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맙다, 친구야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시절부터 서울로 전학와 다섯 번의 전학을 다닌 후에야 졸업을 했다. 70년대 말 남쪽 지방에서 바퀴가 세 개 달린 용달차를 타고 올라온 우리 식구는 당시 변두리였던 강남땅에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을 정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큰 이모 집에서 일 년, 막내 이모 집에서 이 년, 이런 식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친구와 사귈만하면 학교를 바꾸어야 했다. 전학을 많이 다닌 이력 덕분에 어떤 곳에서도 단기간에 적응하는 놀랄만한 생활력이 몸에 붙게는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책상 앞에 앉아 진득이 공부를 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우리 때는 사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다지 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방과 후 학원을 가는 아이도 없었고 또 동네에 학원이라고 하면 주산이나 웅변 학원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만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이었고 그렇기에 가정환경은 외려 지금보다 더 공부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부모님께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가정환경 탓을 많이 해온 쪽에 속했고 그렇기에 이 책의 주인공은 어른 된 나를 뒤늦게 부끄럽게 하였다. 
  
  나는 부산에서 이미 한 학년을 다니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부모님은 내가 똑똑한 아이인줄 알고 (편법으로)한 살 일찍 학교에 입학 시킨 경우였다. 그런데 서울에선 그 한 살의 융통성이 적용되지 않아 다시 일 학년부터 학교를 다녀야했다.(그땐 입학시기가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어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생에 초등학교 입학을 두 번 한 것이다. 투박하지만 정이 많았던 부산 사는 친구들도 생각나고 이미 배운 것들이라 흥미도 없고 무엇보다 사투리를 고치지 않은 내 말투는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당연히 학교를 가기가 싫었다. 비록 어렸지만 내 기억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며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초등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고 내 존재감을 드높이는 일은 무엇보다 공부를 잘하는 일이었다. 서울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집에 가면 도통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를 괴롭힌 것은 경제적인 빈곤보다는 심리적인 박탈감이었다. 친척이었지만 우리 집은 늘 이모네 집보다 못살았고 우리 식구는 사실 우리의 집이 생길 때까지 얹혀사는 신세였다. 몇 년간 이 관계가 지속되자 엄마는 언니건 동생이건 우리가 얹혀사는 이모네의 궂은 살림을 다 해주셨고 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 시기 이미 기득권싸움에서 뒤쳐져 있던 나는 사촌들로부터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고 늘 그들과 같은 학교를 다닌 내가 나를 이기고 그들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공부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집에 오면 나는 그들이 이미 훑어본 참고서와 한번 읽고 난 후의 책을 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그들보다 시험을 잘치기라도 하면 이모들로부터 과한 비교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늘 사촌들의 시기 대상이 되어 있곤 했다. 잘하면 잘해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나는 늘 가시방석이었다.  

  이 책의 저자에 비하면 나는 마음하나 불편한 것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핑계를 대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 시절 나는 제발 하루만이라도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보고 싶은 나의 책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했었다. 세월이 흘렀고 박철범이라는 친구와는 환경이 달랐지만 나는 그 ‘하루만이라도’하는 절박한 심정을 너무도 잘안다. 저들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 책으로 자기 책상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루만이라도’ 사촌들처럼 공부해보고 싶었다. 나는 부모님이 (어디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 처음 사주신 책상을 무슨 골동품처럼 아직도 쓰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이 꼭 내 어린 시절의 그 절박함을 이제야 찾아내 알아주고 그 서러움을 몰래 달래주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봄볕처럼 따사로와지고 봄비처럼 촉촉해지는 독서였다.

  그랬다. 사실 이 책을 읽어보고 한창 공부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던 내 딸아이에게 은근슬쩍 권해볼까 하던 마음이 많았다. 이 책은 이미 학부모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진 심리적 요법(?)의 효과적인 동기유발서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5학년이고 말 안해도 공부의 중요성을 알지만 스스로 자신이 공부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이 책을 읽고 바보같이 두어 번 눈물까지 터뜨리며 완전히 내 마음의 공부시간으로 활용해 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공부전략서가 아니라 공부철학서였다고 할까. ‘내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서울대도 고려대도 합격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계속하여 공부를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 생각된다. 중요한 건 (힘들어도)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질긴)마음 하나에 있었다. 나는 이 친구의 그 마음 하나에 반했다. 공부란 마음의 문제라는 걸 새삼 깨우쳤다. 하지만 혹시나 딸아이에게는 반대로 ‘이렇게까지 힘든 환경에서도 일등을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식의 상처와 반감을 줄 수도 있겠다 싶어 읽어보란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 땐 이랬는데 식의 비교가 아이들에게 먹히지 않는 걸 잘 아는 학부모로서 이런 책은 틀림없이 반갑기 짝이 없지만 내용을 확인하기 전엔 이 책도 고만고만한 ‘공부’의 이야기로 결국 ‘공부하라’는 결론과 다를 바 없다고 선입견을 가질까봐 나는 생각이 많아졌던 것이다.

  서점에 나가보면 차별화된 공부전략으로 일류대에 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는 늘 매대의 앞쪽에 위치한다. 딸 가진 엄마인 나 역시 습관적으로 ‘우등생 비법’이나 ‘내신 올리기’같은 제목에 눈길을 주고 두어 번 페이지를 넘겨보다 에잇 하고 마음을 접고 돌아오곤 했다. 남들이 한 공부, 그것의 전략에 대한 책을 읽느니 그 시간에 해오던 자기 공부를 꾸준이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공부만큼 특별한 비법이나 탁월한 전략이 많은 분야도 없지만 사실 그런 만큼 비법과 전략은 이미 평범하거나 전략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건 그 방식으로 공부해서 지금의 성공을 이룬 사람의 전략인 것이기에 대단해 보이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본 방식이거나 또 하다가 실패한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들끼리 정보차원에서 돌려보기도 한다. 마치 먼저 읽은 사람이 제일 먼저 그 전략을 알고 있다는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다른 엄마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어떨 땐 특별히 유행하는 비법을 하나 더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정보수집에 우위를 확보했다는 안도감마저 느끼곤 한다. 설사 내 아이에게 그 방법이 맞지 않아 적용하지 않을지언정 내가 아직도 그 비법을 모르는 엄마로는 보이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경쟁심이 발동하는 순간일 터이다. 이 책도 처음엔 그런 유혹의 연장선상에 있는 베스트셀러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줄기차게 공부를 말하고 있지만 공부 잘 하는 방법이나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한 전략이 아닌 죽도록 공부하는 ‘이유’와 죽을 만큼 공부하는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즉 공부를 하기 이전, 공부를 하게 되기까지의 섬세한 마음의 변화와 그것에 따른 결과를 낱낱이 보고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자가 수능생활을 지나쳐 온 시기를 이토록 생생히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건 그 과정을 전달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그건 그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갈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그 길을 간 사람들은 그 길을 가야할 사람보다 많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많고 많은 먼저 가본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의 길은 여느 성공의 길을 걸어간 먼저 가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특별해 보이는 것일까. 혹시 그는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길,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쉬운 길이라도 발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을 덮고 공부 이야기로 진한 감동을 느껴본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감동을 느껴본 적이 있기는 했는지 싶어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그리곤 이 친구의 길을 따라가 보았더니 나는 공부하는 한명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때라면 그 시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 싶었다. 물론, 이것도 지나고 난 세대로서 일종의 그리움에 해당될 터이다. 하지만 이제 공부라면 한참 멀어진 나 같은 학부모 세대에게도 무엇이든 절실한 이유를 찾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결국 건강하게 살아가는 生의 방식이 되겠다는 깨우침을 주었다. 한참 어린 조카벌의 친구지만 만나면 어깨 한번 툭 쳐보고 싶은 친근한 고백에 이렇게 또 일상의 용기를 얻는구나 싶어 그 친구가 공부해준(?) 세월이 새삼 주책스럽게 고맙기까지 했다.

후회한다, 친구야

 
이 친구의 고백을 듣고 퍼뜩 생각나는 이치가 있었다. 나는 지난 시절 영화쪽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영화 하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이유가 같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기억이 있다. 어떤 영화가 성공하면 그건 감독이 좋았고 시나리오가 좋았고 배우도 좋았고 미술, 조명, 음향, 특수효과, 개봉관 모든 게 좋았기 때문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실패하면 그것 역시 감독이 나빴고 시나리오가 나빴고 배우, 기타 등등이 모두 나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성공이냐 실패이냐 최종적인 결과에 따라 선행하는 조건이 따라가는 이 역주행의 평가법칙은 가만 보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이유와도 많이 닮았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는 집안도 좋고 부모님도 훌륭하고 학원도 좋은 데를 갔기 때문이고 공부를 못하는 친구는 완전 그 반대였다는. 박철범이라는 친구는 언뜻 보면 이 법칙을 보기 좋게 깨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이 친구의 가정환경과 주변 인물들을 보면서 내가 터득한 법칙이 틀린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저자에겐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이혼한 후 타지에 나가 돈을 버는 어머니, 툭하면 때리고 늘 아픈 할머니, 왕따시키는 친구, 무조건적인 선생님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가 일류대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그에게 강렬한 동기를 부여하고 꾸준히 격려한 生의 조력꾼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시험에 실패하고 청춘을 탕진하여 성공의 기회를 놓쳤다면 똑같은 가족과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그의 불행을 견인하는 5종 도우미 팩키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성공하기 전에도 실패하기 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똑같은 사람들인데 그의 결과에 따라 이렇듯 평가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이 나지막히 건네는 엄숙한 교훈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조건이 아니고 내가 수용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엔 박철범군이 운이 좋은 것 일 수 있지만 내 보기엔 박철범군 때문에 그들은 박철범군을 만든 일등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 역시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어떤 친구는 왕따를 당하고도 그것을 계기삼아 자신의 단점을 돌아보지만 또 다른 친구는 그로 인해 가출이나 자살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까. 왜 어떤 학생은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가정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서운해 자신만은 어떤 일을 하든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의 왕자가 되고 또 다른 학생은 결손가정이라는 지울 수 없는 자격지심 때문에 훗날 애정결핍의 왕자가 되는 것일까. 똑같은 갈등요소를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하게 되는 경로를 따르지 않고 반대의 선택으로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올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나 이변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에 해당되는 일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를 보고 다시금 기적은 전혀 기적스럽지 않게 지겹도록 반복된 노력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친구가 꼴찌에서 일등이 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해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 이 친구는 어떡하다가 끝내 기적이라는 골인지점에 다다른 것인가.

  혹시 그는 결코 기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하루아침에 실력이 향상되는 비법같은 건 있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가 만든 기적은 내용상으로만 보면 외려 부단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다. 모두 성공한 것도 처음부터 일등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극적 드라마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입시만 보더라도 점수에 맞추어 지방 공대라는 진로를 정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고 학교가 성에 차지 않자 다시 재수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다녀 보니 서울대라는 간판보다 하고 싶은 일이 더 간절했기에 마지막 법대로 전공을 바꾼 건 어찌 보면 인생에 있어 커다란 실수와 이어지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해도 좋았다. 말이 쉬워 재수, 삼수이지 (합격을 보장하지 않는)수능을 여러 번 치루기가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그것은 어쩌면 도박같은 모험에 속하는 위험한 선택일지 모른다. 재수가 하기 싫어 차라리 꿈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던 내 비겁함이 이 친구를 보며 다시금 기억나 많이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재수가 죽기보다 싫어 대폭 하향지원으로 원서를 접수했고 결국 (수석도 아닌) 과차석으로 떨떠름하게 합격을 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4년 내내 남은 점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용기있게 좀 더 나은 학교를 선택하지 못한 내 자신을 괴롭히고 좌절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나도 꿈이 있었고 내가 선택한 공부말고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시작해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합격시켜준다는 보장만 있었다면 나는 학교를 때려치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찌될지 모르는 미래의 결과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단순히 내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해내었다고 위대해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소신을 따르는 일은 자꾸 나이들수록 점점 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해야할 사항이 꼭 자기 나이와 비례해가기 때문이다. 헌데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이미 선택한 것이 불만스러워도 다시 도전할 것이 두려워 그냥 현실에 주저앉고 마는 만성병을 키우게 된다. 우리는 생각외로 많은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현실을 잊는 것으로 현실을 견뎌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나는 내가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았고 그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예정된 후회를 하려고 그냥 그대로 살았나 싶기도 하다. 그때 다시 도전했더라면...다시 공부했더라면....다시 입사를 했더라면...후회는 얼마나 편하고 정당한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이던가. 나는 왜 후회로 가는 길을 두 눈뜨고 지켜보기만 했을까. 그리고, 그는 대체 후회를 중단할 그 용기가 어디서 탄생된 것일까.

  부러웠다. 남들의 이야기를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고 재차 시도해보는 그의 뚝심이. 이 친구는 아마도 죽어도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한 연인처럼 공부를 철썩같이 믿었던 모양이다. 공부는 공부를 믿는 사람에게만 결과를 약속한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가혹했지만 공부만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렵고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공부에 대한 속성을 세상이치 깨닫듯 알아버린 듯하다. 모진 세상살이에 좀 더 일찍 내던져진 이력이 결국 그만이 가진 차별화된 능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사적인 이유가 없다며 매를 든 선생님으로부터 서운하기는 커녕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선생님의 기대에 오히려 기뻤다고 했다. 공부를 위해 무엇인가 희생을 하게 되면 공부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게 된다는 사실, 공부가 재미있게 되는 비결은 공부보다 재미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깨우침, 공부를 연인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정말 믿을 만한 연인이라는 나름의 공부에 관한 ‘철학’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 종교와 철학같은 믿음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자 감동이었다. 나도 공부를 못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공부라는 것 자체의 속성을 고민하고 몸소 깨우치고 정리해 본 기억은 없다. 엄마나 선생님의 주입식 생각대로만 지겹도록 따라온 나같은 모범생에게 이 친구의 발상은 기특하면서도 한편 얼마나 아프게 느껴지던지. 곁에 있으면 한 번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이 친구가 신기했다. 모두 자신이 겪으면서 몸과 마음을 다해 터득한 것이기에 자신을 믿을 수 있었고 이렇듯 남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갑다, 친구야

 
사람을 글로만 판단해선 안되겠지만 이 친구의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심성이 참 소박하고 천성이 순하다는 어른된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성취를 뒤돌아 시기하고 그 질투심 때문에 다시 책상앞에 앉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성적은 우등생이지만 마음만은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은 친구의 성취에 결코 진심어린 축하를 하는 법이 없고 내심 그 친구를 이기려는 열망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공부를 잘하면서 자신보다 더 잘하는 친구를 존중하고 못하는 친구를 배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월등했던 시골학교 친구 창진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친구의 장점을 고개숙여 배우려고 노력하는 대견한 구석이 있었다. 창진이를 오랜 세월 스스로 마음속의 공부멘토로 삼은 그의 순수한 마음이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문과 전교 1등 창진이와 이과 전교 2등 철범이가 훗날 각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멋지게 재회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 괜스레 시큰해지기도 했다. 목메이고 울컥했던 건 외할머니를 보고서 더했다. 3학년 때부터 비행기 탑승수속 방법을 가르쳐 주신 지혜로운 어머니도 그리웠지만 천하의 몹쓸 ‘인간말종‘을 자랑스런 ’인간 본보기‘로 키워주신 외할머니는 새삼 돌아가신 내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면서 끝내 눈물훔치게 만들었다. 꼭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자의 수능이 끝나고 할 일을 다 하셨다고 눈감으신 것 같아 다시금 당신이 살아 계셨던 이유, 질기게도 세상을 버릴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소망을 떠올리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봉사라 강조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쩐지 책을 덮고서도 오래 잊고 싶지 않았다. 팔십 평생 살아봐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던 순간,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보람만이 남는 거라는 말씀은 지난 시절 희생으로 우리를 길러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수많은 어머님들을 생각나게 하는 숭고한 유언이셨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기에 그 말씀은 진정 이 시대에 성공한 모든 장년들에게 전달하시는 간곡한 부탁만같아, 그리고 그들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 해오신 당신들의 세월이 자꾸만 눈에 밟혀 나는 오랫동안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 할머니, 내 어머니도 나를 위해 희생한 세월이 있었는데...그들도 그렇게 눈을 감았는데...지금의 나는 나 혼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살아온 시대는 틀렸지만 이 친구는 우리와 같은 어머니, 같은 할머니를 둔 친구라는 생각에 정말 추억의 친구를 만나듯 더 친근하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의 말마따나 전교 1등의 이력으로 특목고를 졸업하고 일류대로 이어지는 합격생만이 입시의 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번듯한 가정환경과 지속적인 사교육 하나 없이도 당당하게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우리사회 미담이라 할 수 있는 성장수기였다. 탈출구 없는 환경에서 외려 공부를 탈출구 삼아 그를 애인으로 만들어버린 대견한 시골청년의 공부와 연애하기 정석이었다. 인터넷 대신 땅에서 삶을 배우고 학벌이라는 간판대신 하고 싶었던 꿈을 찾는데 포기하지 않은 진짜 수험생의 본보기를 보여준 해법이었다. 25점 짜리 꼴찌도 입시학원에서 이과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음을 기록한 감동의 참고서였다.

  문득 모든 공부에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때 왕도는 어떤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칭한다. 왕이 되는 길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생각난다. 그는 지금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공부라는 길을 돌고 돌아 많이 헤매어 보았기 때문에 어디 쯤에 벼락이 있고 어느 곳에 바위가 있는지 말해주고 싶어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왕에 다르는 지름길을 지도처럼 정확하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왕에 이르려면 꼭 지나가고 피해야 할 길을 혹시 잘못 들어섰더라도 다시 나설 수 있는 길을 아는 만큼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의 왕도는 그의 ’최선’이었고 그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전달한 것이다. 공부라는 먼 길 떠나는 마음의 네비게인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걸어가 본 길만이 꼭 왕도의 길이라 주장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이 왕이 되는 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멋도 모르고 따라가 본 길은 어쩐지 하늘높은 왕도와 연결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 그 왕도로 떠나진 않더라도 왕에 이르는 길을 하나 알고 있다는 마음만은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걸까. 길을 알면 운전을 반이상 한 것인데 꼭 길을 미리 알고 떠나는 운전자 마냥 든든한 기분. 그건 이 책이라는 땅을 믿어본데서 얻은 뜻밖의 마음수확이었다. 나는 이제 책을 덮고 슬그머니 아이의 책꽂이에 이 책을 꽂아본다. 그의 어머니처럼 책을 먼저 읽고 선별하여 아이를 유도하는 부지런함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아이가 언젠가는 마음에 이끌려 스스로 이 책을 잡을 날을 기다린다. 아이도 박철범이라는 친구가 반가운 멘토가 되어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를 통해 그의 할머니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이 가슴에 전해질 순간을 기다린다. 만약 아이에게 이 책의 기회가 닿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의 어머니, 할머니처럼 내 아이에게 그렇게 유언하고 싶다. 그건 어쩌면 내 할머니, 어머니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희생하며 키운 우리네 자식들이 공부 ‘잘’ 하였다고 ‘잘도’ 자만하지 않고 혹시나 자신들을 외면했을지 모를 우리 사회를 다시 ‘잘’ 품어 보듬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공부 ‘잘’ 한 사람의 사명임을 조용히 새겨본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말씀이야 말로 공부 잘 하는 왕자들이 실천해야 할 도리, 공부의 왕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결국 사람을 잘 이해하고 사회를 잘 이끌어 가는 일임을, 그 당연한 이치를 새롭게 공부한 나. 그냥 책을 꽂기엔 웬지 서운한 마음에 잠시 눈을 감아본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그리워 해본다.

  친구야, 보고 싶다. 당신의 눈부신 앞날을.
  벅차게 기다린다, 그로 인해 더 따스해진 우리 사회를. 그 사회 속에서 커 나갈 내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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