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좋을까. 마침내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봄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교정에 피던 목련꽃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나는 왜그런지 흐드러진 벚꽃보다 늘 봉우리가 알찬 목련이 좋았다. 그건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던 내 고집이기도 했다. 정을 더 많이 주었기 때문인지 꽃이 질 때도 목련은 유독 처연해 보였다. 벚꽃은 눈가루처럼 흩날리지만 목련은 고개를 떨군 채 목이 부러진다. 목련이 지는 것이 꼭 어떤 인연이 절연되듯 느껴졌달까. 그런데 난 그땐 그걸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내가 봄이고 내가 꽃이니 세상이 봄인 걸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것이다. 그 후로 스무 번 정도 같은 목련을 더 떨구고 나서야 꽃이 지는 모습도 겨우 가슴에 남았다. 알게 된 이상 내가 지나온 스무 번의 꽃들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빚쟁이마냥 지나간 세월을 소급해 누적된 봄을 서글퍼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인 것이다.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이번 봄의 서글픔이 또 더해질 거라는 예감을 한다. 지난 겨울 애타게 기다린 봄이면서 한편으론 어서 지나가라 마음을 달래보는 나... 봄을 견뎌내는 것이 마치 올 한해를 견뎌내는 실마리가 될 것처럼 나는 달력을 쳐다보고 만지작 거린다.

모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봄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나는 대학생이었다. 지금의 나는 봄도 대학생도 아니라는 실망에서 시작한 책이었다. 헌데, 대학생이고 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해보았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지금 대학생이 아닌 것에 지금 봄을 지나왔다는 것에 적잖이 위로가 된 듯하다. 돌이켜보니 이십년이 다 되간다. 얼마 전까지도 십년정도 지나왔다 생각했는데 그 사이 또 십년이 더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나를 두렵게 했다. 요즘은 ‘얼마 전 이야기다’하면 3,4년 ‘좀 되었다’ 하면 5,6년 ‘오래된 듯하다’하면 십 여 년, ‘옛날 이야기다’ 하면 이십 년 전이다. 이야기를 꺼낼수록 그만큼 내가 옛날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를 고개 숙이게 한다. 그때 내게도 이렇게 따스하고 고마운 책이 있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내 대학시절이 조금은 덜 아팠을까. 내 청춘도 실수를 조금은 덜 하였을까. 분명 많이도 아팠을텐데 나는 그것이 아픈 것인지 실감도 하지 못하며 청춘을 건너왔다. 지나고 보니 지독하게도 아팠었구나,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진다. 청춘은 정작 자신이 청춘의 정점에 있을 시엔 그 좋은 걸 그 아픈 걸 느끼지도 진단하지도 못한다는 것. 이십 년쯤 지나오니 비로소 깨달아진다. 그러니 청춘의 시절에 당사자로서 이러한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란도샘은 아마도 지나온 자신의 청춘엔 이러한 책이 없었음이 퍽이나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의 진심이 청춘을 한참 지나온 내게도 곡진히 전달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필히 지금의 청춘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른 적이 많으셨나보다. 말씀은 매사에 정성을 다하셨고 문장은 매 단락 정확하셨다. 과장이나 과분, 과다, 과찬을 절제하고 어떠한 순간에도 진중함이 전달되기만을 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꼭 한달 전에 이외수 작가의 <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라는 에세이를 접했는데 육중한 코끼리에게 사뿐한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청춘을 향한 ‘감성치유’전 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 누구보다 아픈 청춘들에게 청진기를 대어보고 발급해주시는 ‘이성처방’전과도 같았다.

애초부터, 교수님의 처방전은 나같은 중년독자에겐 효력이 발휘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잦은 진통제와 다양한 항생제로 길들여진 얼어붙은 환부가 자기만의 내성으로 잔뜩 영광스런 흉터를 만들었을 것이기에.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눈에 확연하며 대단한 증상은 아니었지만 미세하게나마 설레임의 파동이 느껴졌다고 할까. 흡사 이미 앓아온 만성병이거나 비슷한 증상에도 광범위한 효력이 미치는 것이었을까. 신기하게도 환자인 적이 있었던 내 경력은 이십년 후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증상은 무디어졌겠지만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청춘의 병인. 시련, 상처, 실패, 실연, 방황... 이런 구태의연한 청춘들이 순서없이 믹스되어 내 몸 곳곳에 어떤 형태로든 세균처럼 자리잡고 있었다는 자각. 그러고 보면 그 모든 세균들을 짊어지고 꿋꿋이 살아온 나는 그것들과 삶을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존재인지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기껏해야 반나절 달려온 내 자신에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나이쯤 되면 인생을 관조하고 사람을 통찰하는 내력에 비법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전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生의 비법은 나이와 비례하지는 않아 거울을 보며 얼마나 움츠러 들었던가.

그런 내가 이 책을 덮고 가장 크게 위안을 받은 건 그러한 비법을 알기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것,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는 것에 있었다. 교수님이 가르쳐 준대로 평균수명을 80세로 잡았을 때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를 24시간에 비유한다면, 내 나이는 지금 딱 12시 정오였다. 이십 년 전에도 겨우 여섯시였는데 그 후로 불과 여섯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고 지금은 점심메뉴를 앞에 두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오전 시간을 알차게 보내 놓고 다소 여유롭게 오후를 준비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침형 인간인 나는 오전시간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일과중 어렵거나 복잡한 일은 주로 오전에 처리하며 살아왔다. 오전에 일을 마쳐놓고 대부분 오후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했던 내 생활패턴을 생각한다면 현재시각 열 두시인 내 시계는 중간점검의 시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간혹 탕진했을지 모를 내 청춘이 안타까와 한숨을 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오후와 저녁, 그리고 한밤중이 되려면 열두 시간이나 남았다는 사실은 마흔 이후면 인생이 마감되는 줄 알고 있던 내게 눈물날만한 뉴스였다. 인생 팔십 중에 마흔이 아닌, 스물 네 시간 중에 열두시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점심을 거뜬히 먹고도 아직 얼마든지 약속을 잡을 수 있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언가를 해보아도, 심지어 당장 강원도 여행을 나선다 해도 오늘내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바다를 보고도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 책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하는 기분좋은 마법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지금 이 시간 각자 인생시계를 계산해 보자는 것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며 누구에게나 지금 이 순간 찰나의 희망을 공평하게 건네고 있었다. 청춘이 아니므로 대학생이 아니므로 내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는 편견을 일갈하며 청춘을 향해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멘토의 강의에 설득력있는 첫인상으로 호감을 주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지는 최대의 공감능력이자 최소한의 미덕이었다.

열두시의 설레임에서 시작해 나는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는 말씀에 밑줄을 그었다. 꼭 지금의 나 들으라고 하는 말처럼 너무 일찍 출세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불행이 될 수 있으며 마지막에 어떤 꿈을 이룰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유독 나는 ‘늦게’ 성공하는 것이나 미련스러운 ‘열망’이나 ‘천천히’ 이루어지는 기적같은 충고에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지금이 자기인생에서 가장 늙을 때’라는 말씀은 그렇기에 누구든 자신의 시작이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는 위로로 들렸다. 삶의 방식은 결의가 아니라 연습이므로 ‘더딘 것을 염려하지 말고 멈출 것을 염려하라’는 충고는 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초조해하던 나를 위해 아껴둔 말씀만 같았다. 평범해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가슴에게도 특별하게 전해질수 있도록 한마디 한마디에 세월의 힘을 다해 잉크를 새기시는 듯했다. 무엇보다 너무 높고 너무 아득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아니고 지금해왔던 것에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가능하겠다는 용기를 전해주셨다. 베스트 셀러의 특징이 눈높이가 대중적이며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이기도 한데 이 책은 추상과 구상, 현실과 이상, 솔직과 격식을 잘 조율하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낸 듯하다.

이 책에서 반가웠던 조언중 대학생 시절 너무 정확한 계획을 세우지 말고 우연이라는 삶과 그 우연으로 발생하는 뜻밖의 상황도 인생의 한부분임을 인지하라는 말씀도 있었다. 누구보다 계획세우기를 좋아하는 내 경우 교수님처럼 고시를 준비해 본적은 없지만 나는 현재 고시생같은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준비기간이라는 시간은 아직 무언가가 되지 못한 시점에서 시간을 번다는 장점도 있지만 준비하는 동안만큼은 남들에게 그다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언제까지 준비한다고 말해야 할 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막연함과 혹 이러다가 영원한 준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연습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고통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들에 지쳐 문득 포기하고 싶은 나를 확인하게 될까봐 나는 되도록 먼저 이룬 타자의 성취에 동요되지 않으려 눈과 귀를 닫고 살았다.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상대의 성취에 어떤 시기와 질투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질긴 마음의 훈련은 어이없게도 나의 성취에 대한 자기 폄하나 무감각의 결과로 나타났다. 남들이 부러울 것이 없으니 그 부러운 것을 내가 성취한들 나조차도 스스로 그다지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걸 좋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이룬 성취에도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인처럼 굴며 좋아할 일이 아니라 말하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이기려고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답은 내가 그들을 부러워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어쩌면 부러우면서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데 있었다. 이런 강박적인 만성불감증, 훈련된 자의식에 신선한 죽비가 되었던 한마디는 ‘부러워 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라는 솔직한 지적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말씀이었다. 어쩜, 내가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절대로,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았다. 남의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하는 내 부질없음이 싫고 미웠다. 남들의 성과를 지나치게 부러워하고 과하게 선망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외면하기 까지 했다. 어지간히 욕심도 많은 사람들이라 내심 혀를 찬 적도 있었다. 부러워한다고 내가 그들처럼 될 리 없으며 부러워만 하는 내 자신이 더 작아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따지고 보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기합리화요, 남의 성취를 깍아 내리는 비겁한 시기심의 변형된 감정이라는 것이다. 안 부럽다는 자기위안이 습관이 되었다고 정말로 부럽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해본다. 결과에선 졌을지 모르지만 부러워하지 않았으므로 진 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했다.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발전할 것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부러움보다 더 못난 자기오만일지 몰랐다. 란도샘은 이번에 졌느냐 이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항상 초점을 두라고 하신다. 누구나 가진 열등감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그것을 평생 밑짐을 삼아 타인의 성취도 부러워하고 인정하면서 솔직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선망하게 된 상대의 장점을 배우고 존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지 부럽지 않다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이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란도샘은 결국 부러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러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부단한 노력, 내 욕심을 채찍하는 긍정의 자극을 말하고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슬럼프’의 시간도 실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학을 살짝 유보하려는 심리의 일환이라며 슬럼프에 빠진 청춘을 위로하기 보다 슬럼프에 빠졌다는 인식때문에 나태함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셨다. 연배로 십 여 년 선배이지만 교수님은 실연도 실패도 슬럼프도 혹은 질투나 시기도 다 거쳐 오신 그래서 꼭 우리같은 친근함이 매력인 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란도샘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도 진솔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마음에 드는 작가의 글을 필사하고 시를 외우고 꾸준히 연습한 결과 그나마 이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는 겸손은 문학을 직업으로 하고자 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 청춘에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을 쓰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느 정도 내 문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연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니 연습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누군가 쓰라고 한들 그 이야길 듣고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땅을 칠만큼 후회되는 시간이다. 그 아련한 청춘의 일기장 하나 없는 내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써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어진다. 하지만 글도 책과 마찬가지로 좋다고 말로 권해서 행해지는 장르는 아닌 것이다. 내적 동기부여없이 타성에 젖은 행위는 의무적인 숙제나 리포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란도샘은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씨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를 예로 들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글로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전달할 때 그 울림이 얼마나 큰 것인지 부연한다. 이들 모두 문학을 업으로 삼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쓴다고 말이다. 그 문장을 읽고 나는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고 표현하는 데 글이 가진 힘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글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깨우침에 이르렀다. 문필로서 작가의 꿈은 접었지만 이렇게 어느 작가보다 설득력있는 에세이로 청춘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는 건 그러한 글의 힘을 가지려 누구보다 열망하고 지독하게 연습한 결과였다. 그를 보며 노력도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에 따른 운은 부록일뿐 아닐까. 글을 쓰라는 그의 진심을 만난 청춘이 새삼 부러워진다. 이 책을 읽은 청춘이라면 훗날 꼭 란도샘처럼 문필은 아니더라도 설득력있는 문장가가 되지 않을까. 그들이라면 그시절 나처럼 콧방귀로 글의 힘을 외면하지는 않을 성싶다. 이런 스승의 필사적인 설득이라면.

마치 어렵게 찾아간 교수님이라도 뵈고 온 양 나는 가득찬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이번 독서는 봄맞이 새단장 이벤트처럼 신선하고 개운했다. 큰 기대 없었는데 기분좋아지는 시간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청춘이 그리울 때 나는 과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돌아간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도 헤어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의 육체와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그 시절로 시간을 돌려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 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회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돌리고 싶은 청춘의 그곳엔 항상 가정법을 써가며 내 인생의 전환점을 교정하지 못해 안달하는 내 중년만이 바빠보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설령 다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선 또 반대의 가정법을 써먹지 못해 애통해 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절실히 깨닫고 생활에 체화하진 못하였다. 이 책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디는 건 청춘의 몫만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고통을 다시 새롭게 감내해야하는 갑절의 시련일 것이 분명하다. 얄팍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청춘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접게 되었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열 두시 이후의 오늘을 계획하겠다는 야무진 의지를 가져본다. 엊그제 신문에서도 우리나라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자격증과 인턴십, 공모전과 봉사활동, 기타 아르바이트로 취업 5종세트를 구색맞춰 스펙을 만들어야 하는 요즘의 대학생을 떠올리면 내가 지나왔던 대학생활은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연예인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는 엄마의 의견과 판단에 짓눌려 주체적인 인생설계를 하지 못하는 대학생.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대학생. 어렵게 졸업하였다 해도 입사경쟁에 밀려 임시직에 머무르는 불안한 청춘. 이 책이 그들의 고민을 모두 깨끗이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아직은 하루중 아침 일곱시일 뿐이라는 교수님의 메시지가 조그만 힘이 되었으면 한다. 살아보니 인생은 그리 대단한 결심이나 방대한 이론, 장대한 연설이 아닌 어느 날 갑자기 꽃망울을 터뜨리는 우리네 봄처럼 가벼운 일상의 한마디, 우연한 한 번의 만남, 기대치 않은 한번의 성과들로 방향이 바뀌어지는 얄궂은 구석이 있다. 이 한 권의 책이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한 번의 격려가 되고 예기치 않은 한 마디의 잠언이 된다면 좋겠다.

더불어 나 또한 열두 시 이후의 설레는 계획으로 더 근사한 오늘을 기다려 보고 싶다. 문득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는 옛 노랫말이 떠오른다. 봄이 꿈나라라면 언제나 꿈꾸는 내 청춘은 아직인 게 아닐까. 나의 봄은 해마다 새로 시작되니 그렇담 나는 매해 청춘인 채로 꿈을 꿀 수 있는 게 아닐까.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청춘의 꿈만큼은 사는 동안 유지하고 싶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내 꿈을 위해 남은 열 두 시간의 일정표를 짤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달뜬다. 어떤 사람을 만날까. 무슨 일을 할까. 다시 공부를 해볼까. 지나온 청춘엔 울었지만 다가올 꿈나라엔 웃고 싶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내일’을 기다리기 위해 오늘도 ‘내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련다. 점점 전성기에 다가가는 기쁨으로 마흔됨이 즐겁다는 란도샘의 마지막 일기를 기억한다. 청춘의 일기는 쓰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쓰는 글은 열 두 시 이후의 일기가 되길 바란다. 혹시 올해 다 이루지 못한 다해도 나는 하루중 십팔분만 소비 한 것이니 실망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도 ‘내 일’로써 ‘내일’을 준비해 볼테다. 그렇다면 ‘내일’도 나는 ‘내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내 일’로 이루어진 나의 ‘내일’이 비로소 나의 ‘오늘’이 되는 날 나는 오늘 작성한 열 두 시의 계획표에 가슴깊이 감사할 것이다. 열 두 시 이후, 내 남은 하루의 반, 그때 새로운 시작은 분명 따스한 봄날과 함께였을 것이다. 그날 내게 뜻밖의 인생시계를 선물해준 사람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시간 이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시계를 꼭 선물하고 싶다. 아침엔, 아니 오후엔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도 보고 싶다. 다행히도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그들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서로가 가슴속에 각자의 답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우리의 꿈은 시계와 함께 이미 계획되었을 테니까. 우리가 만난다면 그건 봄같은 꿈나라, 꿈같은 청춘의 계절일테니까. 그땐 꼭 다시 꽃피우는 우리가 되어 있을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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