ
원래 문학도도 아니었고 경력에 비해 이룬 성취가 커보였어요
또 개인적으로 서정적인 글을 좋아라 하구요

최진영 작가에 대한 기대가 그 정도인지는 몰랐어요
문학상 수상작은 대부분 기획작이라는 생각이 많아요..
계획된 글(물론 다 계획된 것이지만ㅋ)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들중에서 인상이 강렬했던 기억은 분명 기대쪽이겠죠??

네오 2011-04-26 18:25   좋아요 0 | URL
음~ 그동안의 많은 일이 있었네요~ 음음~ 오랫동안(한 6개월) 글을 본사람으로서 한사람님 응원할께요~

2011-04-26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맙다, 친구야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시절부터 서울로 전학와 다섯 번의 전학을 다닌 후에야 졸업을 했다. 70년대 말 남쪽 지방에서 바퀴가 세 개 달린 용달차를 타고 올라온 우리 식구는 당시 변두리였던 강남땅에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을 정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큰 이모 집에서 일 년, 막내 이모 집에서 이 년, 이런 식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친구와 사귈만하면 학교를 바꾸어야 했다. 전학을 많이 다닌 이력 덕분에 어떤 곳에서도 단기간에 적응하는 놀랄만한 생활력이 몸에 붙게는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책상 앞에 앉아 진득이 공부를 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우리 때는 사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다지 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방과 후 학원을 가는 아이도 없었고 또 동네에 학원이라고 하면 주산이나 웅변 학원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만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이었고 그렇기에 가정환경은 외려 지금보다 더 공부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부모님께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가정환경 탓을 많이 해온 쪽에 속했고 그렇기에 이 책의 주인공은 어른 된 나를 뒤늦게 부끄럽게 하였다. 
  
  나는 부산에서 이미 한 학년을 다니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부모님은 내가 똑똑한 아이인줄 알고 (편법으로)한 살 일찍 학교에 입학 시킨 경우였다. 그런데 서울에선 그 한 살의 융통성이 적용되지 않아 다시 일 학년부터 학교를 다녀야했다.(그땐 입학시기가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어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생에 초등학교 입학을 두 번 한 것이다. 투박하지만 정이 많았던 부산 사는 친구들도 생각나고 이미 배운 것들이라 흥미도 없고 무엇보다 사투리를 고치지 않은 내 말투는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당연히 학교를 가기가 싫었다. 비록 어렸지만 내 기억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며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초등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고 내 존재감을 드높이는 일은 무엇보다 공부를 잘하는 일이었다. 서울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집에 가면 도통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를 괴롭힌 것은 경제적인 빈곤보다는 심리적인 박탈감이었다. 친척이었지만 우리 집은 늘 이모네 집보다 못살았고 우리 식구는 사실 우리의 집이 생길 때까지 얹혀사는 신세였다. 몇 년간 이 관계가 지속되자 엄마는 언니건 동생이건 우리가 얹혀사는 이모네의 궂은 살림을 다 해주셨고 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 시기 이미 기득권싸움에서 뒤쳐져 있던 나는 사촌들로부터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고 늘 그들과 같은 학교를 다닌 내가 나를 이기고 그들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공부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집에 오면 나는 그들이 이미 훑어본 참고서와 한번 읽고 난 후의 책을 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그들보다 시험을 잘치기라도 하면 이모들로부터 과한 비교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늘 사촌들의 시기 대상이 되어 있곤 했다. 잘하면 잘해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나는 늘 가시방석이었다.  

  이 책의 저자에 비하면 나는 마음하나 불편한 것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핑계를 대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 시절 나는 제발 하루만이라도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보고 싶은 나의 책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했었다. 세월이 흘렀고 박철범이라는 친구와는 환경이 달랐지만 나는 그 ‘하루만이라도’하는 절박한 심정을 너무도 잘안다. 저들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 책으로 자기 책상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루만이라도’ 사촌들처럼 공부해보고 싶었다. 나는 부모님이 (어디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 처음 사주신 책상을 무슨 골동품처럼 아직도 쓰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이 꼭 내 어린 시절의 그 절박함을 이제야 찾아내 알아주고 그 서러움을 몰래 달래주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봄볕처럼 따사로와지고 봄비처럼 촉촉해지는 독서였다.

  그랬다. 사실 이 책을 읽어보고 한창 공부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던 내 딸아이에게 은근슬쩍 권해볼까 하던 마음이 많았다. 이 책은 이미 학부모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진 심리적 요법(?)의 효과적인 동기유발서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5학년이고 말 안해도 공부의 중요성을 알지만 스스로 자신이 공부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이 책을 읽고 바보같이 두어 번 눈물까지 터뜨리며 완전히 내 마음의 공부시간으로 활용해 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공부전략서가 아니라 공부철학서였다고 할까. ‘내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서울대도 고려대도 합격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계속하여 공부를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 생각된다. 중요한 건 (힘들어도)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질긴)마음 하나에 있었다. 나는 이 친구의 그 마음 하나에 반했다. 공부란 마음의 문제라는 걸 새삼 깨우쳤다. 하지만 혹시나 딸아이에게는 반대로 ‘이렇게까지 힘든 환경에서도 일등을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식의 상처와 반감을 줄 수도 있겠다 싶어 읽어보란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 땐 이랬는데 식의 비교가 아이들에게 먹히지 않는 걸 잘 아는 학부모로서 이런 책은 틀림없이 반갑기 짝이 없지만 내용을 확인하기 전엔 이 책도 고만고만한 ‘공부’의 이야기로 결국 ‘공부하라’는 결론과 다를 바 없다고 선입견을 가질까봐 나는 생각이 많아졌던 것이다.

  서점에 나가보면 차별화된 공부전략으로 일류대에 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는 늘 매대의 앞쪽에 위치한다. 딸 가진 엄마인 나 역시 습관적으로 ‘우등생 비법’이나 ‘내신 올리기’같은 제목에 눈길을 주고 두어 번 페이지를 넘겨보다 에잇 하고 마음을 접고 돌아오곤 했다. 남들이 한 공부, 그것의 전략에 대한 책을 읽느니 그 시간에 해오던 자기 공부를 꾸준이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공부만큼 특별한 비법이나 탁월한 전략이 많은 분야도 없지만 사실 그런 만큼 비법과 전략은 이미 평범하거나 전략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건 그 방식으로 공부해서 지금의 성공을 이룬 사람의 전략인 것이기에 대단해 보이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본 방식이거나 또 하다가 실패한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들끼리 정보차원에서 돌려보기도 한다. 마치 먼저 읽은 사람이 제일 먼저 그 전략을 알고 있다는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다른 엄마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어떨 땐 특별히 유행하는 비법을 하나 더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정보수집에 우위를 확보했다는 안도감마저 느끼곤 한다. 설사 내 아이에게 그 방법이 맞지 않아 적용하지 않을지언정 내가 아직도 그 비법을 모르는 엄마로는 보이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경쟁심이 발동하는 순간일 터이다. 이 책도 처음엔 그런 유혹의 연장선상에 있는 베스트셀러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줄기차게 공부를 말하고 있지만 공부 잘 하는 방법이나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한 전략이 아닌 죽도록 공부하는 ‘이유’와 죽을 만큼 공부하는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즉 공부를 하기 이전, 공부를 하게 되기까지의 섬세한 마음의 변화와 그것에 따른 결과를 낱낱이 보고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자가 수능생활을 지나쳐 온 시기를 이토록 생생히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건 그 과정을 전달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그건 그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갈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그 길을 간 사람들은 그 길을 가야할 사람보다 많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많고 많은 먼저 가본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의 길은 여느 성공의 길을 걸어간 먼저 가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특별해 보이는 것일까. 혹시 그는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길,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쉬운 길이라도 발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을 덮고 공부 이야기로 진한 감동을 느껴본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감동을 느껴본 적이 있기는 했는지 싶어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그리곤 이 친구의 길을 따라가 보았더니 나는 공부하는 한명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때라면 그 시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 싶었다. 물론, 이것도 지나고 난 세대로서 일종의 그리움에 해당될 터이다. 하지만 이제 공부라면 한참 멀어진 나 같은 학부모 세대에게도 무엇이든 절실한 이유를 찾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결국 건강하게 살아가는 生의 방식이 되겠다는 깨우침을 주었다. 한참 어린 조카벌의 친구지만 만나면 어깨 한번 툭 쳐보고 싶은 친근한 고백에 이렇게 또 일상의 용기를 얻는구나 싶어 그 친구가 공부해준(?) 세월이 새삼 주책스럽게 고맙기까지 했다.

후회한다, 친구야

 
이 친구의 고백을 듣고 퍼뜩 생각나는 이치가 있었다. 나는 지난 시절 영화쪽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영화 하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이유가 같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기억이 있다. 어떤 영화가 성공하면 그건 감독이 좋았고 시나리오가 좋았고 배우도 좋았고 미술, 조명, 음향, 특수효과, 개봉관 모든 게 좋았기 때문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실패하면 그것 역시 감독이 나빴고 시나리오가 나빴고 배우, 기타 등등이 모두 나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성공이냐 실패이냐 최종적인 결과에 따라 선행하는 조건이 따라가는 이 역주행의 평가법칙은 가만 보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이유와도 많이 닮았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는 집안도 좋고 부모님도 훌륭하고 학원도 좋은 데를 갔기 때문이고 공부를 못하는 친구는 완전 그 반대였다는. 박철범이라는 친구는 언뜻 보면 이 법칙을 보기 좋게 깨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이 친구의 가정환경과 주변 인물들을 보면서 내가 터득한 법칙이 틀린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저자에겐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이혼한 후 타지에 나가 돈을 버는 어머니, 툭하면 때리고 늘 아픈 할머니, 왕따시키는 친구, 무조건적인 선생님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가 일류대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그에게 강렬한 동기를 부여하고 꾸준히 격려한 生의 조력꾼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시험에 실패하고 청춘을 탕진하여 성공의 기회를 놓쳤다면 똑같은 가족과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그의 불행을 견인하는 5종 도우미 팩키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성공하기 전에도 실패하기 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똑같은 사람들인데 그의 결과에 따라 이렇듯 평가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이 나지막히 건네는 엄숙한 교훈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조건이 아니고 내가 수용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엔 박철범군이 운이 좋은 것 일 수 있지만 내 보기엔 박철범군 때문에 그들은 박철범군을 만든 일등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 역시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어떤 친구는 왕따를 당하고도 그것을 계기삼아 자신의 단점을 돌아보지만 또 다른 친구는 그로 인해 가출이나 자살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까. 왜 어떤 학생은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가정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서운해 자신만은 어떤 일을 하든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의 왕자가 되고 또 다른 학생은 결손가정이라는 지울 수 없는 자격지심 때문에 훗날 애정결핍의 왕자가 되는 것일까. 똑같은 갈등요소를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하게 되는 경로를 따르지 않고 반대의 선택으로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올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나 이변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에 해당되는 일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를 보고 다시금 기적은 전혀 기적스럽지 않게 지겹도록 반복된 노력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친구가 꼴찌에서 일등이 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해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 이 친구는 어떡하다가 끝내 기적이라는 골인지점에 다다른 것인가.

  혹시 그는 결코 기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하루아침에 실력이 향상되는 비법같은 건 있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가 만든 기적은 내용상으로만 보면 외려 부단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다. 모두 성공한 것도 처음부터 일등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극적 드라마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입시만 보더라도 점수에 맞추어 지방 공대라는 진로를 정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고 학교가 성에 차지 않자 다시 재수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다녀 보니 서울대라는 간판보다 하고 싶은 일이 더 간절했기에 마지막 법대로 전공을 바꾼 건 어찌 보면 인생에 있어 커다란 실수와 이어지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해도 좋았다. 말이 쉬워 재수, 삼수이지 (합격을 보장하지 않는)수능을 여러 번 치루기가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그것은 어쩌면 도박같은 모험에 속하는 위험한 선택일지 모른다. 재수가 하기 싫어 차라리 꿈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던 내 비겁함이 이 친구를 보며 다시금 기억나 많이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재수가 죽기보다 싫어 대폭 하향지원으로 원서를 접수했고 결국 (수석도 아닌) 과차석으로 떨떠름하게 합격을 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4년 내내 남은 점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용기있게 좀 더 나은 학교를 선택하지 못한 내 자신을 괴롭히고 좌절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나도 꿈이 있었고 내가 선택한 공부말고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시작해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합격시켜준다는 보장만 있었다면 나는 학교를 때려치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찌될지 모르는 미래의 결과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단순히 내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해내었다고 위대해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소신을 따르는 일은 자꾸 나이들수록 점점 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해야할 사항이 꼭 자기 나이와 비례해가기 때문이다. 헌데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이미 선택한 것이 불만스러워도 다시 도전할 것이 두려워 그냥 현실에 주저앉고 마는 만성병을 키우게 된다. 우리는 생각외로 많은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현실을 잊는 것으로 현실을 견뎌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나는 내가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았고 그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예정된 후회를 하려고 그냥 그대로 살았나 싶기도 하다. 그때 다시 도전했더라면...다시 공부했더라면....다시 입사를 했더라면...후회는 얼마나 편하고 정당한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이던가. 나는 왜 후회로 가는 길을 두 눈뜨고 지켜보기만 했을까. 그리고, 그는 대체 후회를 중단할 그 용기가 어디서 탄생된 것일까.

  부러웠다. 남들의 이야기를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고 재차 시도해보는 그의 뚝심이. 이 친구는 아마도 죽어도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한 연인처럼 공부를 철썩같이 믿었던 모양이다. 공부는 공부를 믿는 사람에게만 결과를 약속한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가혹했지만 공부만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렵고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공부에 대한 속성을 세상이치 깨닫듯 알아버린 듯하다. 모진 세상살이에 좀 더 일찍 내던져진 이력이 결국 그만이 가진 차별화된 능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사적인 이유가 없다며 매를 든 선생님으로부터 서운하기는 커녕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선생님의 기대에 오히려 기뻤다고 했다. 공부를 위해 무엇인가 희생을 하게 되면 공부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게 된다는 사실, 공부가 재미있게 되는 비결은 공부보다 재미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깨우침, 공부를 연인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정말 믿을 만한 연인이라는 나름의 공부에 관한 ‘철학’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 종교와 철학같은 믿음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자 감동이었다. 나도 공부를 못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공부라는 것 자체의 속성을 고민하고 몸소 깨우치고 정리해 본 기억은 없다. 엄마나 선생님의 주입식 생각대로만 지겹도록 따라온 나같은 모범생에게 이 친구의 발상은 기특하면서도 한편 얼마나 아프게 느껴지던지. 곁에 있으면 한 번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이 친구가 신기했다. 모두 자신이 겪으면서 몸과 마음을 다해 터득한 것이기에 자신을 믿을 수 있었고 이렇듯 남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갑다, 친구야

 
사람을 글로만 판단해선 안되겠지만 이 친구의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심성이 참 소박하고 천성이 순하다는 어른된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성취를 뒤돌아 시기하고 그 질투심 때문에 다시 책상앞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성적은 우등생이지만 마음만은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은 친구의 성취에 결코 진심어린 축하를 하는 법이 없고 내심 그 친구를 이기려는 열망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공부를 잘하면서 자신보다 더 잘하는 친구를 존중하고 못하는 친구를 배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월등했던 시골학교 친구 창진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친구의 장점을 고개숙여 배우려고 노력하는 대견한 구석이 있었다. 창진이를 오랜 세월 스스로 마음속의 공부멘토로 삼은 그의 순수한 마음이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문과 전교 1등 창진이와 이과 전교 2등 철범이가 훗날 각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멋지게 재회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 괜스레 시큰해지기도 했다. 목메이고 울컥했던 건 외할머니를 보고서 더했다. 3학년 때부터 비행기 탑승수속 방법을 가르쳐 주신 지혜로운 어머니도 그리웠지만 천하의 몹쓸 ‘인간말종‘을 자랑스런 ’인간 본보기‘로 키워주신 외할머니는 새삼 돌아가신 내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면서 끝내 눈물훔치게 만들었다. 꼭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자의 수능이 끝나고 할 일을 다 하셨다고 눈감으신 것 같아 다시금 당신이 살아 계셨던 이유, 질기게도 세상을 버릴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소망을 떠올리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봉사라 강조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쩐지 책을 덮고서도 오래 잊고 싶지 않았다. 팔십 평생 살아봐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던 순간,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보람만이 남는 거라는 말씀은 지난 시절 희생으로 우리를 길러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수많은 어머님들을 생각나게 하는 숭고한 유언이셨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기에 그 말씀은 진정 이 시대에 성공한 모든 장년들에게 전달하시는 간곡한 부탁만같아, 그리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 해오신 당신들의 세월이 자꾸만 눈에 밟혀 나는 오랫동안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 할머니, 내 어머니도 나를 위해 희생한 세월이 있었는데...그들도 그렇게 눈을 감았는데...지금의 나는 나 혼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살아온 시대는 틀렸지만 이 친구는 우리와 같은 어머니, 같은 할머니를 둔 친구라는 생각에 정말 추억의 친구를 만나듯 더 친근하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의 말마따나 전교 1등의 이력으로 특목고를 졸업하고 일류대로 이어지는 합격생만이 입시의 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번듯한 가정환경과 지속적인 사교육 하나 없이도 당당하게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우리사회 미담이라 할 수 있는 성장수기였다. 탈출구 없는 환경에서 외려 공부를 탈출구 삼아 그를 애인으로 만들어버린 대견한 시골청년의 공부와 연애하기 정석이었다. 인터넷 대신 땅에서 삶을 배우고 학벌이라는 간판대신 하고 싶었던 꿈을 찾는데 포기하지 않은 진짜 수험생의 본보기를 보여준 해법이었다. 25점 짜리 꼴찌도 입시학원에서 이과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음을 기록한 감동의 참고서였다.

  문득 모든 공부에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때 왕도는 어떤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칭한다. 왕이 되는 길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생각난다. 그는 지금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공부라는 길을 돌고 돌아 많이 헤매어 보았기 때문에 어디 쯤에 벼락이 있고 어느 곳에 바위가 있는지 말해주고 싶어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왕에 다르는 지름길을 지도처럼 정확하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왕에 이르려면 꼭 지나가고 피해야 할 길을 혹시 잘못 들어섰더라도 다시 나설 수 있는 길을 아는 만큼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의 왕도는 그의 ’최선’이었고 그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전달한 것이다. 공부라는 먼 길 떠나는 마음의 네비게인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걸어가 본 길만이 꼭 왕도의 길이라 주장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이 왕이 되는 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멋도 모르고 따라가 본 길은 어쩐지 하늘높은 왕도와 연결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 그 왕도로 떠나진 않더라도 왕에 이르는 길을 하나 알고 있다는 마음만은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걸까. 길을 알면 운전을 반이상 한 것인데 꼭 길을 미리 알고 떠나는 운전자 마냥 든든한 기분. 그건 이 책이라는 땅을 믿어본데서 얻은 뜻밖의 마음수확이었다. 나는 이제 책을 덮고 슬그머니 아이의 책꽂이에 이 책을 꽂아본다. 그의 어머니처럼 책을 먼저 읽고 선별하여 아이를 유도하는 부지런함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아이가 언젠가는 마음에 이끌려 스스로 이 책을 잡을 날을 기다린다. 아이도 박철범이라는 친구가 반가운 멘토가 되어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를 통해 그의 할머니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이 가슴에 전해질 순간을 기다린다. 만약 아이에게 이 책의 기회가 닿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의 어머니, 할머니처럼 내 아이에게 그렇게 유언하고 싶다. 그건 어쩌면 내 할머니, 어머니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희생하며 키운 우리네 자식들이 공부 ‘잘’ 하였다고 ‘잘도’ 자만하지 않고 혹시나 자신들을 외면했을지 모를 우리 사회를 다시 ‘잘’ 품어 보듬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공부 ‘잘’ 한 사람의 사명임을 조용히 새겨본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말씀이야 말로 공부 잘 하는 왕자들이 실천해야 할 도리, 공부의 왕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결국 사람을 잘 이해하고 사회를 잘 이끌어 가는 일임을, 그 당연한 이치를 새롭게 공부한 나. 그냥 책을 꽂기엔 웬지 서운한 마음에 잠시 눈을 감아본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그리워 해본다.

  친구야, 보고 싶다. 당신의 눈부신 앞날을.
  벅차게 기다린다, 그로 인해 더 따스해진 우리 사회를. 그 사회 속에서 커 나갈 내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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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특한 책이다.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거리의 풍경 스케치와 소소한 감상정도로 생각한 터였다. 그런데 내가 놓친 건 거리라는 ‘공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스토리라는 ‘시간’을 그린 것이었다. 시간은 곧 역사였고 역사 속엔 사람도 사건도 사물도 포함된 것이었고 그곳엔 오랜 세월 흘러온 이야기가 고스란했다. 작가는 그 흔적을 찾아 떠난 것이었고 떠나다 보니 더 많은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흔적들 앞에 밑줄을 그을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책에 밑줄긋는 버릇이 생겨 당연 펜을 들고 책을 펼쳤는데 이 책에는 어느 한 페이지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떤 공식적인 문화재에 감히 철없이 낙서하는 기분이 들었달까. 아니면 여행지에서 만난 돌담 하나, 바위 하나지만 차마 아름다워 남들처럼 적어볼 수 없는 내 이름이었달까. 조금만 폰트가 컸더라면 교육용 서적이 될 뻔했다. 작가가 정리하고 모아놓은 이야기, 자신만의 감상 역시 무게가 상당했기에 이 책은 오래도록 거실 한 켠에 놓아두고 커피한잔 할 때마다 들추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요즘 홈쇼핑에서 자주 듣는 말 ‘절대 여러분들 생각하시는 그런 흔한 느낌이 아’니라는 멘트,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이 책을 덮고 가장 실감한 것은 나는 서울사람이 아니었다는 자각이었다. 물론, 나는 서울사람이 아니다. 애초부터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부모님 고향 역시 서울과 거리가 아주 멀다. 하지만 나는 일곱 살 이후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고 행정구역상 서울주소를 삼십년 정도 사용했으니 서울사람이 다 된 것이 아니라 서울사람이 되어 있어야 했다. 아니 그동안 그러한 자각조차 없이 당연히 서울사람인 줄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내가 아는 서울, 내가 살았던 서울, 내가 살펴본 서울은 하나도 없었다. 설마하고 나는 목차를 두어 번 확인했고 어쩐지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서울살면서 지하철을 몇 번을 탔을 것이며 광화문 네거리를 몇 번이나 횡단했을 터인데 나는 모두가 처음보는 이름처럼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더 부끄러운 건 이 책에 소개된 장소와 이야기를 한번도 연결하여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며 혹시 지나쳤을지 모를 지명이나 장소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거기 그 정도에 그것이 있겠지(있었겠지) 수준의 스쳐가는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 서울처럼 무심한 사람,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과 다를 게 무엇인가.

내가 아는 서울은 바둑판 도로와 회색빛 빌딩, 싱겁게 솟아난 한강다리, 차도를 다투는 자동차, 인도마저 차가운 사람들, 그 정도가 다였다. 물론 나는 70년대 말 한강 이남의 개발이 한창인 시절 당시는 변두리였던 강남에 이사와 그곳이 서울의 전부인줄 알고 성장하기는 했다. 딴에는 강남에서 줄곧 학교를 다녔고 버스 정류장 이름이 ‘고개’인 시절부터 24번 버스를 타왔던 사람이니 강남발전사쯤은 두어 시간 막히지 않고 이야기 할 수는 있겠다. 그러고 살았어도 충분히 서울사람으로서 문제는 없었고 외려 웃기지도 않은 우월감마저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니 나는 서울사람이 아니라 그저 서울의 한강 남쪽, 강남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나는 서울에서의 내 주거이력이 당연 서울사람으로서의 당당한 주거자격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가끔 시장선거철이 오면 서울시민도 아니면서 서울시장 후보들을(만) 놓고 비교를 하곤 한다. 정작 내 지역의 도지사를 뽑는 일이 시시하고 맥없이 느껴져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는 ‘그렇게’ 살아온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럽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나처럼 자신이 강남에 오래 살았으니(살았다는 것만으로) 서울 사람중에서도 뭔가 우월해 보이는 시민이라 생각해온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정말 서울도 강남도 뭣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주고 싶다. 나를 포함한 그들은 적어도 서울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울을 알지 못했고 서울을 보지 못했으니 서울을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다. 우리가 살아온 곳은 그저 행정구역상 서울시의 한 지역에 해당되는 주소상의 기록일 뿐이었다.

사실, 서울을 모르고 서울에 사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바쁜 도시에서 내가 사는 곳의 역사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꼭 알아야 그 도시에서 살만한 자격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서울을 그려온 이 작가에게, 피사체가 된 서울에게 미안한 것은 그동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도’ 서울을 폄하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같은 수도지만 서울은 도쿄나 파리, 런던에 비해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할만한 관광자원도 문화상품도 없다고 생각했다. 뉴욕처럼 분명한 도시 정체성도 없고 인구밀도만 높았지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모두 턱없이 부족하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을 알아보려면 서울이 생겨온 내력과 생겨먹은 아우라를 찾아야 하는데 사대문안에 위치한 광화문과 경복궁, 덕수궁등의 주요유적지는 젊은이들이 자주가는 약속장소는 아니었다. 예전엔 큰 서점에 가려면 광화문 교보문고나 종로서적에 들러야 했지만 이젠 굳이 크고 많다는 이유로 그곳을 방문할 명분도 없어진지 오래다. 또 하나 바둑판 네비게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나같은 길치에게 강북의 일방통행, 연결도로는 정말 난해한 코스이다. 골목골목 잘못 들어가다 보면 전혀 출구를 찾을 수가 없고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서도 빙 둘러 놓치기 일쑤였다. 어쩌다가 세종문화회관에 공연이나 한다면 모를까 될 수 있으면 한강다리 너머 북쪽으로는 여간해선 마음마저 열지 않았던 나였다. 언젠가 바람이 촉촉하던 어느 봄날, 북악 스카이 웨이를 드라이브 하겠다고 나선 것 까지는 좋았으나 돌아오는 길 한남대교에서 사고가 나 집까지 두 시간이 걸린 이후로는 그런 무모한 낭만은 일찌감치 접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내게 있어 서울을 찬찬히 살펴본다는 건 대체로 시간낭비에 속하는 비효율적인 업무에 해당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놓고 나는 자랑스럽게 서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울이 별 볼 일 없는 도시라 말했다.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간의 서울살이와 서울생각이 부끄러워 서두가 길었다. 책을 덮고 작가가 궁금해 블로그와 홈피를 방문해보았다. 이 책에도 그려져 있지만 작가는 이렇게 그림을 그렸나보다. 간간히 커피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가령, 비오는 날 광화문 별다방에선 길 건너 참나무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누끼(일본식 편집용어인데 다른 말은 모르겠다, 역상?)로 처리했다. 어떨땐 밀리는 버스안 맨 뒷좌석에서 와이드 렌즈로 오후 풍경을 그린 것도 있었다. 광화문 KT아트홀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교수님이 설계한 곳이기도 한데 작가는 거기서도 누워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기록했다. 운동화에 작업복에 카메라와 커피 한잔, 늘 그렇듯 스케치북에 펜을 쥔 모습이 자세와는 달리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글씨체가 꺽어진 글자체여서 그랬을까. 한번쯤 우연히라도 스케치북에 담겨지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 채색된 느낌이 새로와 슬쩍 가져왔다. 2009년의 1월달, 따뜻한 겨울의 수요일날 이었나 보다.


이 책이 왜 정성스럽게 느껴지는지 예를 들어 한 가지만 프리뷰 해보고 싶다. 작가는 이런 식이다. 작가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통의동(나는 서울에 이런 동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에 백송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의 마음을 잡아끈 내용은 죽은 나무를 기리기 위해 사대문 안 비싼 땅에다 터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작가는 발길 한번, 마음 하나 돌려먹고 백송을 찾아 나선다. 
 

#1.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걷다보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발견했단다.
      표지석을 서울에서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던 나로선 새로운 뉴스였다.




#2. 표지석 안내를 따라 걷다보니 옛날 골목길로 접어 들었나보다.




#3. 그런데 백송은 사라지고 고목만이 덩그러니 남아 과거와 쓸쓸히 조우했다.
      백송고목앞에서 작가는 백송이 천연기념물이었으며 나무가 언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4. 그리곤 죽은 백송고목 곁에서 자라난 네 그루의 후계목을 그려본다.
      물론, 후계목이 네그루인 사연을 곁들여서.




#5. 명찰에 종로구, 문화재청, 서울시와 함께 걸려있는 개인소유의 낯선 이름, 홍기옥




#6. 백송할머니라 불리는 홍기옥 할머니는 제초제가 뿌려진 흙을 황급히 퍼내다가
      그만 손에 화상을 입으셨다고 한다.




#7. 작가는 못내 백송이 아쉽고 그리워 인터넷에서 찾아내 일제시대 훤칠하던 백송을 그림으로 살려낸다.
#8. 그리고 지금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백송(비교는 우리더러 하라는 뜻)




#9. 들어올 때 눈에 띈 표지석대로 백송과 더불어 김정희가 살았던 집터였음을 작가는 잊지 않았다.
#10.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김정희가 어린시절부터 글을 잘 써 서울 큰아버지 댁에 입양되어 살았던 곳이
       백송옆 월성위궁이라 하느니.


 
#11. 작가는 골목길을 돌아 나오며 김정희의 아방가르드한 추사체를 떠올린다.
        간만에 손글씨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백송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은 풀어졌을까.


이렇듯 백송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백송의 사연을 마치 스토리보드처럼 자신만의 영화로 만들었다. 모든 장소와 모든 사물이 이런 식이었다. 자연스레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정지해 있는 대상이었지만 흘러온 시간을 담기 위해 그는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한자리의 모습을 3개월 2주나 걸려 완성했다는 그림, 종각역 지하철 그림은 시간의 깊이가 담겨져 있는 듯 잠시 눈길을 머무르게 하였다. 매번 같은 의자에 앉아 열차가 들어오기 전 그 짧은 시간에 조금씩 그려 넣었다고 했다. 열차가 지나가고 또 다음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그는 펜을 멈추었을까. 이 그림은 열차를 타고 지나온 지난날의 시간들이 촘촘히 기록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는 그림을 그린 후 시청방면으로 갔을까?



- 3개월 2주나 걸려 완성한 '종각'은 서울의 시간을 그린 것이 아니고 혹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그린 것이 아닐지

그런가하면 작가는 도시공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설물에 대한 도시계획에도 깊이있는 해설을 곁들여 주기도 했다. 특히 청계천 복원 사업이 빛의 속도로 시행된 우리 시공능력의 놀라움에 대해 아쉬움이 많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중간중간에 자신이 상상한 광화문, 청계천의 상상도를 운치있게 그려내기도 하였다. 불도저 같은 토목공사가 아닌 좀 더 긴 계획과 완벽한 공사로 파리 세느강의 다리처럼 이야기와 철학이 담긴 다리를 만든다면 청계천의 색깔이 더 서울스러워지지 않겠느냐 질문한다.

책을 덮고 나니 더욱 이 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작가는 아마도 처음부터 그래, 서울을 그려보자 작정하고 거리로 나섰던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날은 공원벤치에 앉아 어떤 날은 한강변에 서서 서울을 관찰하고 사진에 담아 집에 왔을 것이고 그림을 그리다보니 궁금해진 것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사연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사연의 주인공을 찾아가보니 또 새로운 사연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발걸음이 모여 서울이 지나온 시간이 지금의 그림에 스며들게 된 것이었다. 아마 장대한 계획을 세워 서울의 시간을 담아보겠다 처음부터 마음먹었다면 그 부담감은 엄청났을 것이고 카테고리나 표현방법, 이야기들도 정형화된 채로 여느 여행책의 느낌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담아보고 싶다는 소망은 서울을 알아보고 싶다는 관심없이는 불가능한데 작가는 왜 굳이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아닌 느리고 아스라한 방법을 적용했을까.

이 책이 그림으로써 가장 절실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아무래도 ‘천천히’ 관찰하고 ‘느리게’ 느끼고 ‘조용히’ 기억하는 서울에 있는 듯하다. 서울의 규모는 이제 세계적이다. 통계수치를 좋아하는 언론에 의해 우리는 서울이 어느 부문에 몇 위 하는 식의 기사를 거의 매일 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숫자만큼이나 정확하게 서울의 이미지가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두렵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건 서울을 몰랐기 때문이며 몰랐던건 알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내가 발디디고 사는 이 서울을 굳이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는 스케치로 서울을 담은 이유가 바로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서울을 알아가면서 서울과 더 친해졌고 친해지고 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가장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생겼다.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의 ‘딜쿠샤’이다. 태어나 처음 들어본 ‘딜쿠샤’라 불리는 집이 서울 하늘 아래 종로구 행촌동 골목에 쓰러질듯한 모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딜쿠샤에서 살았던 앨버트 테일러(3.1운동 소식을 전 세계로 타전한 특파원)의 이야기도 물론 처음 들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그가 묻혀있는 양화인 외인묘지도 처음 보는 장소였다. 작가가 발견한 시간의 사연은 딜쿠샤앞에 위치한 은행나무였다. 권율장군의 집터에 있었다는 은행나무를 보고 ‘이상향’을 꿈꾸어 보자고 말한다. 420년 된 은행나무의 그늘에 앉아 우리 선조와 한 외국인과 그리고 지금의 지역민이 함께 숨쉬고 바라보았을 하늘에 ‘이상향’을 그려보자 말한다. 그곳에서 우리 후세들이 무럭무럭 자라 똑같은 하늘과 그늘을 누리면서 ‘이상향’을 그려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찾아본 딜쿠샤는 말 그대로 쓰러져 가는 빈민가옥의 외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깊고도 따스하다는 생각으로 ‘이상향’이라는 어색한 단어를 적어본다. 은행나무에 걸터 앉은 우리 아이들이 서울의 '이상향'을 그리면서 하늘을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딜쿠샤'는 충격적이리 만큼 '이상향'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이 정말 서울인 것일까.

서울이 변화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서울이 계획되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서울사람인 적이 있었을까. 내가 이렇게 변한 만큼 서울도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이제야 실감한다. 하지만 외모가 달라져도 나인 것은 변함없듯 서울 역시 오래전부터 서울이었음이 새삼 반가운 오늘이다. 한 때 서울사람인 적이 있었고 오랜 세월 서울사람인줄 알았던 무늬만 서울사람 한사람이 다시 서울을 기억할 기회를 얻었음에 짐짓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 미안함을 서울사는 애꿎은 당신들에게 돌려보고 싶다.

당신은, 당신은 서울사람인지. 당신도 서울사람인 줄 알았는지.

이미지 출처 :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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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4-1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추천~후독서^^ 그리고 감상후기 꼬오옥 달기~
 
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좋을까. 마침내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봄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교정에 피던 목련꽃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나는 왜그런지 흐드러진 벚꽃보다 늘 봉우리가 알찬 목련이 좋았다. 그건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던 내 고집이기도 했다. 정을 더 많이 주었기 때문인지 꽃이 질 때도 목련은 유독 처연해 보였다. 벚꽃은 눈가루처럼 흩날리지만 목련은 고개를 떨군 채 목이 부러진다. 목련이 지는 것이 꼭 어떤 인연이 절연되듯 느껴졌달까. 그런데 난 그땐 그걸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내가 봄이고 내가 꽃이니 세상이 봄인 걸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것이다. 그 후로 스무 번 정도 같은 목련을 더 떨구고 나서야 꽃이 지는 모습도 겨우 가슴에 남았다. 알게 된 이상 내가 지나온 스무 번의 꽃들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빚쟁이마냥 지나간 세월을 소급해 누적된 봄을 서글퍼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인 것이다.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이번 봄의 서글픔이 또 더해질 거라는 예감을 한다. 지난 겨울 애타게 기다린 봄이면서 한편으론 어서 지나가라 마음을 달래보는 나... 봄을 견뎌내는 것이 마치 올 한해를 견뎌내는 실마리가 될 것처럼 나는 달력을 쳐다보고 만지작 거린다.

모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봄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나는 대학생이었다. 지금의 나는 봄도 대학생도 아니라는 실망에서 시작한 책이었다. 헌데, 대학생이고 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해보았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지금 대학생이 아닌 것에 지금 봄을 지나왔다는 것에 적잖이 위로가 된 듯하다. 돌이켜보니 이십년이 다 되간다. 얼마 전까지도 십년정도 지나왔다 생각했는데 그 사이 또 십년이 더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나를 두렵게 했다. 요즘은 ‘얼마 전 이야기다’하면 3,4년 ‘좀 되었다’ 하면 5,6년 ‘오래된 듯하다’하면 십 여 년, ‘옛날 이야기다’ 하면 이십 년 전이다. 이야기를 꺼낼수록 그만큼 내가 옛날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를 고개 숙이게 한다. 그때 내게도 이렇게 따스하고 고마운 책이 있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내 대학시절이 조금은 덜 아팠을까. 내 청춘도 실수를 조금은 덜 하였을까. 분명 많이도 아팠을텐데 나는 그것이 아픈 것인지 실감도 하지 못하며 청춘을 건너왔다. 지나고 보니 지독하게도 아팠었구나,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진다. 청춘은 정작 자신이 청춘의 정점에 있을 시엔 그 좋은 걸 그 아픈 걸 느끼지도 진단하지도 못한다는 것. 이십 년쯤 지나오니 비로소 깨달아진다. 그러니 청춘의 시절에 당사자로서 이러한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란도샘은 아마도 지나온 자신의 청춘엔 이러한 책이 없었음이 퍽이나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의 진심이 청춘을 한참 지나온 내게도 곡진히 전달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필히 지금의 청춘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른 적이 많으셨나보다. 말씀은 매사에 정성을 다하셨고 문장은 매 단락 정확하셨다. 과장이나 과분, 과다, 과찬을 절제하고 어떠한 순간에도 진중함이 전달되기만을 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꼭 한달 전에 이외수 작가의 <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라는 에세이를 접했는데 육중한 코끼리에게 사뿐한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청춘을 향한 ‘감성치유’전 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 누구보다 아픈 청춘들에게 청진기를 대어보고 발급해주시는 ‘이성처방’전과도 같았다.

애초부터, 교수님의 처방전은 나같은 중년독자에겐 효력이 발휘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잦은 진통제와 다양한 항생제로 길들여진 얼어붙은 환부가 자기만의 내성으로 잔뜩 영광스런 흉터를 만들었을 것이기에.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눈에 확연하며 대단한 증상은 아니었지만 미세하게나마 설레임의 파동이 느껴졌다고 할까. 흡사 이미 앓아온 만성병이거나 비슷한 증상에도 광범위한 효력이 미치는 것이었을까. 신기하게도 환자인 적이 있었던 내 경력은 이십년 후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증상은 무디어졌겠지만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청춘의 병인. 시련, 상처, 실패, 실연, 방황... 이런 구태의연한 청춘들이 순서없이 믹스되어 내 몸 곳곳에 어떤 형태로든 세균처럼 자리잡고 있었다는 자각. 그러고 보면 그 모든 세균들을 짊어지고 꿋꿋이 살아온 나는 그것들과 삶을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존재인지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기껏해야 반나절 달려온 내 자신에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나이쯤 되면 인생을 관조하고 사람을 통찰하는 내력에 비법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전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生의 비법은 나이와 비례하지는 않아 거울을 보며 얼마나 움츠러 들었던가.

그런 내가 이 책을 덮고 가장 크게 위안을 받은 건 그러한 비법을 알기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것,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는 것에 있었다. 교수님이 가르쳐 준대로 평균수명을 80세로 잡았을 때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를 24시간에 비유한다면, 내 나이는 지금 딱 12시 정오였다. 이십 년 전에도 겨우 여섯시였는데 그 후로 불과 여섯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고 지금은 점심메뉴를 앞에 두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오전 시간을 알차게 보내 놓고 다소 여유롭게 오후를 준비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침형 인간인 나는 오전시간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일과중 어렵거나 복잡한 일은 주로 오전에 처리하며 살아왔다. 오전에 일을 마쳐놓고 대부분 오후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했던 내 생활패턴을 생각한다면 현재시각 열 두시인 내 시계는 중간점검의 시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간혹 탕진했을지 모를 내 청춘이 안타까와 한숨을 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오후와 저녁, 그리고 한밤중이 되려면 열두 시간이나 남았다는 사실은 마흔 이후면 인생이 마감되는 줄 알고 있던 내게 눈물날만한 뉴스였다. 인생 팔십 중에 마흔이 아닌, 스물 네 시간 중에 열두시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점심을 거뜬히 먹고도 아직 얼마든지 약속을 잡을 수 있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언가를 해보아도, 심지어 당장 강원도 여행을 나선다 해도 오늘내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바다를 보고도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 책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하는 기분좋은 마법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지금 이 시간 각자 인생시계를 계산해 보자는 것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며 누구에게나 지금 이 순간 찰나의 희망을 공평하게 건네고 있었다. 청춘이 아니므로 대학생이 아니므로 내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는 편견을 일갈하며 청춘을 향해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멘토의 강의에 설득력있는 첫인상으로 호감을 주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지는 최대의 공감능력이자 최소한의 미덕이었다.

열두시의 설레임에서 시작해 나는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는 말씀에 밑줄을 그었다. 꼭 지금의 나 들으라고 하는 말처럼 너무 일찍 출세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불행이 될 수 있으며 마지막에 어떤 꿈을 이룰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유독 나는 ‘늦게’ 성공하는 것이나 미련스러운 ‘열망’이나 ‘천천히’ 이루어지는 기적같은 충고에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지금이 자기인생에서 가장 늙을 때’라는 말씀은 그렇기에 누구든 자신의 시작이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는 위로로 들렸다. 삶의 방식은 결의가 아니라 연습이므로 ‘더딘 것을 염려하지 말고 멈출 것을 염려하라’는 충고는 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초조해하던 나를 위해 아껴둔 말씀만 같았다. 평범해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가슴에게도 특별하게 전해질수 있도록 한마디 한마디에 세월의 힘을 다해 잉크를 새기시는 듯했다. 무엇보다 너무 높고 너무 아득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아니고 지금해왔던 것에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가능하겠다는 용기를 전해주셨다. 베스트 셀러의 특징이 눈높이가 대중적이며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이기도 한데 이 책은 추상과 구상, 현실과 이상, 솔직과 격식을 잘 조율하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낸 듯하다.

이 책에서 반가웠던 조언중 대학생 시절 너무 정확한 계획을 세우지 말고 우연이라는 삶과 그 우연으로 발생하는 뜻밖의 상황도 인생의 한부분임을 인지하라는 말씀도 있었다. 누구보다 계획세우기를 좋아하는 내 경우 교수님처럼 고시를 준비해 본적은 없지만 나는 현재 고시생같은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준비기간이라는 시간은 아직 무언가가 되지 못한 시점에서 시간을 번다는 장점도 있지만 준비하는 동안만큼은 남들에게 그다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언제까지 준비한다고 말해야 할 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막연함과 혹 이러다가 영원한 준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연습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고통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들에 지쳐 문득 포기하고 싶은 나를 확인하게 될까봐 나는 되도록 먼저 이룬 타자의 성취에 동요되지 않으려 눈과 귀를 닫고 살았다.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상대의 성취에 어떤 시기와 질투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질긴 마음의 훈련은 어이없게도 나의 성취에 대한 자기 폄하나 무감각의 결과로 나타났다. 남들이 부러울 것이 없으니 그 부러운 것을 내가 성취한들 나조차도 스스로 그다지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걸 좋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이룬 성취에도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인처럼 굴며 좋아할 일이 아니라 말하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이기려고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답은 내가 그들을 부러워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어쩌면 부러우면서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데 있었다. 이런 강박적인 만성불감증, 훈련된 자의식에 신선한 죽비가 되었던 한마디는 ‘부러워 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라는 솔직한 지적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말씀이었다. 어쩜, 내가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절대로,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았다. 남의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하는 내 부질없음이 싫고 미웠다. 남들의 성과를 지나치게 부러워하고 과하게 선망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외면하기 까지 했다. 어지간히 욕심도 많은 사람들이라 내심 혀를 찬 적도 있었다. 부러워한다고 내가 그들처럼 될 리 없으며 부러워만 하는 내 자신이 더 작아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따지고 보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기합리화요, 남의 성취를 깍아 내리는 비겁한 시기심의 변형된 감정이라는 것이다. 안 부럽다는 자기위안이 습관이 되었다고 정말로 부럽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해본다. 결과에선 졌을지 모르지만 부러워하지 않았으므로 진 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했다.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발전할 것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부러움보다 더 못난 자기오만일지 몰랐다. 란도샘은 이번에 졌느냐 이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항상 초점을 두라고 하신다. 누구나 가진 열등감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그것을 평생 밑짐을 삼아 타인의 성취도 부러워하고 인정하면서 솔직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선망하게 된 상대의 장점을 배우고 존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지 부럽지 않다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이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란도샘은 결국 부러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러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부단한 노력, 내 욕심을 채찍하는 긍정의 자극을 말하고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슬럼프’의 시간도 실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학을 살짝 유보하려는 심리의 일환이라며 슬럼프에 빠진 청춘을 위로하기 보다 슬럼프에 빠졌다는 인식때문에 나태함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셨다. 연배로 십 여 년 선배이지만 교수님은 실연도 실패도 슬럼프도 혹은 질투나 시기도 다 거쳐 오신 그래서 꼭 우리같은 친근함이 매력인 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란도샘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도 진솔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마음에 드는 작가의 글을 필사하고 시를 외우고 꾸준히 연습한 결과 그나마 이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는 겸손은 문학을 직업으로 하고자 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 청춘에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을 쓰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느 정도 내 문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연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니 연습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누군가 쓰라고 한들 그 이야길 듣고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땅을 칠만큼 후회되는 시간이다. 그 아련한 청춘의 일기장 하나 없는 내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써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어진다. 하지만 글도 책과 마찬가지로 좋다고 말로 권해서 행해지는 장르는 아닌 것이다. 내적 동기부여없이 타성에 젖은 행위는 의무적인 숙제나 리포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란도샘은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씨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를 예로 들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글로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전달할 때 그 울림이 얼마나 큰 것인지 부연한다. 이들 모두 문학을 업으로 삼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쓴다고 말이다. 그 문장을 읽고 나는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고 표현하는 데 글이 가진 힘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글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깨우침에 이르렀다. 문필로서 작가의 꿈은 접었지만 이렇게 어느 작가보다 설득력있는 에세이로 청춘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는 건 그러한 글의 힘을 가지려 누구보다 열망하고 지독하게 연습한 결과였다. 그를 보며 노력도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에 따른 운은 부록일뿐 아닐까. 글을 쓰라는 그의 진심을 만난 청춘이 새삼 부러워진다. 이 책을 읽은 청춘이라면 훗날 꼭 란도샘처럼 문필은 아니더라도 설득력있는 문장가가 되지 않을까. 그들이라면 그시절 나처럼 콧방귀로 글의 힘을 외면하지는 않을 성싶다. 이런 스승의 필사적인 설득이라면.

마치 어렵게 찾아간 교수님이라도 뵈고 온 양 나는 가득찬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이번 독서는 봄맞이 새단장 이벤트처럼 신선하고 개운했다. 큰 기대 없었는데 기분좋아지는 시간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청춘이 그리울 때 나는 과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돌아간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도 헤어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의 육체와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그 시절로 시간을 돌려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 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회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돌리고 싶은 청춘의 그곳엔 항상 가정법을 써가며 내 인생의 전환점을 교정하지 못해 안달하는 내 중년만이 바빠보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설령 다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선 또 반대의 가정법을 써먹지 못해 애통해 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절실히 깨닫고 생활에 체화하진 못하였다. 이 책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디는 건 청춘의 몫만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고통을 다시 새롭게 감내해야하는 갑절의 시련일 것이 분명하다. 얄팍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청춘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접게 되었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열 두시 이후의 오늘을 계획하겠다는 야무진 의지를 가져본다. 엊그제 신문에서도 우리나라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자격증과 인턴십, 공모전과 봉사활동, 기타 아르바이트로 취업 5종세트를 구색맞춰 스펙을 만들어야 하는 요즘의 대학생을 떠올리면 내가 지나왔던 대학생활은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연예인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는 엄마의 의견과 판단에 짓눌려 주체적인 인생설계를 하지 못하는 대학생.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대학생. 어렵게 졸업하였다 해도 입사경쟁에 밀려 임시직에 머무르는 불안한 청춘. 이 책이 그들의 고민을 모두 깨끗이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아직은 하루중 아침 일곱시일 뿐이라는 교수님의 메시지가 조그만 힘이 되었으면 한다. 살아보니 인생은 그리 대단한 결심이나 방대한 이론, 장대한 연설이 아닌 어느 날 갑자기 꽃망울을 터뜨리는 우리네 봄처럼 가벼운 일상의 한마디, 우연한 한 번의 만남, 기대치 않은 한번의 성과들로 방향이 바뀌어지는 얄궂은 구석이 있다. 이 한 권의 책이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한 번의 격려가 되고 예기치 않은 한 마디의 잠언이 된다면 좋겠다.

더불어 나 또한 열두 시 이후의 설레는 계획으로 더 근사한 오늘을 기다려 보고 싶다. 문득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는 옛 노랫말이 떠오른다. 봄이 꿈나라라면 언제나 꿈꾸는 내 청춘은 아직인 게 아닐까. 나의 봄은 해마다 새로 시작되니 그렇담 나는 매해 청춘인 채로 꿈을 꿀 수 있는 게 아닐까.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청춘의 꿈만큼은 사는 동안 유지하고 싶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내 꿈을 위해 남은 열 두 시간의 일정표를 짤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달뜬다. 어떤 사람을 만날까. 무슨 일을 할까. 다시 공부를 해볼까. 지나온 청춘엔 울었지만 다가올 꿈나라엔 웃고 싶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내일’을 기다리기 위해 오늘도 ‘내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련다. 점점 전성기에 다가가는 기쁨으로 마흔됨이 즐겁다는 란도샘의 마지막 일기를 기억한다. 청춘의 일기는 쓰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쓰는 글은 열 두 시 이후의 일기가 되길 바란다. 혹시 올해 다 이루지 못한 다해도 나는 하루중 십팔분만 소비 한 것이니 실망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도 ‘내 일’로써 ‘내일’을 준비해 볼테다. 그렇다면 ‘내일’도 나는 ‘내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내 일’로 이루어진 나의 ‘내일’이 비로소 나의 ‘오늘’이 되는 날 나는 오늘 작성한 열 두 시의 계획표에 가슴깊이 감사할 것이다. 열 두 시 이후, 내 남은 하루의 반, 그때 새로운 시작은 분명 따스한 봄날과 함께였을 것이다. 그날 내게 뜻밖의 인생시계를 선물해준 사람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시간 이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시계를 꼭 선물하고 싶다. 아침엔, 아니 오후엔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도 보고 싶다. 다행히도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그들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서로가 가슴속에 각자의 답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우리의 꿈은 시계와 함께 이미 계획되었을 테니까. 우리가 만난다면 그건 봄같은 꿈나라, 꿈같은 청춘의 계절일테니까. 그땐 꼭 다시 꽃피우는 우리가 되어 있을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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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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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그동안 나는 이 작가의 단편들을 다른 문학상 수상집이나 특별기획된 소설집에서만 만나왔다. 기억나는 것은 이름만큼이나 고요하고 숨막힐듯한 막막함이었달까. 굳이 육체적인 느낌을 떠올려보면 기온은 그다지 낮지 않지만 습도가 많고 기압이 낮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축축한 서늘함이라 말하고 싶다. 굳이 또 분류하라 말한다면 이 느낌은 불쾌한 감각의 기억편에 속할 것이다. 느리고 더디지만 분명 두려워지는 심리적 공포를 유발하는 계획된 이야기들. 이 느낌이 내겐 어떤 편견으로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분명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만난 그녀는 굳이 ‘죽음’을 천천히 읊조리는 작가였고 절대 이 설정된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제작이 된 ‘간과 쓸개’는 작년에 만난 <2010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서 그들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어느 봄날 홍대 책거리 행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책들이 쌓여있는 전시대로 힘없이 걸어와 한마디 말도 없이 90도로 허리가 꺽여진 채 매대로 고꾸라졌고 놀란 그녀에게 '힘이 없어서 이렇게 쓰러질 때가 종종있다'고 죄송하다고 맥없이 말하며 천천히 돌아갔다고 한다. 갑자기 쓰러진 노인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가는 바짝 다가온 누구에게나 드리울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또렷이 목격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 소설집에 모아놓은 단편들 역시 하나같이 서서히 정해진 그곳을 향해 모두들 죽어가고 있기로 책을 덮고 나서 길고 큰 숨이라도 쉬어야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성란 작가는 이 분위기를 김숨이 발견한 깊고 어두운 ‘저수지’라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죽음을 연습하는 ‘예행연습’의 과정이 김숨의 소설작업이라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죽음이 두렵다. 나이 들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고 언제 죽을지 안다 해도 두렵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온갖 종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나서도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마지막에 대한 서글픔도 포함한다. 그 슬픔엔 그 길을 철저하게 혼자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가장 클 것이다. 천둥 번개가 몰아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갈듯 무서운 밤에도 의심없이 잠들 수 있는 건 다음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내일아침 급작스레 심장마비라도 걸려 운명을 달리 할지 몰라도 어제까지는 별일 없이 일어났기에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 관성같은 습관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내가 미처 거짓말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 나를 거짓말처럼 데려간다. 그리곤 나는 사라진다. 아니 내가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거짓말처럼 진실인 사실 하나 때문에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되는 존재들이 아닐까.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알아간다는 건 고개를 들기보다 숙여야 할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숙이고 보면 그전엔 몰랐던 것들이 보이고, 다른 것들이 들리고, 알 수 없는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감은 예민해지고 인식은 빨라진다. 신체기관의 성장이나 발달과는 상관없이 퇴화하면서 더 촉발되는 이 감각의 효과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을 생성한다. 그것은 무릇 혐오나 구토의 현장을 고발하듯 스스로를 있는 힘껏 자극함으로써 生을 유지하려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숨은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죽어감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였다. 말한다고 다 알아듣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죽어감을 끝까지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부고직전의 유서와도 같은 이들의 중얼거림은 그래도 아직은 나 살아있다는 투정이었을까. 자세히, 천천히 귀담아 듣지 않으면 쉽게도 놓쳐버리는 나지막한 음률, 숨쉬고 내쉬는 호흡과도 같은 죽음으로의 발걸음, 그것에 동참하는 길은 추적추적 빗물에 잠긴 운동화를 질질 끌고 따라가는 힘겨운 길이었다.

일상을 필사(必死)하라

우연의 일치인지 김숨의 소설에는 간이나 폐, 위, 쓸개등의 장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말기병 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병에 걸렸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분명한 건 병자로서의 현재 삶은 누추하고 빈곤하며 내일의 희망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인물들이라는 것. 인간의 주요장기가 파손된 결과로 그들이 피로와 호흡과 소화, 분해등의 신체적 결손을 자기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난한 처지에 병까지 걸린 가족 구성원의 불행을 나머지 가족들마저 외면하고 일상으로 편입시킬 때 환자의 외로움은 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주로 상처한 노인이나 사별한 미망인, 독신자등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법은 ‘필사(必死)’의 관찰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것만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전략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 ‘필사(必死)의 존재’지만 죽기 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 ‘필사(必死)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런데 이 전략은 하성란 작가가 언급했듯이 작가의 쉽지 않았던 관찰 결과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기에 그녀는 사실 젊지 않은가.

<간과 쓸개>에는 예순 일곱의 간암환자가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자신의 일상을 서늘하게 고백하는 글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소유해온 땅이 있었지만 자식들의 무언의 성화에 못이겨 땅을 처분하고 그들에게 지분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런데 땅을 팔고 돌아와 누은 노인은 자신이 30년 동안 허울만 좋은 소유주였지 그 땅에 정작 고추하나 심어보지 않았다는 헛헛함에 잠못이룬다. 그 땅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서울의 병원에 정기검진을 오가며 자식들에게 느낀 서운함과 중첩되고 이제 땅마저 없어진 자신의 육신마저 자신의 것인지를 생각게 하지 않았을까. 노인은 몇십년 된 단층 양옥 자신의 집에 있는 수도 계량기 통에서 죽지 않은 귀뚜라미를 발견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다고 느끼고 식당에서 ‘노르스름한 튀김반죽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으로 뒤채던 미꾸라지’를 보고 필사의 생명을 관찰한다. 누님이 가져오신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는 풍천장어’나 친구들이 키워보라고 하던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려진 나무에 악착같이 매달려 살아있는 표고버섯’ 모두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골목’ 신세인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노인은 우연히 들른 식당 거울속 늙은 남자가 죽은 사람이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없이, 그저 빤히 응시한 사람이 자신인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가는 여행에 자신이 승선했음을 감지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던 병석의 누님은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을 인체의 활동에 사용치 못하고 죽음의 액체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노인의 어린 시절 공포로 저장해놓은 검은 저수지의 두려운 기억은 누님의 쓸개즙과 정확히 같은 감각으로 부활되며 노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노인은 어린 시절 저수지와 누님의 쓸개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죽음이 다가와 그것을 알면서도 부패해 가는 육신과 그로인해 악취가 난무해진 현장에 대처할 수 없는,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필사(必死)의 체액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살면서 한번도 불만을 드러내 본적도 그것을 들킨 적도 없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은 입을 틀어 막고 숨죽여 울음을 삼키는 것 외엔 없었을까. 거울을 보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점이나 주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앞으로 아무리 많은 날을 살아도 오늘이, 오늘의 내가 앞으로 보다는 가장 젊어서 빛나는 날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임을 당연히 알고서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노인이 발견한 거울속의 자신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늙어간다는 것이 무작정 서러워지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곧 흐드러지고 말 추적한 봄날이 미리 서러운 애석한 심정일 것이다. 작가는 어느 봄날 90도로 허리가 꺽이면서 쓰러지던 노인에게서 그 애석한 서글픔을 발견하지 않았을지.

소리없이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은 <북쪽 방房>에서도 살아났다. 32년 8개월을 중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인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곽노는 간이 아니라 폐의 기능이 무너져 기침을 달고 사는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곽노는 눈에 안보이는 ‘지구와 우주의 이치’ 보다는 눈에 보이는 ‘광물과 광석의 실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물욕과 노욕에 물들어 있다고 보는 아내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이중성이 싫어 필사로 육신의 부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곽노는 점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육신때문인지 건넛집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롱도 관으로 보이고 북쪽 방 아래 가발공장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와 담벼락에 던져지는 쇠공 소리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서둘러 종용하는 외부공격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곽노는 자신이 유배된 북쪽 방은 철광석을 닮았고 자신의 육신은 철광석에 함유된 철 성분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황홀했던 건 ‘시간의 흔적인 선線들이 구현해 내고 있는 질서’라 기억하며 광물의 집합체인 한 덩이의 퇴적함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곽노가 퇴적암의 횡적인 표층을 질서의 극치로 여겼기에 급작스런 마그마로 생성된 암석은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혐오는 곧 무질서를 의미한다. 일상의 무질서, 그 혐오의 절정에 곽노는 담벼락을 향한 쇠공 던지는 소리를 우족사러간 아내의 해체로 앙갚음하며 일상에 부동하려했던 자신의 환상을 쇠공던지는 사람, 혹은 쇠공의 탓을 한다. 곽노가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식은 억지로 형성된 우발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연스레 굳어지는 시간의 퇴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종교였고 죽음을 준비하는 예행이었던 것. 숨쉬기 지독히도 힘들면 그저 숨을 덜 쉬면 되지 하는 곽노의 경지가 쓸쓸하게도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서늘함을 유발하던 가발과 우족, 쇠공 등의 장치가 곽노의 일상을 지배하던 소품이라고 하기엔 참 비일상적으로 낯설었다. ‘곽노’를 발음하면 ‘광노’가 된다. ‘곽노’가 미치거나(狂) 빛나는(光)노인이 아니고 식물도 동물도 아닌 광물을 사랑하는 노인(鑛老)이라는 것에 혹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대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방식은 아닐까.

‘곽노’가 유배된 북쪽 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목표를 가졌다면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 엄마는 버스 정류장 간이 매표소에서 죽기를 바랐다.(아니 끝까지 살기를 바랐다) 쉰 아홉이 될 때까지 엄마에게 매표소는 요람이자 침대이자 관구였다. 흡사 동물원의 우리라도 되는 듯 엄마의 다리는 홍학의 모가지처럼 말라갔고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매표소에서 길러 길바닥으로 내보내었다. 엄마는 도시전체가 홍수에 잠겨도 상가주민들의 철거 시위에도 사흘밤낮을 견디며 매표소를 떠나지 않았다.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중병에 걸린(듯한) 엄마는 매표소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것만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라 여겨온 듯하다. 하지만 엄마의 필사적 매표소 사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매표소만을 딸에게 남기며 죽어버린다. 사막여우처럼 지독해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나’는 성악의 꿈을 접고 동생들에게 떠밀려 매표소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매표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날 동물원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동생들을 찾아 헤매다가 진짜 동물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자청한다. 아프리카 코끼리를 기르고 싶어 했지만 매표소 안에서 번식력이 왕성하던 햄스터와 수명이 긴 자라로 만족해야 했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매표소로 돌아가 걸음만이라도 코끼리처럼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이 처량하고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는 한 평 남짓한 매표소라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生과 死를 다해도 꿈은 가질 수 없어 포기하고 접어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매표소를 지키려던 모성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린 한 인간의 마지막은 목메이는 빈곤의 현실을 상기하도록 침묵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이제 삶이 동물원 우리 속에 머무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나’는 지금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왜 울어야 하는지의 이유보다 어짜피 울 것이기에 언제인지가 더 중요한 ‘나’의 독백은 역으로 ‘울지 않았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매표소, 나의 꿈을 접게 한 매표소, 동생들의 목구멍이 달려있는 매표소에서의 시간만이 내가 울고 싶어도 울지 않도록 해주는 시간이라 실은 울지 않으려 울음을 참았던 시간만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라 외치는 나. 그건 엄마가 죽어나간 매표소이기에 똑같이 죽어야 하는 곳이 아닌 엄마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햄스터처럼 자라처럼 살아내어야 하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나’는 사막여우를 보며 지금은 울 시간이지만 돌아가선 사막여우처럼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표소에서 신문이나 껌이라도 사들고 집으로 오고 싶은 이야기, 휘영청 밝은 달을 친구삼아 오늘도 잘 견뎌내었다 자위하며 발걸음을 내딛고픈 이야기였다.

일상을 지켜내라

<모일, 저녁>
은 2009 현대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작품이다. 그때 현대문학상 수상자는 하성란이었지만 ‘알파의 시간’이 꽤 어려워 나는 김숨의 작품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 읽고는 식욕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작품이다. 아마 독자들도 시점이 점심이건 저녁이건 같았으리라 위로해본다. 주인공은 부모님이 삼십년 째 거주하고 있는 신탄진 빌라에 모일, 저녁에 들렀고 아버지는 전어를, 엄마는 기타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겨우 두어 시간 정도)에 그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일상을 바라보며 남일 이야기 하듯 부모님과 현재 처한 상황을 피비린내 나도록 냉정하게 묘사한다. 끝에 남는 잔상은 살기위해 뱀장어를 매일밤 백마리나 잡아대는 아버지의 몸부림, 그 얼굴위로 피어오른 연탄연기..참 매캐하고 그로테스크한 90년대 컬트 영화였다고나 할까. 이 작품이 <알파의 시간>을 넘지 못한 건 피비린내의 수위조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우려. 하지만 언젠가는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는 범상치 않는 서사의 흐름.”

꼭 일년 전에 나는 <모일, 저녁>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소설집 속의 이 작품은 아홉편들 중 가장 얌전해보였다고 할까. 다시 읽어본 이야기속에는 뱀장어 잡는 일을 하는 예순 세 살의 아버지, 연탄불에 전어를 굽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많이도 서럽다고 느껴졌다. 화자인 ‘나’는 삼십년 째 한 곳에 뿌리박힌 듯 살고 있는 아버지, 평생 죽을 때까지 은행 빚을 갚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가 모월 모일의 저녁에 담배와 소주를 사러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오늘밤 뱀장어라도 한 마리 더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이 끔찍하다기 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나 먹어대든지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고 중얼거린다. 아버지가 느낀 무서움은 지하에 오래전부터 늙은 채로 거기 살았던 할머니가 전어 굽는 냄새를 맡고는 올라와 밥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두려움과 일치했다. 전어 대가리만 빼놓고 새까맣게 타버린 전어지만 어찌나 먹고 싶어 하든지 ‘나’는 그 살고자하는 인간들의 욕심과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다. 매일밤 백마리의 뱀장어를 죽여야 하루 일당이라도 떨어지는 아버지의 노동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작가의 계산된 행위였을까.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을 사법고시만 십오년 째 준비하며 폐인이 되가고 있는 삼촌에게 전수하려는 의지를 가족에게 내비친다. 아무리 고시 준비생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뱀장어 잡는 법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 법. 특별할 것 없는 빈곤층의 어느 저녁을 스페셜하게 데워낸 작가의 글쓰는 체온이 구워지는 전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무덤덤하게 늘 일상화된, 일상에 전어 굽는 냄새처럼 피할 수 없도록 스며든 슬픔일랑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혹시 때가 되면 말없이 사라져야 했던 아버지의 칼같은 일상의 법칙, 지긋지긋하고 끔찍해도 변함없이 일상을 처리하며 살아온 관성의 이력이 그들의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닐까.

피할 수 없이 반복되는 각박한 일상에 스며든 슬픔은 <럭키슈퍼>에서도 기세등등했다. <모일, 저녁>의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뱀장어를 잡는 행위는 <럭키슈퍼>에서 엄마가 매일 두부나 콩나물을 팔고 받아낸 동전을 세는 행위와 같았다. 엄마는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슈퍼를 열어 유통기한이 넘은 각종 식품들을 팔고 있다. 말이 슈퍼이지 실상은 두평 남짓한 구멍가게이고 길 건너 ‘서울슈퍼’가 생긴 이후에는 노가다나 파출부, 건달들만 간간히 들러 물건을 사가는 실정이다. <모일, 저녁>에서 오랜만에 들른 딸에게 전어를 구웠다면 <럭키슈퍼>에선 서울슈퍼에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떼어 놓은 생태가 있었다. 그런데 생태는 날이 저물어 아가미에 거품처럼 벌레가 꼬여들고 생태를 사간 이웃들은 양심도 없다며 반품, 환불을 요구한다. 엄마는 생태들에 들러붙어 악다구니를 써대는 기생충을 박박 씻어 찌개를 만들고 온 가족은 할 수 없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찌개를 먹게 된다. 이 모든 일상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혼자 잠이 드는 예비 고등학생 ‘나’에게는 큰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도 아닌 매일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가게가 몰락의 기로에서 추락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기한 지난 식품처럼 아빠의 유통기한을 새로 써서 어떻게든 아빠를 팔아보겠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실직으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빠의 이마위에 날짜를 새로 적겠다는 엄마의 바늘이 머리를 콕콕 찌르듯 예리한 자상을 남기며 작품은 한치의 여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방법은 일상을 바늘처럼 정확하게 지켜내는 것이었을까.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도 하루 종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지켜야 하는 가게의 진리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럭키 금성’이나 ‘럭키 서울’에 익숙한 내 세대에게 ‘럭키슈퍼’는 지금의 이마트보다 더 다정하고 알싸한 이름이다. 한창 가게이름들에 외래어가 접목되던 그 시기에 대형상가과 대규모 상인에 눌려 (올림픽 유치를 이유로)잘 지내고 있던 노점상들이 강제 철거된 그 시절 이야기가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서울엔 알고 보면 그렇게 럭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다.

일상을 뒤틀어라

<흑문조>
에서 화자는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허름한 집을 마련한다. 부모님의 간이나 폐, 심장이라도 내다 판 심정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집은 화목하고 따스한 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자가 말하는 집은 한마디로 ‘흑문조를 기르기에 좋은 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멘트의 독성’과 ‘찌든 곰팡내’, ‘칠흑같은 어둠’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지하실엔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계단을 사이에 둔 옆집 남자는 끊임없이 계단을 허물자고 요청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보일러 기계가 말썽나 기술자들을 불렀고 그들은 터진 보일러 배관을 찾느라 집안 구석구석에 구멍을 파 놓게 되었다는 것. 구멍천지가 된 집안에는 지하에 있던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어렵게 수리를 마치고 나서 화자는 흑문조의 꿈을 꾸게 된다. 흑문조의 범상치 않은 불길한 예견때문인지 화자는 흑문조를 알아보러 외출을 하지만 돌아와 보니 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어 그제서야 부모님에게 진 빚을 떠올리며 흑문조를 잊게 된다. 화자는 누추하고 더러운 집안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을 다리를 잃고 허공을 맴도는 흑문조의 흉조로 감지하고 새가 예견했을지 모를 일상에 죽음같은 공포를 느낀다. 지하실에 벌레가 있고 보일러가 고장나고 옆집과의 트러블 같은 해프닝은 별스러울 것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김숨은 삶이 어떻게 물질적 환경에 지배당하며 뒤틀린 일상을 잉태해내는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생명을 위협하는지 필사의 감각으로 화자를 해명하는듯 해보였다. 그럼 우린 흑문조 같은 헛된 불길에 휩쓸려 계단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길조를 떠올려야 할까. 흑문조가 사라지면서 남겨진 건 여실히 존재하는 부모님에게 빌린 돈이었다. 흑문조를 맨 처음 누설한 건 손님의 한마디였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불길은 결국 자기예언의 다른 버전에 불과했다. 흑문조는 실은 스스로 길러오던 화자의 마음속 새였던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흑문조를 집으로 데리고와 기를 것이 아니라 흑문조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를 본래 좋아하지 않아서 인지 새를 통해 흉조와 길조를 예견하는 풍습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흑문조와 화자의 불안을 미세하게 중첩시킨 문장의 날개짓은 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하얗게 안보이는 불안을 까맣게 보이는 현상으로 그려낸 흑문조는 흡사 김숨의 소설속 불사조는 아니었을지.

<흑문조>처럼 불길한 불청객은 <육肉의 시간>에선 미이라로 등장했다. 아이가 없던 마흔줄의 부부에게 낯선 여자의 방문은 일상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원흉이었지만 여자는 또 다른 여자로부터 동요하지 않으려 자신을 정렬시켜 나간다. 유난히도 질서와 평온을 가정의 제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화자에게 여자가 내뿜는 기운은 흡사 <흑문조>가 제공하던 불길한 예감과 동일해 보였다. 마침 고대 이집트 유물전시로 바쁜 박물관 연구원 남편은 ‘발굴’이나 ‘전시’에만 가치를 둘뿐 화자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 고대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여자는 ‘그자들이 심장과 간과 폐를 가져갔다’ 말하고 온종일 찰흙을 치대어 그림자 같은 형상을 주조하는데 골몰한다. 여자가 형상의 구멍에 숨을 불어넣던 것이 흥미로왔는데 쓸모는 없었지만 그 숨을 통해 입체적으로 부풀려지는 동적 활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것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가 내겐 작가가 하잘것 없는 일상에 문장의 힘을 실어넣는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창틀에 세워진 형상들은 흡사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마용을 연상케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있지만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한 외양으로 여자를 엄호하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소금을 국자로 퍼먹고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는 채로 그들 부부와 동거했다. (믿었던)남편은 급기야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여자와 (기다렸다는 듯이)육체적 관계를 시도하고 관계 후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사라진다. 지난 30여년 동안 종교처럼 매달려 왔다는 발굴관계자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화자는 여자를 통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낀 것일까. 중요한건 남편과 그들의 욕망이 사라졌다고 여자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여자의 육체만은 더 분명한 진실인듯 화자의 눈앞에 변함이 없었던 것. 작가가 말한 <육肉의 시간>이란 지금까지였던 걸까. 지금부터인 걸까.

어느날 갑자기 <흑문조>가 날아든 일상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는 육체로 방문한 여자는 일상에서의 잠재된 불안과 소통되지 않는 현재시간에 대한 불만을 그 기저로 탄생한 환영은 아니었을까. 불임으로 예상되는 아내, 미이라같은 유물에 몰두하는 남편, 이들에게 있어 육체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마흔줄에 들어선 이들에게 아이라는 내세의 희망은 실현가능성 없는 미이라 같은 현상이지만 만약 육체가 부패하지 않고 미이라처럼 보존되는 것이라면 얼마든 시도해볼 만한 이벤트는 아니었을까.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이 모든 환영을 참아내며 남편의 씨받이로서 미이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육肉의 시간>은 (미이라같은)육체를 인식하고 (미이라와의)육체적 행위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아니었을지. 심장과 폐와 간이라는 육체의 주요장기는  없었지만 절대 썩지 않아 영구보존할 수 있는 욕망의 창고처럼. 그것은 혹 뼈와 살이, 피와 핏줄이 마구 뒤틀려 해체된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우리 육체적 욕망의 미이라는 아니었을까.

일상을 반복하라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의문의 대상, 환상의 객체로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일상을 조여드는 작품도 있었다. <룸미러>에서 ‘아이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는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 거 라더군‘의 한마디와 조우하며 작가는 계속되는 일상의 불안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실제로 작품 초반부엔 그저 큰 뜻없이 지나간 한마디였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한마디는 훗날을 예언하는 어떤 정령처럼 다가왔다. 마치 헤어지자 헤어지자 반복하면 정말 이별하듯 그들은 오늘 만들어진 말로써 내일을 견디는 존재들이었다.

<룸미러>에서 1998년형 베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가족의 목적지는 친척의 장례식장이다. 이들 부부는 뒷좌석에 곤히 잠든 아이들이 절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운전중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깨어나면 어쩌려고‘ 이다. 잠든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수없이 해본 내 경험상 아이가 깨어나는 것이 이토록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 짜증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아이가 깨어난다는 것은 일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쯤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아이가 잠든 시간이 가장 평화롭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국 이들은 아이를 위해 아이가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 안전추구의 심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평화를 방해받는 것이 죽도록 싫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들에겐 왜 아이한테 신경을 써야하는 상태가 필요이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과민한 사건일까. 사실 아이가 깨지 않는 시간동안은 아이가 깨어 있을때보다 더 불안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들은 아이가 깨면 마치 불안이 더 확장되어 자신이 감당할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소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 작품을 외아들이면서 소심한 성격의 한 가장이 운전이라는 반복된 일상을 최대한 자기 방식으로 방어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도중 도로에서 돼지나 새의 심리적, 우발적인 공격을 당하고 곧바로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룸미러는 특정한 공간안에서 내재된 온갖 종류의 불안을, 그 불안의 뒷모습을 나타내는 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부분적인 거울인 것이다. 룸미러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있다. 이들의 불안이 절정에 이를 때 차는 기름이 떨어지고 때마침 늘어선 행렬은 멈추게 된다. 잠든 아이를 놓아두고 이들은 벌어진 광경을 확인하러 각자 길을 떠난다.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들은 끝내 말해주지 않으며 끝까지 아이들이 깰 뻔한 걱정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무슨 광경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혹시 그 광경으로 인해 아니면 자신들을 기다리다 지쳐 아이들이 깨어났을지의 여부만이 여전히 의미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서웠다. 우리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나 실체는 사실 두려웠다는 기억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깨어나면 안된다‘는 두려움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자‘는 당연하고도 기계적인 메시지 같아 마치 그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실천하는 듯이 느껴지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처럼 자랄까봐 두렵다는 남편의 고백은 어느정도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는 아이들이 깨어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벌레가 두렵기 때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이 두렵듯이.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 이 작품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서사를 이끌었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도 불안해 보이는 부부는 여전했다. 마흔 넘어 일자리를 구하려는 아내와 통조림 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 이웃은 소통불가한 존재들로 위치했다. 집주인은 아들의 뇌수술을 빌미로 전세금을 올려 달라 요구하고 302호 여자는 치킨을 가로챈 데다가 202호 남자는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고 한다. 전세금을 친정에 부탁할까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늘 주무시고 계신다. 아내는 어느날 옥상에 자라를 버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내친김에 욕실에 자라를 키우기 시작한다. 이 모든 아내의 일상에 남편은 오로지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거라’는 선문답으로 대화를 마무리 한다. 남편은 촛불집회로 인산인해를 이룬 시내 광경을 매일밤 뉴스로 확인하며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같은 뉴스에서 꼭꼭 닫혀있는 빌딩, 불이 꺼진 창문, 봉쇄된 입구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시커멓게 서있는 빌딩처럼 영 소통불가한 이웃이었지만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이웃남자는 ‘오늘밤 그곳으로 갔’을 거라는 답을 한다. 그곳은 대체 어디이며 남편은 정말 그곳에 간 것일까. 부부의 서로 다른 관심사가 조형해낸 일상의 불안은 비밀스런 이웃에 의해 그 비밀이 와해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애초부터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고 몰랐기 때문에 비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욕실의 자라처럼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경향이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전세사는 고단한 맞벌이 부부의 건강치 못한 일상의 풍경을 살짜기 시국의 뉴스로 탓을 하며 비밀아닌 비밀을 은밀히 전달하는 수사를 선보였다. 남편이 간 곳이 그곳인지의 여부보다는 이웃마저 그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불안의 공감대, 공감의 노출, 그 사실이 더 중요해보였다. 혹시 현대인에게 이웃이란 각자의 불안을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비밀을 생성하는 공동작업의 동반자는 아닐까. 이 작품에선 비밀도 이웃간 일종의 균형장치로 이해되었다. <룸미러>와 함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현실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은 역으로 불안을 규격화, 정형화하여 정해진 불안으로 얼마간의 안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숨이 조제한 말들은 마치 불안하라, 불안하라 주문하듯 들렸고 역으로 그 주문 때문에 다소나마 불안을 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숨은 별스럽지 않은 인생 다반사의 풍경을 점점 긴장스럽게 절정의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꼭 저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예감과 불안을 선사하는 탁월한 긴장유발자.



- 문장 웹진 <흑문조> -


   여자가 숨을 불어 넣던 구멍들을 따라 균열이 부챗살처럼 번져 나갔다. 249p


아홉편의 작품들은 질병의 축제이자 축제로 생겨난 일상의 환부로 가득했다. 쉽지 않았다.  아플 것은 알았지만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서평이 줄거리 중심이 되었다. 그만큼 모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고 놓칠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난과 질병, 죽음, 생계의 고통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현실에 짓눌려 현실을 현실에서 현실처럼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쩐지 현실적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현실인걸까. 김숨의 소설은 희망을 쉽게 발견하기는 어렵다. 외려 발견하려 할수록 저수지 밑으로 침잠하는 성격을 가졌다. 작가가 그러했듯 그냥 소설을 가만히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결론보다는 인식자체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그 저수지를 향해 미약하나마 가녀린 숨을 불어 넣다보면 어느새 미세한 균열의 파동이 감지된다. 고요하게 떠오르는 낯설은 존재,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지의 기대, 예민한 촉수로만 느껴지는 감각의 실체, 그것은 분명 내가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삶의 자각은 아닐까. 어떤 자각을 하였을지는 김숨의 숨을 통해 부풀려진 우리 감각의 정도에 있을 듯하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한마리의 새처럼 뜬금없이 거실에 뛰어든 한마리의 귀뚜라미처럼 누군가 옥상에 두고간 한마리의 자라처럼 파다닥 꿈틀거리는 긴장의 호흡일지 모른다. 숨막히는 현실과 숨쉴틈 없는 일상에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조금은 적나라한 우리 생명의 실상일지 모른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도 꿈틀거리는 마지막 의지는 살아있듯 현실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 문득 살아 숨쉬는 이 시간에 감사하고 싶다. 그녀가 소설에 숨을 불어 넣으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이토록 힘겹게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리 역시 그녀처럼 우리 삶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숨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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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4-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궁금증에 대한 질문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오 2011-04-09 08:04   좋아요 0 | URL
거기 네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